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갑질 고객' 대응 매뉴얼까지 필요한 사회

최우철 기자 2016. 4. 22.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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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 앞에 ‘갑질’이란 단어가 붙기 시작한 건 2015년이다. 그해 10월 인천의 한 백화점 귀금속 매장에 모녀가 나타났는데, 두 직원을 무릎 꿇리고 오랫동안 고성을 저지른 사건이 알려지면서다. 녹슨 목걸이와 팔찌를 수리해주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과거엔 이런 고객을 ‘진상 손님’이라 불렀다. ‘진상’ 사건들엔 공통점이 있었다. ‘진상 손님’들이 하나같이 소비자로서, 고객으로서의 권리를 내세우며 ‘갑’행세를 했다는 점이다. ‘갑질 고객’은 이런 속성을 잘 꼬집은 신조어다. 그래서 수십년 된 ‘진상 손님’이란 단어를 대체하게 됐다.

4월 9일, 인천공항에서 필리핀 마닐라로 이륙하려던 비행기에도 ‘갑질 고객’ 한 명이 타고 있었다. 운 나쁘게도 승무원 한명이 짐을 올리다가 그의 머리를 쳤던 모양이다.

갑질 고객은 권리에 밝다. 문제는 그 권리의 범위를 늘 자의적으로 해석한다는 사실 뿐. 그는 사무장을 불러서 “똑같이 때리고 싶다”고 말했다. 해당 승무원의 사과를 받았는데도 분이 풀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사무장은 차라리 자신을 때리라는 말을 했다가 머리를 맞아 피부가 찢어졌다.

작년 가을과 며칠 전, 두 가지 갑질 사례는 손님과의 대면이 잦은 유통업계에선 전형적인 갑질 행태로 통한다. ‘갑질 고객’은 스스로 만든 고객으로서의 권리를 앞에 있는 노동자가 무시한다고 생각할 때 떼를 쓰거나 폭력을 행사한다. 피해가 워낙 빈발하다보니, 한 유통업체는 아예 대응 매뉴얼을 내놨다. 이달 초 롯데그룹은 직원들을 위해 갑질 사례와 대응책을 담은 ‘마음 다치지 않게’라는 매뉴얼 1만 권을 사내에 배포했다.

언급된 내용을 보면, 권리 의식이 과도한 갑질 사례와 여성 감정노동자를 성희롱하거나 추행하는 범죄 사례가 포함됐다. 최악의 경우는 할인상품을 설명하는 여직원에게 아가씨도 세일하냐고 묻거나, 심지어 볼에 뽀뽀를 요구한 경우였다. 매뉴얼엔 성희롱과 언어폭력엔 응대 중단 등으로 단호하게 대처하는 것은 물론, 안전 요원이나 경찰까지 부르라고 돼 있다.

피해자는 늘 생길 수밖에 없다. 감정노동자는 늘 일정한 수준의 친절을 요구받는 반면, ‘갑질 고객’은 머릿속 고객권리 헌장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뉴얼은 매뉴얼일 뿐이다. 매뉴얼 발간을 기획한 정세진 롯데인재개발원 과장은 “무리한 요구를 받는 상황을 겪었을 때 우선은 스스로 '마인드컨트롤'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회사가 그 고충에 공감한다는 메시지를 담으려고 노력했다”라고 말했다.

내 탓이 아닌 걸 내 탓으로 삭혀야 할 때, 인간의 마음엔 병이 든다.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것은 고객의 심리적 문제일 뿐, 나의 잘못이 아니라는 게 매뉴얼의 핵심 메시지다. 그래서 책자엔 ‘네 탓’이 아니니까 상처입지 말라는 조언이 많다. 제목도 ‘마음 다치지 않게’인데는 이런 이유가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 대체 얼마나 많은 감정노동자가 ‘갑질 고객’을 상대하고 있을까. 안전보건공단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 4월 20일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감정노동 근로자의 감정노동실태, 위험요인, 건강영향 연구'), 조사 대상 3명 가운데 1명은 성적 또는 정신적 폭력을 당하고 있다고 조사됐다.

고객 대면 수준이 높은 직종은 50개, 종사자는 1천198만 명이다. 이 가운데 35.1%인 419만 명이 고객이 행사한 정신적·성적 폭력에 유의미한 수준 이상으로 노출돼 있다고 한다. 대면 수준이 낮아 조사되지 않은 직종을 감안하면 폭력에 시달리는 노동자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거라고 보고서는 분석했다.

폭력에 가장 많이 노출된 직종은 자동차 운전 직종 종사자로 68만 명이 넘었다. 판매원과 상품대여원이 56만여 명, 영업원과 상품중개인이 35만여 명, 식당 서비스 관련 종사자가 28만여 명으로 뒤를 이었다.

사업장 규모가 클수록, 비정규직일수록, 현재의 직장 근무기간이 길수록 폭력을 많이 경험하는 경향이 있었다. 폭력수준이 높을수록 고혈압이나 이상지질혈증, 당뇨병, 비만, 위염, 소화불량, 우울?불면증 진단을 받는 비율이 높다는 결과도 포함돼 있다.

지난해 11월, 정부가 이 문제에 대책이 있다고 발표한 적이 있다. 고객의 폭언으로 우울증이 생기면 산업재해로 인정해 주겠다는 것이였다. 산재로 인정될 땐 치료비를 지원받을 수 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만 산재로 인정을 해 주던 법을, 우울증과 적응장애까지 확대해 치료비나 요양비를 지원해 준다는 것이다.

정부가 손질한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령 개정안엔 고객의 괴롭힘 때문에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 사업주가 그 노동자에게 휴식시간을 늘려주거나 업무를 바꿔주라는 내용도 들어있다. 감정노동자의 법적인 개념도 확장해 직접 대면은 물론 텔레마케터 등 전화 업무로 직접 고객을 응대하는 서비스 노동자가 모두 이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게 했다.

하지만, 감정노동자 보호를 위한 법안 6건은 모두 국회에 계류 중이다. 5월 말, 19대 국회 종료와 함께 폐기될 운명이다. 법적인 보강책 없이, 캠페인과 사내 매뉴얼만으로 감정노동자를 보호하기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최우철 기자justrue1@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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