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지오 아르마니가 이미지로 이야기를 들려준 프랑스 패션의 선구자를 회고하는 전시회를 개최했다.

“언뜻 보기에 기 부르댕(Guy Bourdin)은 나와 공통점이 많은 아티스트는 아니다.”라고 밀라노 아르마니/실로스(Armani/Silos)에서 열린 최신 쇼를 위해 1991년 사망한 프랑스 패션 사진작가의 혁신적인 작품 100점을 엄선한 조르지오 아르마니(Giorgio Armani)는 고백한다. “그의 작품에는 즉각적인 도발이 느껴지지만, 가장 인상적이었고 집중하고 싶었던 것은 오히려 그의 자유로운 창의성과 내러티브 기술, 그리고 영화를 향한 그의 큰 애정이었다.”
부르댕은 상상의 여지를 남기는 맛있고 불쾌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부르댕 작품의 오랜 큐레이터인 셸리 버타임(Shelly Verthime)은 “그는 패션 사진 역사상 최초의 스토리텔러 중 한 명이다.”라고 말한다. “반만 드러난 듯 비밀스러운 함축으로 가득한 부르댕 사진의 내러티브는 쉽게 해독할 수 없기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증을 남긴다.” 아르마니/실로스의 엄숙한 회색 벽에 걸린 작품들을 통해 부르댕의 기상천외한 창조적 정신이 일과 놀이를 넘나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작품은 허구, 즉 스스로 창조하고 극화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이 이야기는 특별한 방식으로 우리의 정신에 자리 잡는다. 그가 만들어낸 허상은 일반적으로 다뤄지지 않는 것들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도발적이다. 부르댕이 당신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윙크와 힌트로 점철되어 있다.
i-D는 버타임과 함께 부르댕의 놀라운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부르댕의 어린 시절에 대해 알려달라.
부르댕은 1928년 파리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나중에 아버지에게 입양되었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정보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어릴 적부터 예술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고독한 어린 시절에 위안을 얻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는 것 정도가 알려져 있다. 1950년 군 복무를 마치고 사진을 처음 접한 그는 파리로 돌아왔다.
1952년 부르댕의 첫 번째 전시회 카탈로그 서문에서 맨 레이(Man Ray)는 “기 부르댕은 좋은 사진작가 그 이상이 되기 위해 온 마음을 다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라고 썼다. 두 사람은 어떻게 만났나?
부르댕은 맨 레이의 문을 여러 번 두드렸지만 번번이 거절 당했다. 하지만 노력 끝에 마침내 스튜디오에 받아들여졌고, 그곳에서 그는 맨 레이의 ‘하이 아트(high art)’에 대한 환상을 접하게 됐다. 부르댕에게 맨 레이는 곧 스토리텔링과 감정의 관계를 자신의 비정통적인 관심사에 맞는 방식으로 실험하는 초현실주의자였다. 20대 초반의 나이에도 부르댕은 자신에게 완전한 창작의 자유가 필요하다고 단호하게 주장했다. 맨 레이는 카탈로그에 적은 몇 마디를 통해 젊고 열정적인 기 부르댕의 미래를 기대했다.

아르마니의 작품 셀렉션은 ‘스토리텔링’에 중점을 뒀다. 부르댕은 영화에 열광하기도 했다는데, 맞나?
맞다, 특히 심리 스릴러를 좋아했다. 1960년대 말, 그는 자신의 이미지를 관음증적인 캔버스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에 B급 영화의 음모와 서스펜스를 반영했다. 그는 색채만큼이나 빛과 그림자의 대가였다. 하지만 닉 나이트(Nick Knight)가 말했듯이 그의 작품은 시각적으로 놀라울 뿐만 아니라 사고를 자극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그의 상징적인 우산 장면은 불완전하지만 매혹적인 내러티브를 남긴다. 여자는 도망치는 중인가? 누가 그녀를 쫓고 있는가? 이 사진은 본래 메이크업 광고로서 제작되었지만, 부르댕은 항상 제품보다 제품을 위해 제작된 화보를 훨씬 소중히 여겼다. 디지털 시대 이전에 이 사진을 40가지의 검은 색조로 구성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을지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부르댕의 작업 방식은 어땠나?
부르댕은 무엇보다도 예술가 그 자체였다. 그는 평생 동안 그림을 그렸고, 그 때 형성한 습관을 스튜디오로 확장했다. 그의 조수들이 회고하는 바에 따르면,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로디아(Rhodia) 메모장에 아이디어를 스케치하곤 했다고 한다. 그는 세트 제작부터 ‘부르디네스크(Bourdinesque)’ 스타일의 헤어와 메이크업 감독에 이르기까지 사진 촬영의 모든 측면에 관여하는 끈질긴 완벽주의자였다. 그는 완벽한 예술적 통제를 원했고, 자신이 직접 크롭한 단독 사진만 사진 데스크에 제출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1955년 프랑스 보그(Vogue)에 데뷔한 부르댕은 혀를 빨고 있는 세 마리의 소 머리 아래에서 모자 제작자 클로드 생시르(Claude Saint Cyr)의 작품을 착용한 모델의 사진을 찍었다. 이 사진에서 그는 어떻게 잡지라는 매체를 자신의 것으로 소화했을까?
