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세기 유럽최고' 크루이프라 가능했던 9가지 업적



[인터풋볼] 이현민 기자 = 세계축구의 큰 별이 졌다. 요한 크루이프가 2016년 3월 24일 6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크루이프 재단은 24일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암 투명 중이던 바르셀로나와 네덜란드의 레전드 크루이프가 생을 마감했다”고 발표했다. 네덜란드 언론을 포함한 전 세계 언론은 이 소식을 다뤘고, 축구인과 관계자들은 애도의 뜻을 전했다.
영국 ‘미러’는 “68세로 세상을 떠난 그는 그저 놀라운 스타가 아닌 혁신가였다. 단순히 아약스, 바르셀로나, 네덜란드의 레전드가 아닌 축구 그 자체 전설이다. 지금까지 누구보다 우아했던, 네덜란드를 상징하는 그는 암과 사투 끝에 세상과 이별했다. 선수와 감독으로 혁신적이었고, 기존에 뻔한 전술을 파괴한 혁신가였다”고 높게 평가하면서, 그만 가진 9가지 업적을 조명했다.
1. 크루이프턴
본인의 이름을 딴 기술을 가진 선수가 몇이나 될까.
2. 토털사커 창시자
‘티키타카’는 현재 바르셀로나와 스페인 축구의 간판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1970년대 크루이프가 이끌었던 아약스, 네덜란드의 ‘토털사커’에서 비롯된 것이다. 빠른 패스, 빠른 무브먼트, 유기적 움직임이 그것. 왠지 친숙하지 않나. 크루이프는 홀로 리오넬 메시와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임무를 수행했다.
3. 발롱도르 최초 3회 수상
현재 최고 기록은 5회인 메시가 보유하고 있다. 메시가 태어나기 전 크루이프는 1971, 1973, 1974 4년 동안 3회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4. ‘3선’ 아디다스 아닌 홀로 ‘2선’을 입은, 그것도 월드컵에서
진부하고, 고리타분한 걸 딱 질색한 크루이프다. 1974 서독 월드컵에서 네덜란드를 결승에 올려놓았다. 당시 네덜란드는 아디다스 유니폼을 입었다. 결승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홀로 푸마 축구화를 신었고, 다른 동료들과 달리 혼자 2선 유니폼을 입었다. 그가 아디다스에게 연유를 설명했을까. 당시 흔치 않았던 마이웨이를 엿볼 수 있다.
5. 최고의 스타가 등번호 ‘14번’
과거에 대부분 주전 선수들은 1번에서 11번 셔츠를 입었다. 크루이프가 부상 회복 후 복귀한 1970-71시즌에 그 번호를 다른 선수가 달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14번을 부여받았고, 기존의 틀을 깼다. 현재 40번~50번인 유스 선수들은 크루이프에게 고마워하라.
6. 아약스→바르사 이적 때 ‘200만 달러’
최고 스타인 크루이프는 아약스를 떠나 바르셀로나로 이적했다. 당시 200만 달러의 이적료를 기록했다. 현재 한화로 약 23억3천만 원이다. 무려 40년 전이다. 이 금액을 기록한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7. 기술과 능력 위주 ‘라 마시아’ 극대화
마치 축구공장 같은, 바르셀로나의 ‘라 마시아’는 끊임없이 좋은 선수를 배출해내고 있다. 흔히 표현하는 믿고 쓰는 ‘바르셀로나산’이라고 하는 것처럼. ‘라 마시아’는 크루이프가 1988년 팀 매니저로 부임하기 전부터 존재했고 신체조건 위주로 선수 선발을 해왔다. 그런데 그를 만나고부터 라 마시아는 기술과 능력 위주로 탈바꿈했다. 메시와 이니에스타 탄생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 크루이프가 아니었다면 작고 왜소한 선수들이 설 자리가 없었을지도.
8. 오렌지군단의 최초 퇴장 선수
다소 불명예스러운 기록이다. 1968년 체코 슬로바키아를 상대로 레드카드를 받은 최초의 선수로 남아 있다.
9. 한 세기 동안 유럽 최고의 선수
말이 필요 없는 최고의 선수다.
사진=바르셀로나, 네덜란드축구협회, 크루이프 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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