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윤 사우디 사업가 겸 칼럼니스트]
해결되지 않은 삶의 문제
최근 과학 유튜버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이 덕에 이전에는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힘들었던, 최첨단 과학 분야에 대한 접근성이 많이 개선되었다. 뛰어난 과학 커뮤니케이터들의 등장으로 어려운 용어로 뒤범벅되어 기초지식 없이는 단 한 줄도 이해하기 힘들던 과학 개념들이 가깝게 다가오고 있다. 이제 과학과 기술은 단순히 인간 문명을 좀 더 편리하고 효과적으로 발전시키는 역할을 넘어, 인간과 우주의 본질과 궁극적인 질문에 대해서도 답을 하려 한다.
뇌과학의 발달로 의식, 영혼, 마음 등 비물질적인 형이상학의 영역으로 간주되던 곳들도 뇌의 물리적, 화학적 기능에 의한 것임이 밝혀지고 있다. 과학자들은 이제 생각이 어떻게 생기는지, 감정이 왜 발생하는지 상당 부분 설명할 수 있다. 한 실험에서는 피험자가 손가락을 움직이기로 의식적으로 결정하기 0.5초 전에 뇌가 이미 그 움직임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 확인됐다. 인간만의 고유한 특징이라 생각했던 '자유의지'조차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에 부쳐진 것이다. 이렇게 과학에 의해 이전에 종교가 담당하던 영역들이 하나씩 해체되어 가고 있다. 과연 과학의 시대에도 종교는 지속될 수 있을까?
최근 한 조사기관의 통계에 따르면, 세계 주요 종교들은 여전히 매해 1~ 2%씩 성장하고 있으며, 비종교인과 무신론자들은 꾸준히 감소하고 있다. 과학이 답하지 못하는 영역에서 종교의 역할이 여전하다는 것이다. 뇌의 도파민 회로가 사랑을 설명할 수는 있지만, '사랑을 할 이유'를 주지는 않는다. 신경과학이 고통의 매커니즘을 밝혀낼 수는 있지만, '고통을 견딜 의미'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삶에 대한 진지한 물음에 대해 여전히 종교가 줄 수 있는 위로와 힘은 견고하다.

과학의 역할은 명확하다. 과학의 강점은 예측 가능성과 재현 가능성에 있다. 같은 조건에서 같은 결과가 나온다. 항생제는 믿음과 무관하게 작동하고, 중력은 신앙의 강도와 상관없이 사과를 떨어뜨린다. 이런 면에서 과학이 제시하는 답변은 명쾌하고 단순하다. 한때 종교도 과학이 하던 역할을 하려고 했던 때가 있었다. 거의 모든 영역에서 모든 질문에 대답하려 했다. 그러나 이제는 상당한 영역에서 과학에게 그 역할을 넘겨주고 있다.
그러나 과학이 주는 설명은 삶에 방향을 주지는 않는다. 뇌의 회로를 안다고 해서 왜 살아야 하는지가 저절로 주어지지 않으며, 고통의 메커니즘을 이해한다고 해서 고통의 무게가 가벼워지지 않는다. 이 영역에서 종교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종교는 전통적으로 인간을 빚는 도구로 기능해 왔다. 일정 부분 세상을 설명하고 이해하도록 하는 역할도 해왔지만, 그보다는 인간을 어떤 존재로 살게 할 것인가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에서 더 빛났다.

내가 생각하는 종교가 사람을 빚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에게 존엄을 부여한다. 구약성서 창세기에 "인간을 신의 형상대로 창조했다"는 구절은 생물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사실이 아닐지는 모르지만 이 언어는 인간을 단순한 생물학적 기계가 아닌 존엄한 존재로 위치시킨다.
둘째, 공동체를 연대의 구조로 묶는다. 종교는 개인을 고립시키지 않는다. 예배, 기도, 의례는 개인을 공동체 안에 위치시키며, "우리"라는 정체성을 형성한다.