그 에디토리얼은 보그의 일반적인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결과적으로 https://i-d.vice.com/en_uk/topic/conde-nast와 30년 동안 이어진 인연의 시작이 되었다. 부르댕은 패션계를 위해 그런 흥미로운 시나리오를 감히 연출할 수 있는 유일한 사진작가였으며, 고객과 편집자들은 그에게 그런 자유를 허락했다. 프랑스 보그의 오랜 편집장이었던 프란신 크레센트(Francine Crescent)는 그의 사진을 거부한 적이 없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패션 잡지는 역동적인 변화를 겪었고, 프렌치 보그는 그 흐름을 주도했다. 70년대 말 부르댕의 에디토리얼은 20페이지에 달하는 스프레드도 있을 정도로 정말 파격적이었다. 그의 가장 획기적인 혁신 중 하나는 초현실주의자들이 사랑한 거울 모티브를 도입한 이중 스프레드와 센터폴드 사용이었다. 이 독특한 시각적 아이덴티티는 그를 동시대 작가들과 확실히 차별화했다.
부르댕은 70년대의 대담하고 혁신적인 정신을 어떤 방식으로 구현했나?
이 시기는 청년 혁명, 정치적 격변, 사회적 가치관의 변화로 특징지어지는 시대였다. 패션은 팝아트, 할리우드의 화려함, 우주 시대의 시크함 등 다양한 시각적 도상학에 영향을 받았다. 부르댕의 작품은 이러한 창의적인 용광로를 반영했고, 강인한 여성미와 자신감 넘치는 도회적 세련미를 발산했다. 그의 엣지 있는 화려함, 어두운 유머, 풍부한 관능미는 가장 특권층에 속하는 관객들조차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부르댕은 당시의 사회적 변화를 재현하면서도 항상 재치 있고 날카로운 개인적 비전에 충실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20년 전 V&A에서 열린 최초의 기 부르댕 기관 전시 큐레이션에 참여한 것으로 안다. 어땠나?
당시에는 패션 사진이 미술관에서 전시된 적이 거의 없었다. 반면 해당 전시에는 패션 작품에 중점을 두는 한편, 기 부르댕의 빈티지 프린트, 필름, 폴라로이드, 스케치도 함께 선보였다. 이 전시회는 디자이너와 학생, 젊은 세대와 장년층 모두에게 인기를 끌었다. 20여 년 전 내가 연구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부르댕은 컬트 사진작가로 여겨졌다. 그의 개인 사진 대부분을 공개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각각의 점들을 연결하고 전체를 하나의 일관된 작품 세계로 제시할 수 있었다.
부르댕의 생애는 루머로 가득 차 있으며, 많은 비평가들이 프로이트적인 방식으로 그를 분석하고 있다. 왜 그럴까?
부르댕은 패션 사진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지만 오늘날까지도 수수께끼의 인물로 남아 있다. 보그의 오랜 협력자 중 한 명은 그가 삶의 모든 흔적을 지우고 싶어했다고 말했다. 잡지 페이지 속 영원하지 않은 이미지들은 그가 투영한 대중의 페르소나를 완벽하게 반영했다. 그는 스포트라이트를 피하고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으며, 보그의 셀러브리티 스프레드에 자신의 초상화가 실리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내가 부르댕과 함께 일했던 동료들을 인터뷰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의 아들 사무엘(Samuel)이 현명한 조언을 해 주었다: “그냥 사진들에 집중해라. 모든 것이 이미 그 안에 있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사무엘을 어떻게 만나게 되었나?
2년 동안 사무엘을 쫓아다닌 끝에 마침내 파리에서 오랫동안 함께 일했던 알베르 엘바즈(Alber Elbaz)의 집에서 그를 만났다. 사무엘은 기 부르댕의 첫 번째 책인 ‘Exhibit A’를 출판하기 위해 밀라노로 향하고 있었고, 브라질에서 장거리 비행을 마치고 막 피곤한 몸을 이끌고 도착한 상황이었다. 선글라스 너머로 그의 눈을 볼 수는 없었지만 첫 질문이 무엇일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아버지도 점성술에 관심이 많아서 모든 모델에게 별자리가 무엇인지 물어보곤 했기 때문이다.
“전갈자리”라고 나는 대답했다. “흠... 내 딸 레아(Leah)도 전갈자리인데... 생일이 몇 일인가?” 사무엘이 물었다. “11월 17일.” 내가 대답했다. “레아와 같군.” 사무엘이 말했다. 내 눈 한구석에서 지루해진 엘바즈가 의자에 ‘가라앉는’ 것이 보였다. 사무엘과 나는 그날 처음 인연을 맺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내 생일과 같은 날짜가 새겨진 어머니의 결혼 반지를 보여주었다. 엄청난 우연의 일치다...
사무엘은 아버지의 유산을 어떻게 관리하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사무엘은 24살이었다. 상실의 슬픔에 완전히 혼자가 된 그가 공식적으로 유산을 상속받고 자료 아카이빙을 시작하기까지 거의 10년이 걸렸다. 작년에 안타깝게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사무엘은 평생 동안 아버지의 유산을 놀라운 성실함과 자비심으로 소중히 간직했다. 그는 유산을 관리하고 지키는 데 전념하며 소박한 삶을 살았다.
패션 사진은 언제 비로서 예술로 거듭나는가?
오늘날 예술과 패션, 사진의 경계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하지만 패션 사진이 진정한 예술로 인정 받으려면 영향력과 시대 정신을 담아내는 능력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기 부르댕은 그 누구보다 예술가로서 인정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에디터 Alex Merola
번역 Yongsik Kim
이효리 뮤직비디오 속 아이코닉 룩 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