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풍부한 한국 페미니즘 미술···“나는 여성 미술계가 부럽다”
반세기 한국 페미니즘 미술의 지형도
천경자부터 신진 작가 등 44명 소개
퀴어정치학 등 15개 화두 던지며
촘촘한 ‘페미니즘 미술 지형도’ 그려
·
“작가들의 말, 비평문보다 설득력 있어
생생한 증언 듣고 그들의 사상 이해”
“미술계 링에 올라 남성중심 화단에 맞서는 ‘환상의 복식조’를 보라.”
2021년 1월, 김홍희 미술사학자는 한국 페미니즘 미술의 지형도를 그리는 ‘김홍희의 페미니즘 미술 읽기’ 첫 연재를 경향신문에 시작하며 이같이 말했다.
강렬한 일성은 선언에 그치지 않았다. 나혜석·천경자부터 젊은 신진 작가까지 총 44명의 작가들을 아우르는 ‘한국 페미니즘 미술의 지형도’를 2년에 걸쳐 그려냈다. 김혜순 시인은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촘촘한 단면도와 조감도와 설계도를 갖춘 페미니즘 예술 지형학은 없었다. 나는 지금 여성 미술계가 부럽다”고 말한다.
경향신문에 연재한 글을 수정·보완해 엮은 책 <페미니즘 미술 읽기>가 한국과 영국에서 동시에 출간됐다. 한국에선 ‘한국 여성 미술가들의 저항과 탈주’라는 부제를 달고 열화당에서 출간됐으며, 영국에선 세계 3대 아트북 출판사로 꼽히는 파이돈이 <Korean Feminist Artists: Confront and Deconstruct>라는 제목으로 펴냈다. 파이돈은 미술 전공자들의 필독서로 꼽히는 곰브리치의 <서양 미술사>를 출간한 곳으로 유명하다.
15개 화두로 44명 작가 엮어 만든 페미니즘 미술 지형도
“최근 여성 미술, 페미니즘 미술이 그 어느 때보다 조명받으며 회자되고 있어요. 단순한 유행인지, 아니면 페미니즘 ‘리셋’인지 궁금했죠. 또 작가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비전을 갖고 있는지 알고 싶었어요. 1990년대 초부터 큐레이터, 평론가로서 한국 페미니즘 미술과 함께해온 입장에서 답을 찾고 정리해보고 싶었습니다.”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 국제갤러리에서 만난 김홍희가 말했다.
김홍희는 서울시립미술관장, 경기도미술관장 등을 지냈으며 현재 백남준문화재단 이사장이다. 1999년 ‘팥쥐들의 행진’ 등 여러 페미니즘 전시를 기획하고 <여성과 미술> <큐레이터는 작가를 먹고 산다> 등 저서를 펴냈다.
김홍희가 그려낸 ‘페미니즘 미술 지형도’는 방대하고 섬세하다.
페미니즘 미술이 발아하던 1970년대부터 포스트모던 페미니즘 시대인 2000년대까지의 변화를 거쳐, 2010년대 이후 ‘페미니즘 리부트’로 불리는 ‘넷페미’로 이어지는 흐름의 큰 맥을 짚는 동시에 15개의 화두를 선정해 작가 2~4명을 묶어 ‘복식조’를 만들었다.
여성성과 섹슈얼리티, 퀴어 정치학, 감정노동자, 디아스포라, 추상미술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화두를 다루며 제1세대 페미니스트 예술가 윤석남, 박영숙부터 세계적 작가가 된 이불, 양혜규, 차세대 스타로 각광받는 이미래, 1991년생 작가 김나희까지 다양한 세대의 작가를 아우른다. 이 때문에 현대 페미니즘의 주요 담론을 폭넓게 다루는 동시에 개별 작가의 목소리와 작품을 섬세하게 엮어내는 것이 가능했다. 김홍희는 “백화점 선물세트처럼 ‘에이스’ 작가만 선정하지 않았다. 화두를 기준으로 원로·중진·신진 작가들을 고루 초대했다”고 말했다.
작가들의 생생하고 진솔한 목소리 실어···“비평은 사랑의 행위”
책에서 가장 부각되는 건 ‘작가들의 목소리’다. 책을 열면 작가 44명의 생생한 말을 인용한 권두삽지를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다. 김홍희는 “오직 작가의 말에 귀 기울이며 그들의 비전과 사상을 전달하고 싶었다. 생생하고 진솔한 작가들의 말이 권위 있는 비평문보다 강하고 설득력 있다”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책은 비평가 김홍희가 작가들과 나눈 치밀한 대화록이기도 하다. 2년의 연재, 책 출간을 위한 2년의 수정·보완 작업 등 총 4년 동안 김홍희는 작가들과 인터뷰하고 수시로 대화를 나눴다. “작가를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글을 써보니 너무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단 걸 깨달았죠. 작가들의 생생한 증언 같은 말을 듣고 그들의 사상을 확실하게 이해하게 됐어요. ‘비평과 큐레이팅은 사랑의 행위’라는 저의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여성 화가가 그리는 여성 초상화’에 빗댔다. “여성은 남성중심적 사회 속에서 타자, 피해자·희생자, 제2의 성으로 여겨지며 ‘여성’의 자리에 구속되죠. 여성 비평가가 여성 작가에 대해 쓰는 과정에서 어떤 ‘화학적 반응’이 일어나 남성적 담론을 해체하는 근거가 되고, 페미니즘적 시도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지난달 30일 출판기념회가 열린 국제갤러리 1층 더레스토랑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책에 등장한 30여명의 작가를 비롯해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장, 강승완 부산현대미술관장 등 미술계 주요 인사들로 가득했다. “반세기 한국 페미니즘 미술의 시간적 지형도를 만들어온 모든 페미니스트 미술인이 자축하고 격려하는 자리”였다.
정정엽 작가는 “1987년 여성미술연구회를 만들었다. 40년이 지나 각개격파로 작업을 이어오던 기라성 같은 작가들이 한데 모일 수 있게 한 구심력이 김홍희 선생님”이라고 말했다. 정은영 작가는 “‘팥쥐들의 행진’을 보고 난 후 충격에 휩싸였고, 페미니즘 미술의 역사와 큰 물결이 있었다는 걸 확인하고 훌륭한 작가가 돼야겠다고 생각했다”며 “그동안 작업을 그만둬야 하나 하는 생각에 휩싸일 때마다 김홍희 선생님이 힘을 주셨다”고 말했다.
오는 10일에는 영국 런던에서 출간 기념 북토크가 열린다. 김홍희와 신미경·김아영 작가, 미술평론가 리타(이연숙)가 참여한다.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101052152005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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