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과 도시] 능선에 녹아든 평창동 오보에힐스

이재유기자 2016. 1. 29. 17:55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북한산과 한 몸처럼.. 공간에 자연을 담다재일동포 출신 세계적 건축가 이타미 준 설계베란다 마루에 구멍 내면서까지 소나무 보존지형에 순응하면서도 완벽한 프라이버시 갖춰
오보에힐스는 완만한 S자 형태로 단지를 가로지르는 도로를 따라 분양면적 기준 454~482㎡ 크기의 집 18가구가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이다. 건물 지붕에는 금속 재질로 윤곽선을 넣었고 2층 테라스 출입구 벽면은 나무로 처리했다. 최대한 자연을 집 안으로 끌어들이려 베란다 마루(데크)에 구멍을 내면서까지 기존 녹지의 소나무를 보존했다. /사진제공=ITM유이화건축사무소 (C)Shinichi Sato
평창동의 수려한 전망이 한눈에 들어오는 거실 전면 유리창. /사진제공=ITM유이화건축사무소 (C)Shinichi Sato
거실로 이어지는 주방 내부에 주문 제작된 식탁과 조명이 놓여 있다. /사진제공=ITM유이화건축사무소 (C)Shinichi Sato
오보에힐스에는 세대마다 히노키(편백나무) 욕조가 설치돼 있다. 특히 사용자의 편의를 위해 골조 단계에서부터 욕조 바닥 부분만 낮게 시공해 턱을 낮춰놓았다. /사진제공=ITM유이화건축사무소 (C)Shinichi Sato
오보에힐스는 기본적으로 '화이트 박스'를 반복적으로 적용하지만 디테일은 지루하지 않게 살린 것이 특징이다. /송은석기자
이타미 준이 그린 오보에힐스 스케치

"나는 풍토·경치·지역의 문맥 속에서 어떻게 본질을 뽑아내 건축에 스며들게 할지를 생각한다. 조형은 자연과 대립하면서도 조화를 추구해야 하고, 공간과 사람·자신과 타인을 잇는 소통과 관계의 촉매제여야 한다(책 '손의 흔적:돌과 바람의 조형, 이타미 준' 중에서)." 지난 2001년 제주 포도호텔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재일교포 출신 한국 건축가 고(故) 이타미 준(한국 이름 유동룡·1937~2011·사진). 그는 돌과 흙·나무·쇠 같은 자연 소재와 색·빛을 기초로 한 건축작품으로 '현대 미술과 건축을 아우르는 작가'로 평가받는다. 그 자체로 조형예술인 제주도 '수풍석(水風石)미술관' 같은 작품이 있는가 하면, 말년에는 '용인 아펠바움'이나 '평창동 오보에힐스' 같은 고급 타운하우스 설계에도 적극적이었다. 그중 이타미 준이 작고하기 전해인 2010년 완성된 '평창동 오보에힐스'는 주변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마치 도시와 한 몸처럼 자리 잡은 주거단지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가파른 산세에 순응하는 하얀상자 형태의 중첩

보통 서울의 부촌 하면 전통적으로는 한남동·동부이촌동·평창동, 신흥 부촌으로는 방배동·청담동 정도를 떠올린다. 강가에 집중된 다른 부촌과 달리 평창동은 가파른 능선에 걸쳐 있다. 그것도 소위 악산, 나무보다 바위가 두드러지고 경사도 가팔라 강한 기운을 뿜는 곳이다. 북악스카이웨이를 따라 반대편 산 정상에 있는 팔각정에서 보면 과연 그렇다. 광화문에서 자하문터널과 상명대를 거쳐 세검정로가 끝나는 삼거리를 지나면 평창동이 시작된다. 다시 평창문화로 큰길에서 300m 남짓 들어가면 경사가 급해지면서 오보에힐스 단지가 시작된다. 뱀처럼 미끄러지듯 완만한 S자를 그리며 가파르게 오르는 도로를 따라 네 개의 모둠, 분양면적 기준 454~482㎡ 크기의 집 18가구가 드러난다. 가구당 최대 189㎡의 마당과 90㎡의 테라스, 엘리베이터와 4~5대 규모의 전용 주차장을 갖춘 이곳은 당시 30억~46억원에 분양됐다.