셋째, 삶의 고통을 견딜 서사를 제공한다. 구약성서의 욥기는 고통의 원인을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욥의 삶에 갑자기 찾아온 엄청난 고통이 무의미한 우연이 아니라 더 큰 이야기의 일부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런 이야기가 삶의 고통을 견딜 힘을 준다는 것이다. 아우슈비츠 생존자 빅터 프랭클이 발견한 것도 이것이었다. 고통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사람은 견딜 수 있었지만, 그런 의미를 갖지 못한 사람들은 수용소에서의 삶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나갔다.
과학과 종교는 경쟁 관계가 아니라 보완 관계일 수 있다. 과학은 사실의 영역을, 종교는 의미와 가치의 영역을 다룬다. 과학이 "어떻게 사는가"를 설명한다면, 종교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말한다.
그러나 종교는 언제든 '폭력'으로 변질될 수 있다. 종교가 사람을 빚는 방식이 인간을 가스라이팅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경험한 종교가 가스라이팅이 되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진리가 인간보다 위에 놓일 때. 신앙이 절대적 진리로 고정되면, 인간의 경험은 부차적이 된다. 교리가 삶보다 중요해지고, 정통이 사랑보다 우선시된다. 이단 심판, 종교 재판, 명예 살인이 모두 여기서 나온다. 진리를 위해 인간이 희생되는 구조다.
둘째, 질문이 죄가 될 때. 의심이나 비판이 배신으로 규정되며, 지적 자유가 억압된다. 갈릴레오는 지동설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종교재판에 회부되었다. 그의 죄는 거짓을 말한 것이 아니라 진실을 말한 것이었다.
셋째, 타인의 고통이 "신의 뜻"으로 정당화될 때. 신의 시험, 계획, 섭리, 이러한 언어는 위로가 될 수도 있지만, 구조적 불의를 은폐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카스트 제도가 힌두교의 카르마 이론으로 정당화되고, 노예제가 기독교의 피조물의 질서로 합리화되었던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이 순간, 종교는 더 이상 신앙이 아니다. 권력의 기술로 변질되며, 인간을 소모하는 기계가 된다.
역사는 이러한 사례들로 가득하다. 십자군 전쟁은 성지 회복이라는 명분으로 수십만 명을 학살했다. 종교재판은 신앙의 순수성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고문과 화형을 자행했다. 30년 전쟁은 종교의 이름으로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앗아갔다. 이 모든 폭력은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
근본주의/원리주의,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하는 심리
근본주의와 원리주의는 이 타락의 전형이다. 이들은 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이름으로 인간이 만든 규칙을 신의 위치에 가져다 놓는다. 복잡한 세계, 모호한 도덕,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사람들은 명확한 규칙, 절대적 진리, 확실한 구원을 갈망한다.
근본주의는 이 갈망을 충족시킨다. "이것만 믿으면 구원받는다", "이것만 지키면 의롭다", "이것만 따르면 확실하다" 이러한 단순함은 불안을 해소하지만, 동시에 사유를 정지시킨다.
근본주의의 본질은 복잡한 인간을 단순한 교리로 재단하고, 자유를 위협으로 간주한다는 데 있다. 인간은 더 이상 목적이 아니라 교리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이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여성은 교육받을 수 없고, 음악은 금지되며, 예술은 파괴된다. 이 모든 억압은 "샤리아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정당화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신의 뜻이 아니라 권력의 유지가 목적이다.
종교적 폭력은 물리적 형태에 국한되지 않는다. 타인을 죄인으로 정죄하는 언어, 질문하는 이를 공동체에서 추방하는 행위, 고통받는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태도 등은 이미 사회적 폭력이나 다름없다.
서부지방 법원 폭동 사건이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특정 목사의 선동으로 수십 명의 신도들이 법원으로 몰려가 전 대통령 구속영장 발부를 규탄하며 폭력 시위를 벌였다. 종교적 언어로 포장된 정치적 선동이 청년들을 거리로 내몰았고, 그들 중 일부는 체포되어 최대 5년형을 받으며 인생이 망가지고 말았다.
