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공간>美軍초상화 그려 마련한 집.. 巨匠(거장)의 '마루 아틀리에' 흔적도 없이..

기자 2016. 3. 18.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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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화가’ 박수근 화백의 대표작 대부분이 만들어진 서울 종로구 창신동 393-16 집터의 과거(그림·‘골목안’, 캔버스에 유채, 80.3x53㎝)와 현재(오른쪽 사진) 모습.
빛바랜 흑백사진에는 박 화백이 부인 김복순 씨와 둘째 딸 인애(11세에 병사)와 함께 창신동 집 마루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행복한 시절이 담겼다.
박 화백의 창신동 집터에는 현재 순댓국집과 부동산이 들어서 있다. 순댓국집 담벼락 물받이 홈통(아래 오른쪽)의 ‘박수근 화백 사시던 집’이라는 글귀는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지난해 5월 9일 ‘박수근 화백 50주기 특별전’을 관람한 뒤 박 화백의 큰딸 박인숙 씨와 함께 옛집을 찾았을 때 박 씨가 “이 홈통은 옛날 그대로 남아있다”고 하자 “그러면 내가 20세기 최고의 화가가 살던 집이라는 걸 글로 남겨야겠다”며 붓펜으로 써놓은 것이다.

30 화가 박수근의 서울 창신동 집

서민이라는 말은 부르기 좋고 정감 있지만 나를 누가 서민이라고 불러준다면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 이는 실제로 서민이지만 스스로 서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서일 것이다. 그래도 우리가 어려웠던 시절, 누구나 할 것 없이 서민이었던 시절의 서민이라 함은 곧 중산층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래서 서민이라는 단어는 보통사람을 의미하기에 크게 저항감이 없었다. 그 시절 오늘날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인 박수근도 서민이었다. 아니 중산층이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6·25 전쟁이 휴전협정으로 총성이 멎어갈 즈음 남한에 연고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북의 압제가 무서워 피란을 내려온 혈혈단신의 피란민에, 그것도 ‘환쟁이’가 비록 사대문 밖이라고는 해도 어엿하게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ㄷ자 ’형태의 개량한옥을 장만했으니 말이다.

살림하는 아내 김복순(1922∼1979)과 딸 둘에 아들 둘을 거느린, 가난을 숙명으로 알았던 화가는 당연히 서민이었다. 유난히 가족애는 물론 사람에 대한 애정이 깊었던 그는 1952년 6·25 전쟁통에 처자를 두고 홀로 남한으로 피란을 내려왔다. 물론 이런 일은 유독 박수근만이 겪은 일은 아니지만, 아무튼 그는 피란길에 군산까지 내려가 부두노동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았고 가족을 찾으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물론 매일 매일 붓을 놓지 않고 그림도 그렸다.

그러던 차에 이북에 남았던 아내가 어렵게 아이들을 데리고 월남에 성공했다. 그녀는 수소문 끝에 남편 박수근이 6·25 전에 월남한 오빠 김영주의 창신동 집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남편에게 바로 갈 수가 없었다. 피란길이 노량진에서 멎어있었기 때문이다. 남편을 만나려면 다시 한강을 건너야 했는데 전쟁 중이라 도강증이 없으면 강을 건너 서울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노량진 강변에 자갈 깨는 일에 나갔다가 도강증을 얻어 강을 건너 가족이 상봉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족을 만난 기쁨도 잠시, 박수근은 가족들과 먹고사는 일이 막막했다. 그리하여 일자리를 백방으로 알아보던 중 화가 이상우의 화방을 통해 작품을 몇 점 팔다가 그의 주선으로 1953년부터 미군 범죄수사대(CID)에서 그림 그리는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신세계 백화점 본점 자리에 있던 미 8군 PX에서도 일하게 돼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리며 제법 쏠쏠하게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소설 ‘나목(裸木)’은 바로 이 시절 경리로 일하던 박완서가 박수근을 모델로 쓴 것이다.

박수근은 이때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초상화를 그려 번 돈 35만 환으로 창신동에 개량한옥을 한 채 장만할 수 있었다. 이 집은 그의 주거지이자 창작의 산실이 됐다. 1963년 전농동에 자그만 2층 양옥을 마련하여 이사할 때까지 약 10년을 이곳에서 살았다. 창신동 집의 마루가 그의 아틀리에였다. 그곳에서 항상 그림을 그렸다. 집을 마련한 1953년도에 6·25 전쟁으로 중단되었던 국전(國展·대한민국 미술전람회)이 속개되면서 ‘집’이라는 작품이 특선, ‘노상에서’가 입선하였다. 이즈음부터 그의 작업은 윤곽선이 뚜렷하게 평면화되고 구획된 소재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듬해 다시 당시로서는 유일한 작가들의 활동무대였던 국전에서 ‘풍경’과 ‘절구’가 입선을 한다. 국전에서 계속 입선하며 박수근은 먹고살기 위해 나가던 미군 PX에서 초상화 그리는 일을 접고 작품에만 전념한다. 1958년 대한미협전에서 박수근은 ‘두 여인’으로 국회문공위원장상을 수상한다. 모두 창신동 집의 안방과 건넌방을 잇는 마루에서 그려진 작품들이다. 사실 오늘날 전해 오는 그의 대표적인 작품들 대부분이 창신동에서 제작된 것이다. 이 시절 그는 마루에 앉아 하모니카로 ‘뻐꾸기 왈츠’를 연주했고 아내와 4남매가 다 함께 손뼉을 치고 노래를 부르는 가난하지만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사실 조선시대에 동대문이라 불리는 흥인지문을 벗어나면 만나는 성 밖 첫 마을이 바로 종로구 창신동이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인창방과 숭신방이라는 두 개의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이곳은 원래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채석장이었다. 지금은 사라진 예전 중앙청, 즉 총독부청사와 한국은행, 서울시청 구청사 등등의 건물을 지을 때 사용된 돌도 이곳에서 구한 것이었다.

