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경대사를 왜인 후손이라 보는 건 '자의적 비문 곡해'

2021년부터 진경대사 심희가 왜인의 후손이라는 설이 퍼져나가고 있다. 그 발단은 <경남매일>에 실린 가야불교연구소장 승려 도명이 기고한 글이 아닐까 한다. 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는 보물로 지정된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고, 진경대사는 구산선문 중 하나인 창원 봉림사를 창건하신 분이다.

이 비문의 내용 일부를, 도명은 대단히 자의적으로 "그 선조는 임나왕족인 '초발성지(草拔聖枝)'인데, 매번 주변국 병사들에게 괴로움을 받다가, 우리나라의 먼 조상 흥무대왕(興武大王)에게 투항하였다"라고 번역했다. 심지어 이런 취지로 '진경대사탑비의 새로운 해석'이라는 논문을 <역사와 융합>(2024)에 발표하기도 했다. 이러한 주장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우선 비문이 사택지적비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사륙병려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문제가 된 부분은 다음과 같은 4·6의 원리를 유지하고 있다.

其先任那王族 草拔聖枝 每苦隣兵 投於我國(6-4-4-4) 遠祖興武大王 鼇山稟氣 鰈水騰精(6-4-4) 握文府而出自相庭 携武略而高扶王室(4-4-4-4)

그런데 도명은 "(초발성지가) 매번 이웃 나라 병사에게 고통을 겪다가 우리나라 원조 흥무대왕에게 투항하였다"고 번역하면서 10-4-10으로 끊어 읽었다. 비석이 세워지는 시기에 흥무대왕 김유신을 신라의 원조, 즉 먼 조상이라고 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김유신이 진경대사와 관련이 없다면, 왜 김유신의 공적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하였을까? 상식적으로도 김유신이 진경대사의 원조이기 때문에 그 공적을 설명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 창원 봉림사지에 있던 것을 1919년 경복궁으로 옮겼으며, 현재 보물로 지정돼 있다. /국가유산포털

한편, 진경대사의 조상이 임나의 왕족인 초발성지라고 주장했다. 초발(草拔)은 '쿠사나기'라는 일본의 성이고 성지(聖枝)는 '쇼오에'라는 일본 이름이라고 주장했다. 풀을 벤다는 뜻인 '쿠사나기(草薙)'의 한자는 풀깎을 치(薙)를 쓴다. 우선 초발이라는 성은 일본 측 자료에서 단 한 번도 등장한 적이 없다. 성지라는 이름은 현재도 있지만, 키요에·사토에·마사에 등 모두 여성의 이름으로만 쓰인다. 결국 왜인이 건너와 신라의 새로운 김 씨가 됐다는 주장이므로, 진경대사도 왜인의 후손이라고 했으니 새로운 일선동조론이다. 초발성지를 시조로 하는 신김 씨의 후손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초발에 대해서는 동국대 최연식 교수가 2021년에 '수로(首露)'의 다른 표기일 가능성을 지적한 바 있다. 초(草)는 풀만 아니라 처음 '初(초)'라는 뜻도 있다. 초고(草稿) 초창기(草創期)는 모두 처음이라는 뜻이다. 처음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는 수(首)와 통한다. 수석(首席) 수상(首相)이 그런 뜻이다. 발(拔)은 '뽑다'가 기본 뜻이지만 '특출하다, 두드러지다'라는 뜻도 있다. 해발(海拔)은 바다에서 솟아나있다는 뜻이다. 출(出)은 로(露)와 통하고 노출(露出)이라는 어휘도 존재한다. 또한 풀을 뽑는다는 뜻이려면 벌초(伐草)처럼 발초(拔草)로 쓰는 게 한문의 어순으로 옳다.

최연식 교수는 금관가야 시조의 이름에 대해 초발(草拔)이 수로(首露)라는 표기보다 앞서는 것으로 보았다. 진경대사탑비가 <삼국사기>보다 200년이나 앞서는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초발성지는 왜인의 이름이 아니라, '임나의 왕족이자, 처음으로 나타난 자(首露·草拔)의 성스러운 후예'가 된다. 이 부분을 임나의 왕족인 초발성지라고만 해석할 이유가 없다. 역시 수로의 후손인 김유신은 진경대사에게는 200년 전의 먼 조상인 셈이다.

2023년 6월 창원시 성산구 반림동 봉림사지 일대에서 발굴 현장설명회가 열리고 있다. /경남연구원

또 김유신의 탄생은 서기 595년이고 금관가야는 이미 63년 전인 532년에 멸망하고 없었다. <일본서기>에서도 임나가 561년에 모두 멸망했다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미 멸망한 임나 왕족이 김유신에게 항복할 필요가 있는가? 이미 멸망한 나라가 이웃 나라의 병사들에게 고통을 겪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결국 도명이 <일본서기>의 임나를 일본열도의 임나로 보려고 하는 관점은 사료 해석의 일관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한편 진경대사가 창원에 봉림사를 창건할 때 현지의 세력가인 김율희의 도움을 받았다. 그의 조력이 있었기 때문에 봉림산문을 세울 수 있었는데, 진경대사가 김해와 진례에 인접한 창원을 찾아갔고, 마침 그를 도운 사람이 김해 일대를 장악했던 김 씨였던 것은 우연일까?

또한 당시 신라에서 왜인의 후손이라고 떳떳하게 밝힐 수 있는 상황이었을지도 생각해 봐야 한다. 문무왕이 동해의 용왕이 돼 왜의 침입을 막겠다고 할 정도로, 신라 통일기에 신라와 왜의 관계는 적대적이었다. 8세기에도 신라와 일본의 대립이 격화됐다. 신라가 일본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관문성을 쌓았고(722년), 일본은 신라를 정벌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배 500척을 건조했다(759년). 그리고 신라와 일본의 사신 왕래는 799년에 완전히 단절됐다. 이러한 양국 관계 속에서 왜인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과연 가능했을지, 또한 진경대사 이력에 도움이 됐을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진경대사는 왜인의 후손이라고 하면서, 정작 임나는 대마도나 일본열도에 있었을 거란다. 4세기부터 7세기까지 최소한 400년 동안 존재한 임나가 일본열도에 있었다고 한다면 최소한 어디에 있었는지는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대마도에는 3세기에 이미 대마국(對馬國)이라는 나라가 있었다고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나오고 이때 이미 일본어를 쓰고 있었다. 대마도는 95%가 산지이고 지금도 인구가 3만 명 정도로 거의 불모지에 가깝다.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진경대사탑. /국가유산포털

가지만 붙잡고 있지 말고, 나무와 숲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을 보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처럼 임나가 일본열도에 있었다고 주장하려다 보니, 수로의 후손이자 김유신의 후손인 진경대사는 물론이고 설총·최치원과 더불어 신라의 3대 문장가로 꼽히는 강수도 왜인의 후손으로 만들어버리는 충격적인 상황이 지금 우리 고장에서 전개되고 있다. 그것도 무명의 승려가 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세속의 일과 뒤얽혀 있으면서, 보배로운 달이 하늘을 가로지르듯 고매한 승려를 왜인의 후손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 업장은 또 어찌할 것인가?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일은 촘촘하게 얽힌 그물의 한 자락을 끌어당기는 것과 같다. 한쪽을 끌어올리면 다른 쪽도 함께 끌려오기 마련이다. 승려라면 역사적 사실도 연기의 그물과 다르지 않다는 점부터 명심해야 할 일이다.

/ 이근우 부경대 사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졸업
한국학대학원에서 '고대한일관계사 연구'로 석사,박사 학위 취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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