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세의 발레리노가 오늘도 무대에 서는 이유
‘영원한 현역, 최고령 발레리노'라 불리는 이원국 발레리노의 이력은 화려합니다. 유니버설발레단 수석 무용수, 러시아 키로프발레단 주역 무용수, 루마니아 국립발레단 수석 무용수, 국립발레단 수석 단원을 거쳤습니다. 최근 그에게 또 다른 수식어가 붙었습니다. 암투병을 딛고 무대에 선 최고령 발레리노! 식도암 수술 뒤 설 수 있게 된 후부터 매일 '탕뒤'를 하며 무대를 생각했다는 이원국 발레리노의 인터뷰! ‘정책주간지 K-공감’에서 확인하세요.
이쇼라스! 한 번 더!
57세의 발레리노가 오늘도 무대에 서는 이유
암투병 딛고 돌아온 최고령 현역 발레리노 이원국
비 온 뒤 하늘에만 무지개가 걸리는 게 아닙니다. 무용수의 땀방울이 조명을 통과하는 찰나 무대에도 무지개가 뜹니다. 57세의 현역 발레리노 이원국 씨는 지금껏 이 무지개를 좇아왔습니다.
10대의 그는 가출청소년이었습니다. 학교는 그를 문제아라고 낙인찍었고 학교 밖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일용직 노동, 음식 배달, 호객 아르바이트였습니다. 고향 부산을 떠난 그의 마지막 발걸음은 서울 난지도였습니다. 쓰레기를 분류하는 일을 하다가 문득 하늘의 노을을 봤습니다. ‘나는 왜 태어난 걸까….’ 답을 찾을 수 없었던 소년 이원국은 결국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머니는 말없이 아들을 맞아줬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발레를 권했습니다. 피아노, 수영, 축구, 보디빌딩, 서예 등 모두 작심삼일로 끝났는데 발레는 달랐습니다. 대부분 5~6세에 입문하는 발레를 그는 18세에 시작했습니다. 늦은 만큼 간절했습니다. 하루 6시간 이상 연습했고 발꿈치를 수직으로 들어올려 발끝으로 서는 ‘를루베’ 동작을 매일 1000번씩 했습니다. 회전력을 키우기 위해 양쪽 다리에 2㎏의 모래주머니를 차고 점프를 연습했고 계단을 오를 때나 잠을 잘 때도 모래주머니를 빼지 않았습니다.
10년에 할 연습을 1년에 몰아서 한 덕분에 이 씨는 발레를 시작한 이듬해 부산 KBS 무용콩쿠르에서 은상을 받았고 1988년 중앙대 무용학과에 입학했습니다. 1989년 동아무용콩쿠르에서 대상을 받았습니다. 이후 유니버설발레단 수석 무용수, 러시아 키로프발레단 주역 무용수, 루마니아 국립발레단 수석 무용수, 국립발레단 수석 단원을 거쳤습니다. 그의 기록은 대부분 ‘최초’였고 그의 동작은 ‘한국 발레리노의 교과서’가 됐습니다. 이후 이 씨는 “변방에 머물렀던 한국 발레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영원한 현역, 최고령 발레리노’라는 그의 수식어 앞에 최근 또 다른 수식어가 붙었습니다. ‘암투병을 딛고 무대에 선 최고령 발레리노.’ 54세이던 2021년 식도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2년의 항암치료 후 그는 다시 무대에 섰습니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지만 동작은 그대로, 무수한 땀방울과 흩어지는 무지개도 그대로였습니다. 병실에서도 호스를 달고 탕뒤(발을 쭉 뻗어 중심을 유지하는 발레동작)를 하던 그였습니다. 그는 오히려 더 바빠졌습니다. 국립발레단 강의를 하면서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전남 목포시를 오갑니다. 광명문화재단, 용인문화재단 등 지역문화단체와 공연도 올립니다. 무엇이 그를 여전히 무대에 서게 하는 걸까요. 3월과 5월 용인 시민과 함께하는 공연 ‘쉘 위 발레’를 준비하고 있는 그를 서울 서초구 국립발레단 연습실에서 만났습니다.