이 사건은 여러 문제를 드러낸다. 목사는 강단에서 특정 정치인을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로 선포하고, 반대 세력을 "사탄의 무리"로 규정했다. 정치적 판단이 종교적 절대성을 얻는 순간, 비판은 불가능해진다. 청년들은 신앙의 이름으로 동원되었지만, 실제로는 정치적 목적의 수단이었다.
다행히 선동의 중심에 있던 목사도 구속되었다. 이는 종교의 면책 시대가 끝났음을 보여준다. 강단에서 마구 휘둘러댄 가스라이팅에 대해, 이제 법적, 윤리적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그의 구속도 이미 망가진 청년들의 미래를 바꿔줄 수는 없다.

이란의 신정 체제가 보여주는 것
이란의 신정 체제는 종교가 권력과 결합할 때의 문제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1979년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 이후, 이란은 "신의 통치"를 표방했다. 최고지도자는 종교적 권위와 정치적 권력을 모두 장악했다.
결과는 참담하다. 2026년 현재 이란에서 화폐는 휴지조각이 되고, 젊은이들은 미래를 잃었다. 리얄화는 1달러당 100만 리얄을 돌파했고, 실질 GDP는 2017년 대비 30% 가까이 위축되었다. 실업률은 30%를 넘고, 국민의 평균 월소득은 200달러 미만이며, 식료품 가격은 6개월간 60% 상승했다.
민생의 고통을 호소하기 위해 거리로 뛰쳐 나온 이란 시민들은 주적(主敵) 미국과 이스라엘의 스파이나 앞잡이로 내몰리며, 현재 최소 1만명에서 최대 2만명까지 학살을 당하고 있다. 잠시 소강 상태로 보이지만, 언제 다시 지옥도가 펼쳐질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그럼에도 고통은 '신앙의 시험'으로 재해석되며, 신앙 언어는 통제의 도구로 전락한다. 최고지도자 하메네이는 "서방과의 타협은 배신"이라 선언하지만, 국민들은 빵조차 살 수 없다. 이념이 신앙의 옷을 입는 순간, 비판은 배신이 되고 민생은 뒷전이 된다.
젊은 세대의 대규모 이탈은 종교가 인간을 목적에서 밀어낼 때 체제가 어떻게 붕괴하는지를 증명한다. 2022년 마사 아미니 사망 이후 시위는 "여성, 생명, 자유"를 외쳤다. 2026년 시위는 더 절박하다. "가자는 우리 무덤이 아니다", "우리 아이에게 빵을 달라."
종교는 더 이상 삶을 지탱하는 구조가 아니라, 체제 유지용 장식물이 됐다. 젊은이들은 물리적으로 탈출하거나 정신적으로 이탈한다. 지금도 여전히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는 이란 과학/기술계의 인재 유출은 세계 최악 수준이다.
한국과 이란은 표면상 다르지만, 종교가 권력 도구로 변할 때의 풍경은 놀랍도록 닮아 있다. 이란에는 최고지도자의 종교적 권위가 있고, 한국에는 대형 교회 목사의 카리스마적 권위가 있다. 이란에서는 반대자를 "신의 적"으로 규정하고, 한국에서는 "사탄의 세력"으로 규정한다. 둘 다 젊은 세대가 종교에서 이탈하고 있다.
아직도 종교는 유효한가?
종교의 유효성은 무조건적이지 않다. 조건부다. 다음의 조건을 충족할 때에만 가능하다.
첫째, 인간의 존엄을 전제로 해야 한다. 인간은 결코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어야 한다. 신앙이 인간을 도구화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신앙이 아니다.
둘째, 질문을 허용해야 한다. 의심하지 않는 신앙은 맹신이다. 진정한 신앙은 질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질문을 통해 깊어진다.
