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닛이 에이티넘인베스트먼트의 참여를 앞세워 2000억원대 유상증자에 나섰다. 회사는 이번 유증을 통해 볼파라 인수 후 커진 재무부담을 낮추고 글로벌 사업을 이어갈 재원을 확보하겠다는 구상이다. 다만 자금 사용처를 뜯어보면 연구개발(R&D) 확대보다 전환사채(CB)와 차입금 상환 비중이 더 크다는 분석도 나타난다. 경영진 신주인수권까지 외부 벤처캐피탈(VC)이 받아 들어간 구조가 겹치면서 단순 재무적투자(FI) 이상의 의미로 해석하는 시선도 나타난다.
채무상환이 앞선 2115억 유증

17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루닛은 주주배정 후 실권주 일반공모 방식으로 보통주 790만6816주를 발행, 2115억원을 조달할 계획이다. 납입일은 4월30일이고 유증 신주는 5월15일 상장된다. 이와 함께 5월6일을 기준으로 1대1 무상증자도 진행해 5월26일 신주를 상장할 예정이다. 운영자금 737억원, 채무상환자금 1378억원, 발행제비용 24억원으로 나뉜다.
시장에서는 이번 증자의 핵심이 재무 안정화에 찍혀 있다고 본다. 운영자금보다 채무상환이 640억원 이상 크게 잡혀 있어서다. 회사는 투자설명서에 R&D 강화와 해외 사업 확장을 함께 언급했지만 실제 돈이 먼저 향하는 곳은 빚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자금배분 현황만 놓고 보면 이번 증자는 성장투자용 총알 장전보다는 상환 재원 확보 성격이 훨씬 짙다고 여겨진다.
채무상환자금의 세부항목은 그 성격을 더 선명하게 보여준다. 회사는 1·2회차 CB 조기상환 대응에 985억원을, 단기차입금 상환에 393억원을 배치했다. 단기차입금 상환에 393억원을 배치했다. 단기차입금 상환 대상에는 한국투자증권 300억원, 키위뱅크 70억원, 신한은행 23억원 등이 포함됐다. 2024년 볼파라 인수 당시 발생한 금융 부담을 먼저 걷어내는 작업이다.
다만 당장 CB 풋옵션이 대규모로 현실화한 국면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투자설명서에는 1차 조기상환기간 실제 청구 원리금은 187억원으로 회사가 가정한 985억원의 19%에 그쳤다. 루닛은 CB 금액의 50%를 만기인 2029년 5월까지 조기상환 대응 자금으로 사내에 유보할 계획이라고 적었다. 향후 청구 가능성을 대비해 현금을 쌓아두는 구조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볼파라' 인수 뒤 흔들린 재무

루닛이 이번 증자에 나선 배경으로는 이미 취약해진 유동성이 지목된다. 부채비율이 2023년 14%에서 2025년 169.2%까지 높아지는 동안 유동비율은 1801.6%에서 26.2%로 낮아졌다. 현금 및 현금성자산은 2023년 317억원에서 2024년 524억원까지 늘었지만 2025년 141억원으로 다시 줄었다. 단기금융상품도 2023년 0원, 2024년 50억원, 2025년 2억원의 흐름을 보였다.
볼파라 인수 이후 쌓인 금융 부담도 이번 증자의 이유로 꼽힌다. 루닛은 2024년 5월 루닛 인터내셔널 지분 전부를 인수했고 같은 해 1715억원 규모의 CB를 발행했다. 투자설명서에는 2024년 볼파라 인수에 2696억원의 현금유출이 발생한 것이 유동성 비율 악화의 주요 원인으로 적시돼 있다. 북미 유방검진 채널 확보의 대가로 CB와 현금유출 부담이 얹힌 셈이다.
그러나 회사 재무가 곧바로 붕괴 국면에 들어섰다고 보기도 어렵다. 2025년 영업이익률은 -100%로 여전히 높지만 2024년 -125.4%에서 개선됐고 당기순손실도 474억원으로 영업손실(679억원)보다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 회사는 CB 조기상환이 단기간에 대량 청구될 가능성은 제한적이라고 설명하면서도 발생 가능한 상환청구와 운영자금 수요에 대비한다는 방침이다.
유방암 검진 소프트웨어 기업 볼파라는 유방촬영 소프트웨어 회사 MRS시스템과 유방암 위험예측 플랫폼 CRS헬스를 인수하며 외연을 넓혀왔다. 루닛은 볼파라가 쌓아온 미국 고객 관계와 유방암 위험도 예측, 촬영 품질관리, 유방 치밀도 분석, 검진 리포팅 등 전주기 플랫폼 기술과 대규모 유방촬영 영상 데이터를 자사 암 진단 제품군과 결합하기 위해 인수를 결정했다.
에이티넘 참여에 붙은 경영권 매각 시선

빅5 VC로 꼽히는 에이티넘인베스트먼트의 참여가 경영권 변동의 변수라는 분석도 있다. 에이티넘인베스트먼트는 루닛의 백승욱 이사회 의장과 서범석 대표가 15% 청약을 위해 매도한 85% 신주인수권 전량과 기타 임원 신주인수권 등 총 96만주를 인수하고 추가 청약에도 참여해 300억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최대주주·특수관계인 지분율은 14.32%로 3.28%p 하락할 전망이다.
다만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만 놓고 보면 에이티넘인베스트먼트의 경영권 참여나 인수 가능성은 낮다는 것이 업계의 중론이다. 에이티넘인베스트먼트는 산업의 전반의 성장성과 루닛의 기술경쟁력을 보고 들어왔으며, 경영권 신주인수권을 받아 증자에 참여하는 것도 책임경영을 돕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루닛도 이들의 참여를 재무적 불확실성 해소 신호로 해석했다.
에이티넘인베스트먼트 관계자는 "루닛의 인공지능(AI) 기술경쟁력이 차별화됐다는 판단 아래 장기적으로 실질적인 성과 창출이 가능한 기업이라 본다"며 "의료AI 산업은 높은 성장잠재력과 구조적 확장성을 갖춘 매우 유망한 분야라고 판단하며, 해당 산업 자체의 가치에 주목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루닛이 의료AI 선도기업으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지분 확대 또는 경영권 인수 계획 여부에 대해서는 명백히 부인했다. 에이티넘인베스트먼트 관계자는 "경영진의 책임경영 강화에도 힘을 보태고자 한 것은 맞지만 경영권에는 관심이 없다"며 "에이티넘인베스트먼트는 애초에 M&A를 하지 않는다"라고 선을 그었다. 또 "사모펀드(PE)에 M&A 다리를 만들어줄 수는 있지만 직접 인수할 계획은 없다고 봐달라"고 강조했다.
주샛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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