Q. 지금은 완전히 컨디션을 회복한 건가?
체력적인 면에서는 100% 회복했다고 볼 순 없습니다. 대신 기술과 노하우가 늘었습니다. 지금도 매일 연습합니다. 연습량은 어디 가지 않습니다. 치료를 받을 때 병실에 누워서 생각하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발레밖에 없었습니다. 발레 할 순간을 생각하면서 치료도 견뎠습니다. 식도암 수술 뒤에는 먹는 것도 걷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설 수 있게 된 후부터는 매일 탕뒤를 했습니다. 아내는 호스를 여러 개 달고 연습하는 걸 보면서 눈물을 흘렸지만 나는 빨리 무대에 서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했습니다. 덕분에 호전돼서 퇴원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Q. 열여덟에 발레를 시작해 올해로 39년 차다.
지금도 발레를 생각하면 가슴이 뜁니다. 아직 나의 예술은 완성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완성을 향해 가고 싶은 열망이 열정을 만듭니다. 나는 남들보다 늦게 발레를 시작했습니다. 몸이 다 굳은 뒤였습니다. 발레 할 수 있는 몸을 만들기 위해 더 많이 노력해야 했습니다. 근육이 찢어지고 스트레칭을 하다가 운 적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행복했습니다. 처음으로 하고 싶은 걸 찾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남들보다 오래 할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Q. 중앙대 무용학과 88학번으로 입학한 뒤 다음 해 동아무용콩쿠르에서 대상을 받았다. 신문 1면에 났을 정도로 당시엔 화제였다고?
대학 2학년 재학생이 큰 상을 받고 신문 1면에 기사가 나자 도대체 누구냐고 총장님이 찾아오셨습니다(웃음). 덕분에 전액 장학금을 받으면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꿈꾸던 미국 뉴욕 발레 연수도 갔습니다. 유니버설발레단에 있을 때는 매일 자정까지 연습실에 남아 연습했습니다. 당시 문훈숙 단장님과 함께 러시아 키로프(현 마린스키)발레단 객원 주역으로 갔던 게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
Q. 러시아 마린스키발레단 최초로 동양인이 무대에 올랐다고 하던데.
1995년 6월 5일입니다. 날짜도 기억합니다. 당시 무대의 모습, 공기마저 생생합니다. 발레를 시작한 지 10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내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구나 느꼈던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마린스키발레단은 1738년 문을 연 러시아 황실발레단의 후신입니다. 러시아 황실에서 운영하던 발레단과 극장은 러시아 문화의 정수를 담습니다. 12명의 소년과 12명의 소녀로 시작한 이 발레단은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발레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고 유명한 무용가들을 배출했습니다. 소수정예로 교육받은 러시아 무용수 중에도 극히 일부만 마린스키발레단으로 선발되기 때문에 동양인 발레리노가 무대에 선 건 이 씨가 최초였습니다.
Q. 마린스키 대표 무용수가 된 김기민 발레리노가 제자라고 들었다. 이원국발레단 출신 김유진 발레리나는 모스크바 국제발레콩쿠르 3위에 오르기도 했다.
김기민 발레리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발레를 그만둘지 말지 기로에 있을 때 나를 찾아왔습니다. 발레 하는 걸 보니 자질이 충분했습니다. “발레를 계속하면 좋겠다. 대성할 수 있다”고 부모님을 설득했습니다. 러시아는 클래식 발레가 태어난 곳인데 그곳에서 한국인이 정상에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고 무용수로서 부럽기도 했습니다. 김유진 발레리나는 이원국발레단의 최연소 단원이었습니다. 만 14세에 지젤로 데뷔했습니다. 이런 후배들에게 오히려 내가 많이 배웁니다. 스승으로 기억해주면 고마울 뿐입니다. 사실 제자들 중에는 활동하다 은퇴한 경우도 있고 안타깝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더 마음에 남습니다. 제자들에게 힘들 때 꼭 찾아오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힘들 때 얼굴 보면서 살자. 같이 얘기하고 발레하자”고.
Q. 이원국발레단을 열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2004년에 만들었습니다. 발레를 대중화하고 발레의 저변을 확대하고 싶었습니다. 연간 150회 이상 공연을 목표로 했습니다. 관객 두 명 앞에서 공연한 적도 있습니다. 서울 종로구 대학로의 웬만한 소극장이 문을 닫는 월요일에 극장을 대관해 ‘월요발레’를 했습니다. 발레를 더 많은 사람이 알고 즐기기를 바랐습니다. 소극장 상설발레공연으로 ‘이원국의 발레이야기’와 ‘사랑의 세레나데’를 4년 넘게 매주 월요일 단 한 주도 거르지 않고 진행했습니다. 불우이웃을 위한 자선공연이나 장애인을 찾아가는 공연, 청소년을 위한 해설발레도 진행했습니다. 2019년 이후 코로나19로 공연을 이어갈 수 없게 되고 식도암이 발병하면서 발레단은 휴지기에 들어갔습니다. 지금도 아쉬운 마음입니다.
