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P 프린터가 호환 카트리지 거부하는 이유, '바이러스' 맞을까

HP 프린터 카트리지 (출처 : HP)

프린터에 잉크를 공급하는 부품을 '카트리지'라고 부른다. 대개는 프린터 제조사가 만드는데, 일부 소비자는 서드파티 제조사가 만드는 '호환 카트리지'를 선호하는 경우도 있다. 가격이 정품 카트리지의 절반 수준인 데다 인쇄 품질 차이도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HP 프린터 사용자라면 선택지가 없다. HP는 자사 프린터에 '다이나믹 시큐리티(Dynamic Security)'라는 펌웨어를 적용해 호환 카트리지 사용을 막고 있다. 이 펌웨어가 적용된 프린터에 호환 카트리지를 장착하면 HP 칩이 인식되지 않았다는 경고 메시지를 나타나면서 인쇄를 거부한다.

호환 카트리지 사용 차단, 독점으로 인정돼 패소하기도

호환 카트리지를 사용하면 인쇄가 정상적으로 되지 않는다 (출처 : Ars Technica)

다이나믹 시큐리티 펌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2016년인데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건 2022년 말부터다.

​HP는 다이나믹 시큐리티 적용 이후 소비자에게 소송을 당하기도 했다. 이달 초 소비자 11명이 미국 일리노이주 북부 지방법원에 HP를 고소했다. HP가 호환 카트리지 사용을 차단하면서 인쇄 비용을 절반가량 줄일 수 있는 선택지를 잃었으며, HP가 카트리지 시장을 독점해 연방 및 일리노이주의 독점금지법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이전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2018년 9월 HP는 같은 이유로 캘리포니아에서 벌어진 법정 공방에서 패소해 원고 측에 150만 달러(약 20억 원)를 지불하기로 합의했다. 같은 해 호주에서도 소비자 한 명당 50호주달러(약 4만 4000원)를 지급했다. 2020년에는 이탈리아에서 독점금지법 위반 사유로 당국에 벌금을 1000만 유로(약 145억 원) 납부했으며, 2022년 9월 유럽에서 합의금만 135만 달러(약 18억 원)를 지급했다.

"바이러스 때문에 호환 카트리지 차단"...근거 빈약해

다이나믹 시큐리티 펌웨어가 적용된 프린터에는 정품 카트리지만 사용할 수 있다 (출처 : HP)

연이은 패소에도 불구하고 HP는 다이나믹 시큐리티 펌웨어를 고집하고 있다. 1월 18일(현지시간) HP 최고경영자(CEO) 엔리케 로레스(Enrique Lores)는 미국 경제 뉴스 CNBC와의 인터뷰에서 이에 대해 해명했다. 그는 호환 카트리지를 통해 프린터와 컴퓨터에 바이러스가 유입될 수 있다며, 보안을 위해 HP가 만든 정품 카트리지만 인식되도록 조치했다고 밝혔다.

​물론 석연치 않은 점이다. 1월 23일 미국 IT 매체 아르스 테크니카(Ars Technica)는 보안 전문가 의견을 인용해 카트리지를 거쳐 바이러스를 침투시키는 방식은 매우 비효율적이며 실현하기 어렵다고 보도한 바 있다.

​HP가 언급한 방법대로 해킹하려면 대상자가 사용하는 프린터 모델을 파악하고, 그 사람이 바이러스가 들어있는 호환 카트리지를 구매해야 한다. 매체는 국가처럼 개인 신상을 면밀히 파악할 수 있는 단체가 아닌 이상 실현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카트리지로 바이러스가 유입된다 해도 인쇄를 차단하는 것과는 무관하다고 덧붙였다.

​매체는 HP가 주장한 내용의 근거도 신뢰할 수 없다고 언급했다. 카트리지로 바이러스가 유입될 수 있다는 의견은 HP가 자사 제품의 보안 취약점을 공모하는 '버그 바운티 프로그램'을 통해 처음 제기됐다. 그런데 이 연구를 주도한 단체가 HP로부터 연구비를 지원받고, 처음부터 카트리지로 프린터를 감염시키는 상황을 가정한 채 연구를 진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연구 발표와 HP의 대응 시기도 엇갈렸다. 연구 결과는 2022년 발표됐지만 HP는 그보다 앞선 2016년부터 호환 카트리지 사용을 막아왔다.

수익화 의도 커 보여, 소비자 불안·반발 가중돼

HP는 2016년 다이나믹 시큐리티 펌웨어를 발표하면서 인쇄 품질을 일정하게 유지하고 자사의 지식재산권(IP)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라고 밝혔다. 하지만 최근 HP 행보와 관계자의 발언이 재조명 받으면서 여론은 나빠졌다. HP가 카트리지 판매 수익을 늘리려고 여러 조치를 취한 정황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구독형 잉크 배송 서비스 '인스턴트 잉크' (출처 : HP)

지난해 12월 HP 최고재무관리자(CFO) 마리 마이어스(Marie Myers)는 HP가 운영하는 월간 구독 서비스 '인스턴트 잉크(Instand Ink)' 구독자가 정품 카트리지를 구매하는 고객보다 20% 더 많은 이윤을 가져다준다고 언급했다. 인스턴트 잉크는 매월 요금을 지불하고 지정된 매수만큼 인쇄하는 독특한 구독 서비스다. 프린터가 카트리지 잉크 잔량을 측정해, 일정량 이하로 떨어지면 HP에서 새 카트리지를 집으로 보내준다.

​잉크를 무제한으로 제공한다는 점에서 카트리지를 새로 구매해 교체하는 것보다 저렴할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잉크 잔량이 줄면 새 카트리지가 배송되므로 잉크가 부족해 인쇄를 못 하는 상황도 효과적으로 예방한다. 하지만 인쇄 매수 제한으로 흑백 문서만 가끔 출력한다면 오히려 비용 지출이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인스턴트 잉크 기능을 지원하는 프린터 가격도 일반 모델의 2배에 달한다.

​HP CEO 엔리케 로레스가 CNBC와의 인터뷰에서 발언한 내용도 논란을 낳았다. 그는 소비자가 HP 프린터를 구매하면 HP가 손해를 보며, 정품 카트리지를 계속 구매해야 이익을 보는 구조라고 주장했다. 만약 소비자가 인쇄를 자주 하지 않거나 호환 카트리지를 구매할 경우 HP가 소비자에게 건 투자가 실패하는 셈이라고 빗댔다.

다이나믹 시큐리티 펌웨어가 배포될 때 정품 카트리지 가격도 인상됐다 (출처 : Ars Technica)

한편 아르스 테크니카는 다이나믹 시큐리티 펌웨어가 본격적으로 배포된 2022년 말에서 2023년 초 사이에 HP 정품 카트리지 가격이 인상됐다고 전했다. HP CEO는 이 건에 대해 "비즈니스 모델"이라고 일축했다. 카트리지로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인정한 셈이다.

​여러 상황을 고려해 볼 때 HP는 수익을 늘리기 위해 호환 카트리지를 일부러 막았을 가능성이 높다. 수년간 법정 공방을 벌이고 막대한 합의금과 벌금을 납부했음에도 HP는 개선 의지를 드러내지 않았다. 아직 호환 카트리지를 쓸 수 있는 프린터에도 다이나믹 시큐리티 펌웨어가 적용될 가능성이 남아 소비자의 불안을 더 키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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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플러스 에디터 이병찬
tech-plu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