채석장이 한옥집단지구로 개발된 것은 일제강점기 건축왕 정세권에 의해서였다. 또 서울이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하자 일부 부호들이 새롭게 전원 저택을 이곳에 짓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부호 중 하나였던 백남준의 아버지 백낙승도 여기에 집을 마련했다. 창신동의 거리 풍경에 일대 변화가 오기 시작한 것은 1950∼60년대에 먹고살기 위해 상경한 이주민과 피란민이 몰려들어 판잣집과 쪽방이 들어서면서부터다. 저택과 개량한옥이, 그리고 판잣집과 쪽방이 공존하는 한국의 주거건축문화박물관 같은 곳으로 변한 것이다.

1954년 박수근이 PX 일을 걷고 본격적인 전업화가로 설 수 있었던 것은 그를 이해하고 후원해 주었던 밀러 부인(Mrs. Miller)과 마이아 핸더슨 부인(Mrs. M. Henderson) 그리고 실비아 지머맨(S. Zimmerman)과 존 릭스(John Liks) 등 주한 외국인들이 있어 가능했다. 그리고 1956년 문을 연 반도화랑을 통해 한국적 정서와 미감이 담긴 그의 작품이 외국인들에게 30달러에서 50달러 내외에 기념품처럼 팔리기 시작한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시기 작품들의 선은 다소 가늘어지고 세밀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면은 견고한 덩어리로서 존재감을 더해주면서 화면을 구성적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박수근은 창신동에서 좌절의 시기도 겪었다. 1957년 야심차게 제작해 출품한 100호짜리 ‘세 여인’이 국전에 낙선하면서 크게 낙담하여 술을 가까이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건강을 해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회도 맞게 된다. 1959년 국전 추천작가로 그리고 1962년 국전 심사위원으로 위촉되면서 무학의 잡초 같은 화가가 온갖 어려움과 멸시를 이겨내고 미술 동네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우뚝 선다.

이런 영광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빈곤했으며 그의 그림 속 사람들도 어려웠다. 그의 과음은 여전했고, 결국 신장과 간이 나빠지면서 왼쪽 눈의 백내장이 도지고 말았다. 박수근의 명성은 이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정도가 되었지만, 그는 너무 가난한 나머지 백내장 수술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차일피일 미루던 끝에 수술을 받았지만 아예 왼쪽 눈을 볼 수 없게 되었다.

당시 그의 일과는 매일 창신동 집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어쩌다 반도호텔에 문을 연 반도화랑에 그림을 내다 주는 일과 그림값을 받아 집에 돌아오는 것이 유일한 외출이었다. 그는 귀갓길이면 항상 도로변 노점상 아주머니들에게서 과일과 곡식 같은 것을 사 들고 들어왔다. 모든 행상들로부터 조금씩 조금씩 나누어 샀다. 모두에게 조금이라도 팔아주어야 한다는, 작지만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리고 기분 좋게 한잔 걸쳤다.

그런데 그의 창신동 집 앞으로 낙산에서 내려와 청계천으로 흘러드는 개천이 있었는데 종로와 청계천을 잇는 흙길이 확장되면서 집이 약 1m 헐려 나갔다. 또 도로가 생기면서 도로보다 집이 낮아져 집을 대대적으로 수리해야 했다. 그는 위대한 화가였지만, 보통사람처럼 이재에 밝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1953년 집을 살 때 서류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집을 구입한 지 10년이 지난 뒤에 땅 주인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집을 비우라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가집행철거소송을 제기했고, 재판을 통해 박수근은 지상권만 인정받았다.

그래서 그는 지상권을 처분하고 전농동에 새로 집을 지어 이사를 했다. 전농동으로 이사를 하고 나서 곧 지병인 간경화와 응혈증이 악화되어 갔지만 음주도 작품제작도 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1965년4월 초 청량리 위생병원에 입원했으나 회복의 가망이 없자 5월 5일에 퇴원하여 집으로 돌아왔고 6일 새벽 1시쯤 하느님의 부름을 받아 하늘나라로 갔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하늘나라의 아틀리에’가 경기 포천군 소흘면 동신교회 묘지에 마련된다. 그리고 2002년 10월 25일 그가 앞으로 영원히 쉴 수 있는 양구 군립 박수근미술관이 그의 고향 양구에 문을 열었다. 2004년 그의 유택도 양구 군립미술관 뒤편 양지바른 곳에 옮겨와 새롭게 자리를 잡게 됐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딴, 호젓하게 자리 잡은 미술관이 그의 영원한 아틀리에, 창작의 산실, 명작의 고향이 됐다.

글·사진 = 정준모 (미술비평가,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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