Q. 당시 발레아카데미도 함께 운영했는데?
러시아 등 다른 나라를 보면 전체적으로 발레 수준이 높습니다. 우리는 몇몇의 기량이 훌륭한 무용수가 세계적인 무대에 서고 있지만 평균적인 기량은 그렇지 못합니다. 발레전문 교육기관이 드물고 대학의 전공발레 중심이어서입니다. ‘발레의 대중화’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어릴 적부터 체계적으로 교육받는 기관이 있어야 합니다. 클래식 발레는 1㎜의 오차도 없어야 안정된 자세를 취할 수 있습니다. 기본기가 중요한 장르 중 하나가 발레입니다.
Q. 최고령 발레리노로 무대에 설 수 있었던 비결은 뭔가?
글쎄요…. 최고령을 노린 건 아닌데 언제부턴가 그렇게 불리더라고요(웃음). 그저 ‘어제도 발레를 했으니 오늘도 할 수 있겠지’라고 생각하며 하루하루 온 것 같습니다. 발레는 매일 새롭습니다. 하루라도 연습을 하지 않으면 그 전날 했던 걸 할 수 없습니다. 30년 전 스승의 가르침을 이제야 제대로 깨닫는 것도 있습니다. 어제 부족했던 걸 오늘 하게 되는 것만큼 기쁜 일은 없습니다. 나에게는 발레가 예술이기도 하지만 수련이기도 합니다. 나는 제대로 발레교육을 받지 못하고 발레리노가 됐기 때문에 늘 배움에 목마름이 있습니다.
Q. 환갑에도 무대에 선 이원국 발레리노를 볼 수 있겠다.
예전에는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했는데 벌써 57세가 됐습니다. 지금처럼 지내다 보면 60세에도 연습을 하고 무대에 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때 어떤 작품을 하게 될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환갑이라고 특별할 것 없는, 늘 해오던 무대를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쇼라스! 러시아어로 ‘한 번 더!’라는 뜻입니다. 그가 연습할 때 가장 많이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더는 못할 것 같을 때 ‘한 번 더!’, 그만하고 싶을 때 ‘한 번 더!’를 외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1967년생 발레리노는 지금도 무대를 보면 설렙니다. 60세의 무대를 준비하는 그에게 종착점은 없습니다. 그는 계속 꿈꿉니다. 더 많은 아이가 제대로 된 발레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기를, 아주 나이가 들어서도 발레 무대에 설 수 있기를. 발꿈치를 든 그의 모든 걸음은 그 꿈을 향한 ‘이쇼라스’입니다.
지역에서도 발레 배우고 발레 볼 수 있도록
문화체육관광부는 2023년 12월 ‘최고의 예술, 모두의 문화’를 위한 ‘문화예술 3대 혁신전략, 10대 핵심과제’를 발표했습니다. 윤석열정부 국정과제인 ‘예술인 지원체계 확립’, ‘보편적 문화복지 실현’을 위한 구상이 담겼습니다. 3대 혁신전략은 ▲예술인 지원의 혁신 ▲국민의 문화향유 환경 혁신 ▲문화예술 정책구조의 혁신입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발레단·오케스트라 등 다양한 장르의 ‘지역 대표 예술단체 육성’을 새롭게 추진하기로 했습니다. 운영비용이 많이 드는 발레단, 오페라단, 오케스트라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단체를 설립·운영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방침입니다. 구체적으로 문화예술 기반이 열악한 기초·광역자치단체를 대상으로 10개 내외를 선정, 1개당 국비 기준 최대 연 20억 원 규모로 지원합니다. 지역예술계의 자생력을 높이고 시즌·프로젝트별 단원을 자유롭게 채용하도록 해 청년 예술인에게 더 많은 기회가 돌아갈 수 있게 합니다.
2024년부터는 서울에 가지 않고도 광역도시에서 정상급의 초대형 공연을 관람할 기회도 늘어납니다. 400억 원 규모의 ‘문화예술 전국 유통 지원사업’으로 인구 감소지역 등 문화 취약지역에는 1000만~6000만 원, 중소도시에는 2억~5억 원 중형 규모의 공연·전시를 지원하고 광역도시 대표 거점 공연장에서는 국립예술단체의 10억 원 규모 공연 유통을 지원해 사각지대 없이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