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년 전 오늘.. 굴욕적 한·일 정상화 추진에 시민들 분노하다

박성대 기자 2016. 6. 3. 0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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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오늘] 한일 협정 반대 시위 '6·3 항쟁'

[머니투데이 박성대 기자] [[역사 속 오늘] 한일 협정 반대 시위 '6·3 항쟁' ]

1964년 6.3항쟁 당시 한일협상 반대와 한일국교정상화회담 반대 시위를 벌이는 대학생들 모습./사진=뉴스1

1962년 10월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도쿄에서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일본 외상을 만나 양국 국교정상화에 대한 비밀논의를 갖는다.

이들은 이른바 '김-오히라' 메모에 합의하고 일본이 한국에게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상업차관 1억달러 이상'의 지원을 할 것을 약속한다.

1964년 초부터 박정희 정권은 그동안 비밀리 추진하던 한·일 교섭을 서둘러 진행하기 시작한다. 그 해 2월 정부와 여당은 3월 내로 대일(對日) 교섭의 기본 방침을 밀고 나가겠다는 결정을 발표한다.

당시 정부는 일본의 경제협력을 통한 군사정권의 경제적 기반확충과 미국의 압력 등으로 인한 대일관계 정상화가 시급한 탓에 협상에 저자세로 임했다. 이에 대학생들이 '밀실에서 이뤄지는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를 외치며 거리로 나서기 시작한다.

사회 각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대일협상은 계속됐고, 급기야 52년 전 오늘(1964년 6월 3일) 일반시민들까지 시위에 대거 가세하며 6·3 항쟁이 시작된다. 거리로 향한 3만여명 시민과 대학생들은 한일회담 반대와 함께 "박정희 군사정권 퇴진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점차 시위가 거세지자 정부는 이날 밤 서울시 전역에 대해 계엄령을 선포한다. 4개 사단병력을 투입하며 시위에 초강경 대응으로 맞선 것. 정부는 시위 주동자 검거에 돌입했고, 주동인물과 배후세력으로 지목된 학생·정치인·언론인 등 1120명을 검거한다.

이들 가운데 김덕룡, 손학규, 이명박, 이재오 등 348명은 내란 및 소요죄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하게 된다. 시위 진압 후에도 계엄령은 선포 한 달이 넘게 이어져 7월 28일에야 해제되고, 결국 박정희 정권은 이듬해인 1965년 한일협정에 서명한다.

이렇게 체결된 한일협정으로 전시 중 개인피해의 청구권이 소멸되게 된다. 경제적 실리에 급급한 나머지 역사부채 청산의 기회를 희생시킨 원인이 된 것. 특히 협정체결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보상 문제와 일본군 위안부, 독도 문제 등 여전히 풀리지 않는 외교적 갈등의 출발점으로 지목된다.

비록 6·3 항쟁은 정부에 의해 진압돼 좌절됐지만, 4·19 정신을 계승하면서 1969년 3선 개헌 반대운동과 1973년 유신체제 반대운동으로 이어지는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박성대 기자 spark@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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