셋째, 자유를 확장해야 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의 핵심은 여기 있다. 신앙이 인간을 더 자유롭게 만들지 못한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과학 시대에 종교가 살아남기 위해 과학과의 경쟁에서 이겨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종교가 인류의 동반자로서, 불확실한 삶의 부조리 속에서, 인간의 존엄과 가치, 자유의 불빛을 밝혀주었던 본연의 역할을 성실히 해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을 소모하는 종교는 그 역할을 상실한다. 종교가 과학과 싸울 필요는 없지만, 윤리적 기준은 포기할 수 없다. 21세기의 종교는 중세적 우주론을 고집할 필요는 없지만, 인간 존엄의 원칙은 절대 양보해서는 안 된다.
종교의 생존 조건은 진리 주장의 크기가 아니다. 얼마나 많은 교리를 갖고 있는가, 얼마나 오래된 전통인가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인간을 어디에 위치시키는가다.
인간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만드는 신앙은 아무리 신을 말해도 이미 신을 배반한 것이다. 신의 이름으로 인간을 짓밟는 종교는 무신론보다 더 신을 모독한다.
과학의 시대에 종교가 설 자리가 있다면, 그 자리는 하늘이 아니라 인간 곁이다. 종교는 더 이상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거나, 질병의 원인을 제시하는 도구가 아니다. 그 역할은 과학이 더 잘한다.
종교의 자리는 과학이 침묵하는 곳에 있다. 고통의 의미, 존엄의 근거, 타자에 대한 책임, 공동체의 연대에 대해 과학은 답을 줄 수 없다. 종교는 인간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을 도와야 한다.
이제 쉰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니, 청년의 때에 내가 진리의 편에 서 있다고 믿었던 확신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 것인지 새삼 깨닫는다. 20대의 나는 확신으로 가득했다. "이것이 옳다", "이것이 진리다." 중년의 나는 확신보다 질문이 많다. "이것이 정말 옳은가?", "이것이 누군가를 해치지는 않는가?", "이것이 나를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드는가?"
젊을 때보다 나이 들어가는 나에게 신앙의 영역에서 모호한 구간은 줄어들지 않고 늘어만 간다. 하지만 나이 들어갈수록 더 분명해 지는 것도 있다. 종교가 고통받는 사람 곁에 설 때, 약자를 보호할 때, 정의를 수호할 때 가장 빛난다는 것이다.
“과연 나의 신앙은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가?”
이 질문이 종교의 유효성을 가늠하는 최후의 기준이다. 신학적 정교함도, 역사적 권위도, 신도 수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 종교가 세상을 조금이라도 덜 폭력적이고, 조금이라도 더 정의롭고, 조금이라도 서로 더 사랑하도록 만드는가다.
만약 그렇다면, 그 종교는 과학의 시대에도 유효하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아무리 오래된 전통이라도 이미 정당성을 상실했다.
나쁜 종교가 없는 시대를 꿈꾸며
우리가 향해야 할 미래는 종교 없는 시대가 아니다. 인간은 여전히 의미를 필요로 하고, 이야기를 필요로 하며,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
우리가 향해야 할 미래는 나쁜 종교가 없는 시대다. 인간을 수단으로 만드는 종교, 질문을 억압하는 종교, 폭력을 정당화하는 종교가 없는 시대. 그리고 그 자리에 인간을 더 자유롭게 하고, 더 존엄하게 만들며, 서로를 더 사랑할 수 있게 돕는 신앙이 자리하는 시대.
역사는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보여준다. 종교는 끊임없이 타락했지만, 끊임없이 개혁되었다. 종교개혁,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해방신학 등 모두 종교를 인간 곁으로 되돌리려는 시도였다.
과학의 시대에 종교는 겸손해져야 한다.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려 들지 말고, 인간의 곁을 지켜야 한다. 진리를 독점하려 들지 말고, 자유를 확장해야 한다. 권력을 추구하지 말고, 섬김을 실천해야 한다. 이것이 가능할 때만, 종교는 과학의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 필자인 이근윤은 서울대에서 환경과학을 전공했다. 한국렌탈 중동총괄 이사를 역임했고 현재는 켄렌탈 최고경영자(CEO)를 맡고 있다. 현재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에서 5남매를 홈스쿨링하며 가족들과 함께 지내고 있다. 이메일 주소는 muscle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