멀리서는 몰랐지만 걸어 올라가며 들여다보이는 오보에힐스는 주변과 뚜렷하게 차이 나는 '화이트 큐브' 형태다. 유달리 주변 환경과의 조화를 강조하는 세계적인 건축가 이타미 준의 작품으로는 뜻밖이랄까. 하지만 맨 윗동에서 내려다보니 조금 이해가 간다. 영하의 한파에도 지붕 위 잔디(세덤)가 누릇누릇 풀빛을 내고 능선을 그대로 반영한 지붕 선이 드러난 덕분이다. 이타미 준과 함께 기본설계를 진행한 딸 유이화 ITM유이화건축사무소 대표는 처음 건축예정지를 봤던 난감함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수차례 아버지와 함께 평창동을 다녀오고서야 겨우 기본 콘셉트를 정했어요. 동네 전체의 조화를 생각해 가파른 절벽 같은 지형에 순응하는 박스 형태였죠. 심플하고 모던하게, 그리고 튀는 건축물이 들어선다는 느낌이 없도록 최대한 시끄럽지 않게. 지붕은 녹화시켜 윗집에서 내려다보면 내 정원처럼 보이게 하기로 했죠. 능선이면서도 녹지가 보이지 않는 동네에 녹색을 심는다는 느낌으로."

단순하지만 지루하게 않게… 오보에힐스만의 디테일

건축 의도답게 전체 건물 윤곽은 단순하게 가지만 디테일은 지루하지 않게 살렸다. 외부 벽면을 덮은 라임스톤(석회암)은 드물지 않은 소재지만 사이사이를 실리콘이 아닌 줄눈 '오픈 조인트 방식'으로 처리했다. 이 경우 석재 이음매가 다 드러나는 만큼 정밀한 가공이 필요해 시공비가 올라가지만 통풍이 원활해 습기나 결로가 현저하게 줄어든다.

시공사인 쌍용건설의 한 관계자는 "일반적으로 건축물 마감재 시공 때 내외부 할 것 없이 비용이 저렴한 실리콘(코킹) 마감을 선호한다"며 "이를 쓰지 않으려면 최대한 정밀하게 자재를 가공, 시공하는데 그럼에도 품질이 안 나와 외벽이든 내부 인테리어든 재시공하는 경우가 다른 곳보다 훨씬 많았다"고 말했다. 건물 지붕에는 금속 재질로 윤곽선을 넣었고 2층 테라스 출입구 벽면은 나무로 처리했다. 최대한 자연을 집 안으로 끌어들이려 베란다 마루(데크)에 구邦?내면서까지 기존 녹지의 소나무를 보존했다.

특히 고심했던 것은 주택과 길을 가르는 담의 디자인.

인근 빌라처럼 4~5m의 성벽 같은 담이 아니라 길을 지나는 주민들이 조금이라도 골목을 걷는 정취를 느낄 수 있게 설계됐다. 집이 앉혀진 평면과 수평으로 이어지지만 가파른 길을 지나며 슬쩍슬쩍 올려다보이는 담이 됐다. 유 대표는 "단지 주민보다는 동네 사람을 위해 온기를 느낄 수 있는 담'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평창동과의 조화… 눈에 띄지 않는 화려함과 차별화

