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어의 법칙 폐기]② '연결 시대' 패러다임 바뀌는 반도체산업.."집적도가 전부는 아니다"






“애플 아이폰S6에 들어가는 지문인식 반도체의 평면 크기는 엄지손가락 첫 마디 만합니다. 반도체 센서의 크기가 엄지손가락 첫 마디 만해야 사람마다 독특한 지문을 정확히 구별할 수 있으니까요. 연간 아이폰 생산량은 2억대 가량입니다. 아이폰 지문인식 반도체의 연간 수요를 맞추기 위해선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 라인 하나가 통째로 필요한데, 초미세 공정(집적도) 생산라인이 아니어도 됩니다"
“스마트폰에서도 음향의 질을 따지는 소비자들의 요구가 늘어나고 있어요. 음향의 질을 좌지우지하는 건 오디오 코덱 칩입니다. 이 칩 역시도 무어의 법칙을 따르지 않습니다. 아날로그 반도체의 특성상 크기나 선폭(線幅)을 줄이면 오히려 성능이 떨어지기 때문이지요.”
반도체 산업의 생존 공식이 바뀌고 있다. 더 많은 기능을 더 작은 칩에 넣기 위한 초미세 공정(工程) 경쟁 시대가 변곡점을 만났다. 인텔의 ‘무어의 법칙’ 폐기 선언이 이런 분위기를 상징한다. 무어의 법칙은 반도체 집적도가 1년6개월마다 두배씩 증가한다는 것으로 반도체 산업 발전의 공식이었다.
그렇다면 내로라하는 반도체 업체들이 더이상 집적도만으로 경쟁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나선 배경은 무엇일까. 크게 두가지다.
첫번째, 사람과 사람은 물론 사물인터넷(IoT), 자율주행 등으로 기기와 기기가 연결되면서 다양한 반도체 신규 수요처가 빠른 속도로 생겨나고 있다. 이런 수요는 집적도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특정 수요를 맞춤형으로 충족하는 설계 및 생산 능력 등 차별화가 경쟁력으로 떠올랐다.
과거 반도체의 수요처는 컴퓨터와 휴대폰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물인터넷(IoT), 스마트카, 웨어러블, 드론 등 다양한 기술이나 제품이 등장하면서 반도체의 사용처는 점차 확대되고 있다. 이들 기기에는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를 비롯해 카메라이미지센터(CIS), 통신칩, 근거리무선통신(NFC)칩, 위성항법장치(GPS)칩, 전력관리칩 등 다양한 반도체들이 들어있다. 심지어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비데에도 반도체가 사용된다.
스마트카의 예를 들어보자. 미국의 IT 전문 시장조사업체인 스트래티지 애널리틱스(SA)에 따르면 올해 자동차 1대당 투입되는 반도체 비용은 333달러(약 38만원) 수준이다. 이는 2009년 250달러(약 28만5250원)에 비해 17% 증가한 것이다. 2020년에는 자동차 원가에서 전장 부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을 넘어서고 차량용 반도체 수요도 급증할 것으로 예상된다.
두번째, 초미세 공정이 발열 등 기술뿐 아니라 경제성 측면에서도 한계에 직면했다. 컨설팅 업체 인터내셔널 비즈니스 스트래티지에 따르면 10년 전 65나노 반도체 개발 비용은 1600만달러 정도였다. 반면 최신 14나노 반도체 개발 비용은 1억3200만달러다. 개발비에 걸맞은 수익을 내려면 7.5배인 9억8700만 달러의 매출을 올려야 한다. 이런 추세라면 5나노 공정에서 개발비를 회수하려면 매출 규모가 60억달러에 달해야 한다
이제는 집적도를 높이는데 드는 비용을 감수하기 어려운 상황이 된 것이다. 비싸게 팔 수 있는 몇 종류의 제품을 제외하면 무어의 법칙을 따르는 게 '사업적'으로 의미가 없어졌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상무는 “과거 PC, 휴대폰 등이 반도체의 최대 수요처였지만, 최근에는 여러 분야에서 반도체가 소비되면서 다양한 신규 시장이 창출되고 있다”며 “지난 30여년 간 반도체 산업을 지배해온 ‘대규모 신규 수요 발생→대규모 투자→집적도 향상→대규모 신규 수요 발생’이라는 공식이 폐기되고 있다"고 말했다.
한태희 성균관대 반도체시스템 공학과 교수는 “다양한 기기에 다양한 반도체가 들어가면서 반도체 기업들의 전략이 소품종 대량생산에서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바뀌고 있다”며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대량생산에 집중하는 국내 기업들은 소비자의 요구에 맞게 최적화된 반도체를 탄력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새로운 방향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고 말했다.
◆ 흔들리는 반도체 공식…“집적도가 전부는 아니다”
반도체의 집적도는 하나의 실리콘 칩 위에 심어진 트랜지스터, 다이오드 등 소자의 수를 말하는 단위다. 집적도는 칩의 회로를 얼마나 얇게 만들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전자가 오가는 회로선폭을 좁게 만들수록 같은 면적에 더 많은 소자를 심을 수 있다. 회로가 미세해지면 전자가 이동하는 거리가 짧아져 처리 속도가 좋아진다.
