"머리를 쪼개야 합니다" 전설의 명의 화타를 결국 죽인 조조, 그들의 고향 술 [스프]

심영구 기자 2024. 10. 14.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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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로 만나는 중국·중국인] 효웅 조조와 명의 화타의 고향술 '고정공주' - 안후이 보저우 (글 : 모종혁 중국문화평론가·재중 중국 전문 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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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저우에 있는 화타암 내의 화타상

소설 《삼국지》의 한 고사다. 조조가 위나라 왕에 오른 뒤 두통이 갈수록 심해졌다. 좋다는 약을 모두 먹었으나 효과가 없었다.

신하 중 한 명이 민간에서 활약하던 명의를 추천했다. '중국 외과의 비조'로 불리는 화타(華陀)였다. 조조는 즉시 화타를 조정으로 불렀다.

화타는 조조를 진찰한 뒤 "왕의 머릿속에 바람이 도는 풍질(風疾)이 있어 머리가 아픈 것"이라며 "완쾌를 위해서 마비산(麻沸散)을 뿌려 왕을 잠들게 하고 머리를 쪼개 바람기를 걷어내겠다"라고 말했다. 조조는 화타가 자신을 해하려 한다며 의심했다.

보저우의 운병도기념관에 있는 조조와 참모들 밀랍상

그래서 수술을 바로 하는 대신에 화타를 어의로 임명해서 곁에 두었다. 하지만 화타는 의술을 한 사람이 아닌 만백성을 위해 사용하고 싶었다. 또한 조조가 무력으로 왕에 오른 일을 경멸했다. 따라서 부인이 위독하니 고향에 돌아가 돌봐야 한다며 거짓을 고했다. 조조는 이 청을 받아들였고 화타는 조정을 벗어났다.

그 뒤 조조는 사람을 여러 차례 보내 화타에게 돌아오라고 청했다. 그러나 화타는 이런저런 핑계만 댈 뿐 돌아가지 않았다. 결국 조조는 화가 나서 사람을 보내 정탐시켰고, 거짓말은 탄로가 났다.

보저우에 조성된 화타암

조조는 화타는 조정으로 압송하여 곧 죽이려 했으나, 순욱이 나서서 만류했다. 이 소식은 옥중의 화타에게 전해졌다. 화타는 머지않아 처형될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몸에 지니고 다녔던 의서를 옥리에게 건네며, 후세인들에게 꼭 전해 줄 것을 신신당부했다. 하지만 옥리는 자신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워 의서를 모두 불태웠다.

며칠 뒤 화타는 고된 옥살이를 견뎌내지 못하고 죽었다. 조조는 병세가 더욱 깊어지는 와중에도 "그놈은 죽어 마땅하다"라며 자위했다. 하지만 아끼던 아들 조충이 중병으로 쓰러졌다.

화타암에는 후세인들이 화타를 칭송하며 남긴 비문이 많다.

온갖 명의를 불러 치료했으나 조충은 요절했다. 그제야 조조는 화타를 죽인 일을 깊이 후회했다. 이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정사 《삼국지》에도 기록되어 있다. 다만 소설처럼 자세한 묘사는 없다.

본래 화타가 조조에게 사용하려 했던 마비산은 인도산 대마로 만든 마취제다. 화타는 마비산으로 환자를 전신 혹은 부분 마취한 뒤 다양한 수술을 집도했다. 시술 속도가 워낙 빨라서 환자가 마취에서 깨어나면 아무런 통증을 못 느낄 정도였다. 위장이 절제된 환자가 4~5일 만에 완치된 일화도 전해진다.

보저우의 조조공원에 세워진 조조 석상

화타가 돌아갔던 고향은 안후이(安徽)성 보저우(亳州)다. 흥미로운 점은 조조의 고향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동향인인 것이다. 조조는 환관의 손자였다. 할아버지 조등은 후한의 다섯 황제를 섬기며 황실을 지켰다. 그 덕분에 양자를 들이는 걸 허락받아 조숭을 거둬들였다. 조숭은 양아버지 덕분에 관직에 올랐고 장사를 통해 큰 능력을 발휘했다.

조조는 이런 집안 내력 때문에 조정의 권문세가들로부터 모멸과 멸시를 당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명성을 발판 삼아 관직에 올랐고, 아버지의 재산 덕분에 인재를 모았다.

조조가문묘군에서 발굴된 조숭의 수의. 2,400개의 옥을 은실로 엮었다.

조조는 조등과 조숭이 죽자, 고향에 가묘를 조성했다. 조조가문묘군은 훗날 발굴되어 조조공원과 함께 조성됐다.

조조와 관련된 또 다른 유적은 운병도(運兵道)다. 운병도는 조조의 명에 따라 건설된 지하통로다. 지하에 성곽의 안과 밖을 통로로 연결하여 전투 상황에 따라 군사를 몰래 이동하기 위해 만들었다.

사실 운병도는 여러 지방에 건설했는데, 현재까지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것은 보저우 운병도가 유일하다. 전체 길이가 8km가 넘고 높이는 1.7~2.1m, 폭은 0.6~0.9m이다. 일부 구간은 폭과 높이가 2배다.

조조가 건설한 운병도. 고대에 군사적 목적으로 만든 지하통행로다.

《삼국지》는 조조를 화타까지 죽인 효웅(梟雄)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조조는 용인술이 뛰어났던 리더였다. 특히 출신 성분을 따지지 않고, 오직 능력만 봤다.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뛰어난 재주가 하나 있으면, 출신 성분이나 인격적인 결함에 구애 없이 과감하게 기용했다.

심지어 아내를 고를 때도 마찬가지였다. 정부인이 죽자, 첩인 변 씨를 정실로 앉혔다. 변 씨는 기녀 출신이었으나 총명하고 현숙했다. 이런 냉철한 현실 인식을 가졌기에 무력을 앞세워 혼란을 종식하려 했다.

고대 고정공주의 양조장을 재연한 미니어처

또한 법가사상으로 나라를 통치했다. 둔전제, 전매제 등을 실시해서 백성들의 생활 안정과 군비 확충을 도모했다. 또한 전쟁 사상자와 그 유가족, 극빈 가정을 위한 구호정책을 시행했다.

냉혹한 통치자의 모습과 달리 조조는 사서와 시문에 조예가 깊었다. 《손자병법》의 뛰어난 해석가로 전문에 주석을 꼼꼼히 달아 남겼다. 감수성 어린 시인으로 소박한 민요였던 악부(樂府)를 문학의 한 장르로 정착시켰다. 아들인 조비, 조식과 함께 '건안칠자(建安七子)'로 손꼽히며 문단을 이끌었다. 후대인들은 조조의 작품을 '후한 말의 진실한 서사시'로 평가한다.

송대 술을 빚는 데 썼던 우물. 강물의 범람으로 지하 4m 아래 파묻혔다.

조조는 말년에 병이 깊어가자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예감했다. 이에 고향 술을 마시며 흐르는 세월의 덧없음을 한탄했다. 당시 지은 '단가행(短歌行)'에는 조조의 심정이 잘 드러나고 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심영구 기자 so5what@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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