건축주·시공자 모두 건물에 대한 욕심은 비슷하다. 그 동네에서 가장 눈에 띄고 멋있으면서 건축적으로 유의미한 '랜드마크'를 원하는 건 마찬가지다. 기왕 '최고급 타운하우스'라는 간판을 걸 마음이었다면 오보에힐스도 설계와 시공 기간 내내 그런 유혹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고급 주택지로는 드문 지형 조건에 개성이 강한 사람들이 가득한 이곳 평창동에서 오보에힐스는 무난한 이웃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가 제주도에서 설계한 고급 주택인 '비오토피아'에서도 보여줬던 화이트 박스를 다시 한 번 차용했지만 건물은 산세에 맞춰 바짝 낮췄다. 최대한 튀지 않는 건물 외벽과 이웃의 걷는 길을 배려한 담 디자인, 녹지와 지형을 최대한 살려 집 안으로 끌어들인 덕분이다. 대신 내밀한 개인 공간에서는 한껏 욕심을 부렸다. 고급 타운하우스답게 자재와 마감을 차별화하고 전반적인 건물 평면과 밀도, 심지어는 창 방향과 크기까지 설계와 인테리어 부서가 끊임없이 도면을 수정하면서 진행됐다.

특히 테이블과 벽지, 문고리, 주방·거실 전등은 한정 수량만 주문 제작해 오보에힐스에서만 볼 수 있다. 침실 벽면은 전주에서 공수한 한지 소재의 섬유를 나주 천연염색 공장에서 쑥으로 염색한 벽지로 마감한 것이 그 한 예다. 대나무 형상의 문고리, 테이블 다리도 직접 공장에 주문해 소량 제작한 자재다.

"설계 이전에 땅의 컨텍스트 읽으려 노력하셨죠"


건축가 딸이 말하는 이타미 준


"아버지의 작품은 오브제 같은 조형성이 워낙 강해 형태에만 집착하는 '조형가'라는 평가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형태 이전에 '컨텍스트(맥락)'를 읽으려고 노력했죠. 어떤 건축물을 지으려면 그 건축물 자체가 대지에 뿌리를 내려야 하고, 그 환경의 영양분을 받고 자랄 수 있는 에너지를 가져야 한다고 늘 말했습니다. 그 땅을 읽고 환경을 알아야, 그 땅이 가진 맥락을 알아야 비로소 설계할 수 있다고 했죠. 그 맥락에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건축물에 넣는 것이고 그다음이 형태라고요."

서울 방배동에서 ITM유이화건축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는 유이화(사진) 대표는 아버지 이타미 준의 작품을 볼 때 그런 탐색과 고민의 과정을 함께 봐달라고 주문했다. 아버지의 대표작 중 하나인 제주 포도호텔이 한창 건설 중이던 지난 2001년부터 10여년간 설계작업을 함께한 그다.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넘어간 부모 아래에서 태어난 이타미 준은 대학을 졸업하고 건축사사무소를 차린 1968년 즈음부터 한국을 드나들며 한국 민화와 고건축에 빠졌다. 전국을 답사하는 여행 끝에 1981년 '이조의 건축' 등 세 권의 책을 연달아 펴내며 일본에 한국 고건축을 알렸다.

또 1988년에는 방배동의 아틀리에 '각인의 탑'을 설계하며 한국 건축계의 관심을 받았고 1998년 제주도 핀크스 클럽하우스에 이어 2001년 포도호텔을 선보이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를 계기로 프랑스 국립미술관인 기메박물관에서 건축가로서는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고 2005년에는 프랑스 문화예술훈장인 슈발리에훈장을 받았다. 2006년과 2010년에는 각각 한국과 일본의 대표적 건축상인 '김수근상'과 '무라노 도고상'도 받았다. 수풍석(水風石)미술관·두손미술관·방주교회가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는 서원 골프클럽하우스를 사실상 유작으로 2011년 별세했다. 이렇듯 한국과 일본, 또 해외에서 두루 인정받은 이타미 준이지만 유 대표는 한국 건축계에 서운한 감정을 느낀다. 1988년 이래 한국을 중심으로 활동해왔음에도 '일본 건축가' 취급을 받기 때문이다. "10여년 전 프랑스 훈장을 받을 적에도 후배들을 위해 받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수상소감을 말할 정도로 한국에 대한 애정이 깊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누구 하나 추모하는 움직임이 없다는 게 실망스럽습니다."

이재유기자 0301@sed.co.kr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