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생각 넘기기] 부모님께 '가슴으로 바치는 사랑'
아버지는 슬픔, 어머니는 눈물로
시인으로 만들어 시 쓰게 인도

지난 4월에 어머니를 떠나보냈습니다. 준비되지 않은 이별에 슬픔이 해일처럼 밀려서 왔습니다. 아버지 가시고 55년 만에 어머니는 당신의 일생도 생몰연대로 묶어 놓고 떠나셨습니다. (…) 돌아보면 아버지는 저에게 슬픔으로, 어머니는 눈물로 저를 시인으로 만드시고 시를 쓰게 했습니다.('시인의 말'에서)
정일근 시인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널리 알려져 있다. 시인의 말과 시에서 드러나듯이 어머니는 일찍 남편을 떠나보내고 생활전선으로 뛰어들어 자녀를 키우며 살아야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가 떠난 빈자리를 어머니와 함께 고단한 삶을 살아내 왔다. 시인에게 어머니는 삶의 원천이며, 기둥이며, 역사이며, 증인이며, 증거이며, 인내였다. 보살 같은 어머니는 삶의 지침을 주는 스승이었다. 병간호를 하며 지켜본 어머니는 꽃팬티를 입는 수줍고 아름다운 여자였다.
정일근의 시집 '꽃장'은 어머니의 한 많은 비애의 삶을, 밥 보리살타를 실천하는 보살의 삶, 사랑스러운 여자, 시인에게 시의 원천을 주는 삶을 깊게 살아낸 자, 병약한 시인의 손을 잡아 생기의 삶으로 끌어주는 자로서의 어머니를 그려낸다. '이승의 늙은 아들 걱정하시는 저승의 젊은 아버지', 너무나 젊은 날에 저편으로 가버린 아버지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과 한도 드러난다. 이른 나이에 청상이 된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을 시적 상상력을 통해 그려내기도 한다.
'비수처럼 날아드는 해안 경비대 차가운 서치라이트 불빛에 찔려 추락하던 열일곱 어지러운 잠에서 깨어났을 때, 어머니 홀로 그물을 깁고 계셨다. 소금을 가마채 풀고 가는 해풍의 비린 힘살들이 칼날 문양 새긴 문고리를 흔들고 조금의 물살에 밀려 어업 한계선 밖으로 섬들이 흘러가는 소리 자욱하였다. 물오른 푸른 무같이 팽팽한 가슴을 가졌던, 서른 이후 청상이 된 어머니 순흥 안씨, 헝클어진 그물 같은 씨줄의 슬픔과 날줄의 눈물이 굳은살 박인 손끝에서 연연하게 다스려지고 있었다. 때로는 붉은 유행가에 얼굴 더욱 붉게 물들어 간장 종지처럼 작아진 가슴안에 아버지 돌아올 동백 섬이 떠오르고 있었다'(시 '열일곱 살의 바다' - 어머니)
'서른 이후 청상이 된 어머니'의 고단한 삶이 통상적 슬픔으로 흐르지 않고 긴장감을 팽팽하게 유지한다. 열일곱 살의 시적 화자가 바라본 어머니는 최전선의 생활인으로서 눈물을 연연하게 다스리며 살아가며, 한편으론 아버지를 잊지 못하는, 사랑을 품고 있는 슬픔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여성이다.
'어머니, 이젠 하얀 민들레로 오셔요./ 고성 안국사 대웅전 뒤편 산기슭에 꽃장葬한/ 어머니의 꽃밭으로, 어머니의 이름으로/ 우리 꽃 하얀 민들레로 오셔요./ 한 꽃밭 가득히 피어서 오셔요./ 서른둘에 홀로 돼 사신 반백 년에/ 몇 해 더 더한 세월은/ 눈물 피눈물로 다 적지 못할 시입니다./ 목이 메어 다 부르지 못할 노래입니다./ 일편단심 거룩한 꽃입니다./ 어린 남매 데리고 한恨의 바다를 떠돌다가/ 마지막 항구로 돌아온 노스텔지어의 귀향입니다.'( 시 '꽃장'의 일부분)
'일편단심 거룩한 꽃'인 어머니는 떠나셨다. '하얀 민들레꽃들 둥근 법열의 꽃씨로 맺혀', '저도 다시 어머니의 꽃으로 활짝 피게 하셔요', '우리 모두 피어나 어머니께로 돌아가게 하소서'로 노래한다. '하얀 민들레로 오셔요', '서른둘에 홀로 돼 사신' 어머니가 삶을 살면서 제대로 피어보지 못한 어머니를 위해 '한 꽃밭 가득히 피어서 오셔요'로 노래한다. 시적 화자는 삶의 뿌리이자 지지대였던 어머니를 떠나보내지만 '언제나 따스했던 어머니 슬하로' 회귀하고 싶어한다. 그만큼 어머니의 사랑은 높고 귀하고 크고 깊었던 것이리라.
'말 하나가 살아남아 빛나기 위해서는/ 말과 하나가 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어머니는 어머니의 삶을 통해 말을 만드셨고/ 나는 사전을 통해 쉽게 말을 찾았다'('어머니의 그륵' 부분)
어머니는 '그릇'을 '그륵'이라 하시지만 삶으로 언어를 쓰는 사람과 사전으로 찾아 언어를 쓰는 삶의 깊이가 다르다. 어머니는 삶의 철학을 주시고 삶을 사유하게 하신 분이시다.
정일근의 시집 '꽃장'은 시인의 시적 상상력이 빛난다. 시적 화자는 이른 나이에 부재한 아버지로 인한 상처(시 '아구')를 극복하며, 어머니가 여자로서, 스승으로서, 삶의 자양분과 아들에 대한 한없는 사랑을 주는 생에 대한 감각을 깨우는 자로서, 인간 그 자체로서의 어머니를 조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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