그동안 반도체 산업은 ‘대규모 신규 수요 발생→대규모 투자→집적도 향상→대규모 신규 수요 발생'이라는 선순환 구도 속에서 움직였다. 인텔이 1972년 선보인 첫 컴퓨터 마이크로프로세서 ‘4004’에는 트랜지스터가 2300개 들어갔다. 4004 프로세서는 10µm(마이크로미터) 공정으로 설계됐다. 10µm는 0.01mm다.
이후 고성능 개인용 컴퓨터(PC)에 대한 수요가 늘면서 반도체의 집적도도 빠르게 높아졌다. 1985년 인텔이 개발한 80386 중앙처리장치(CPU)는 1µm 공정으로 생산됐다. 4년 뒤인 1989년에는 486 CPU가 처음으로 800 나노미터(nm, 10억분의 1미터) 공정으로 생산되면서 나노 시대가 열렸다.
집적도 개선에 가속도가 붙으면서 36년이 지난 현재 14나노 공정 기술이 개발됐다. 36년 만에 집적도가 57배 늘어난 것으로 인텔 창업자 고든 무어가 제시한 무어의 법칙이 실현되어 온 것이다.
더 많은 기능을 더 작은 칩안에 넣는 집적도 경쟁은 반도체 산업의 원동력이었다. 삼성전자가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20년 넘게 부동의 1위를 차지하는 것도 앞선 초미세 집적도 기술을 내세워 메모리 반도체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도체 시장의 환경은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 PC 시대의 퇴조(退潮)와 반도체 수요처의 다변화, 기술적 한계 등으로 집적도 제일주의가 서서히 물러가고 있다. 그렇다고 집적도가 반도체 경쟁력의 원천이 더이상 아니라는 얘긴 아니다. 집적도만으로 경쟁력을 유지하는 시대는 가고 있다는 의미다.
◆ 맞춤형 차별화가 경쟁력인 시대가 왔다
‘스냅드래곤 820A(자동차), 스냅드래곤 웨어 2100(웨어러블), 스냅드래곤X5 LTE(사물인터넷), 스냅드래곤 플라이트(드론)...’
미국 반도체 기업 퀄컴이 올해 발표한 다양한 제품군이다. 지난해만 해도 퀄컴의 브랜드는 스마트폰용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스냅드래곤' 한가지뿐이었다. 그러나 기기들끼리 연결되는 시대가 도래하면서 퀄컴은 전략을 바꿨다. 반도체를 탑재하는 기기들이 대폭 늘어나 다양한 반도체의 수요가 발생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기기에 탑재되는 반도체 수 자체도 증가하고 있다. 반도체는 연산과 데이터 저장의 핵심 품목이다.
이처럼 반도체 수요처가 다변화하면서 다양한 수요자의 요구를 충족하는 맞춤형 제품을 얼마나 빠르게 만들어 내느냐가 경쟁력으로 떠올랐다. 생산기지조차 없는 미국 퀄컴이 글로벌 반도체 시장을 호령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반도체는 용도에 따라 메모리 반도체와 시스템(비메모리) 반도체로 나뉜다. 메모리 반도체는 메모리를 저장하는 역할을 하고, 시스템 반도체는 연산·제어 등의 정보처리 기능을 한다. 메모리 반도체의 경우 앞선 초미세 공정 기술을 바탕으로 한 대량생산 체제 구축이 경쟁력의 원천이다. 이에 반해 시스템 반도체의 경우 다양한 수요에 대한 맞춤형 설계 및 생산 능력 등 차별화 경쟁력이 필요하다.
반도체 수요가 다변화하면서 반도체 시장의 75%를 점유하는 시스템 반도체 시장은 더욱 빠르게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시장조사업체 IHS에 따르면 2014년 시스템 반도체 시장 규모는 2719억1700만 달러로 메모리 반도체 시장 규모(825억2600만 달러)의 3배였다. 전문가들은 시스템 반도체 시장의 규모가 2017년까지 301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예측한다.
스마트폰에서 사람의 두뇌와 눈의 역할을 하는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와 카메라이미지센서(CIS)가 대표적인 시스템 반도체다. 이 밖에도 TV, 냉장고, 세탁기 등 가전제품의 온도 조절·전원 장치에 쓰이고 자동차의 시동, 전·후방 센서, 계기판에도 사용된다. 전자장치로 작동되는 대부분 분야에 시스템 반도체가 사용되고 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는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부동의 1위와 2위 업체다. 두 회사의 점유율을 합치면 70%가 넘는다.
그러나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 국내 기업들의 영향력은 미미하다. 2015년 시스템 반도체 시장에서 삼성전자 등 국내 기업들의 점유율은 5%에 불과했다. 그나마 삼성전자 시스템LSI 사업부가 개발한 AP 엑시노스7가 갤럭시S6와 갤럭시노트5에 탑재되면서 점유율이 상승해서 이 정도다. 시스템 반도체 시장의 경우 PC 분야는 인텔(CPU), 모바일 분야에서는 퀄컴(AP)이 각각 주도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중국의 반도체 굴기(崛起·우뚝 섬)와 반도체 산업의 패러다임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국내 기업들이 변신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한태희 성균관대 교수는 “시스템 반도체 분야는 국내 기업들이 집적도 향상을 무기로 시장을 이끄는 메모리 반도체 시장보다 3~4배 더 큰 시장”이라며 “소비자가 원하는 차별화된 반도체 제품을 적재적소(適材適所)에 투입하기 위해서는 선행투자와 연구개발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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