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병일 칼럼] 보수의 가치는 겸손과 신중한 정책에서 시작된다

진정한 보수주의는 '겸손'에서 출발한다. '내 생각이 틀릴 수 있다'는 겸손이다. 오만이 아닌 겸손이 그 사회에서 널리 오래 합의된 지혜와 전통을 존중하도록 만든다. 이런 자신, 이웃, 경쟁자, 국민에 대한 겸손, 그리고 여기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세상의 일'에 대한 겸손이 보수주의자의 정책을 '안정과 미래'라는 방향으로 이끈다.
즉흥적이고 과격해서 불안감을 주는 정책, 인기를 위해 당장의 달콤함을 주며 미래를 망가뜨리는 정책은 진짜 보수주의자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근대 보수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18세기 영국의 철학자이자 정치인인 에드먼드 버크는 "개인은 어리석지만 인류는 현명하다"고 말했다. 개인이 갖는 한계와 불완전성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역사를 통해 축적된 지혜를 존중하는 이들이 보수주의자이다.
하지만 인간은 겸손하기가 참 힘들다. 완벽한 신이 아닌 취약한 인간의 숙명이다. 그래서 쉽게 오만해지고, 내가 모든 것을 다 알며, 타인과 세상을 내 계획대로 만들 수 있다고 착각하곤 한다. 여기서 비극이 시작된다. 그 개인에게도 비극이고 사회 전체에도 비극이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지난 정부들에서 우리는 겸손이 아닌 오만에서 기인한 많은 정책들을 목격했고 시행착오와 부작용을 경험했다. '소득주도 성장 정책'도 그중 하나다. 문재인 정부는 최저임금을 집권 첫해인 2018년 16.4%나 대폭 인상한 데 이어, 2019년에도 10.9% 인상했다. 부작용을 우려하는 전문가들과 경제 현장의 목소리는 소득을 크게 올려 이상향을 만들 수 있다는 오만에 묻혀버렸다.
결과는 전문가들의 예상대로였다. 갑자기 커진 인건비 부담으로 영세업체들을 중심으로 인력 감축에 나섰고 셀프 결제 키오스크 등 자동화가 경제 현장에 급속히 도입되었다. 부작용이 커지자 문재인 정부는 결국 2020년 2.9%만 인상하며 최저임금 1만원 공약을 포기했다.
이번 정부의 '과학기술 카르텔' 척결을 앞세운 R&D 예산 삭감 정책과 '의대 2000명 증원 정책'도 해당 분야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추진해 많은 시행착오와 부작용을 초래했다.
의대정원 조정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찬반이 엇갈리는 문제였고 그 파급효과가 장기간 국가의 전체 이공계 인력정책과 예산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복잡한 이슈였다. 2000이라는 증원 규모가 얼마나 과격했는지는 정원이 49명에서 하루아침에 무려 151명(300%)이 늘어나 200명으로 급증한 충북대 의대 사례를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환자를 직접 보며 실습교육을 받는 것이 중요한 의대의 현장을 대하는 태도가 보수의 정책답지 않게 너무도 즉흥적이었고 신중하지 않았다.
오랜 역사에 규모도 훨씬 큰 다른 대학과 비교해보자. 서울대 의대는 병상 수 3870여 개에 정원 135명인데, 충북대 의대는 병상 수 800개에 정원이 200명에 달한다. 연세대 의대도 정원이 110명이며, 미국의 명문 하버드대 의대(Pathways 프로그램)도 135명에 불과하다.
이는 예상했던 대로 크고 깊은 부작용을 초래했다. 미래의 의료현실에 불안을 느낀 전공의들이 대거 사직하고 병원을 떠났고, 의대생들도 대부분 휴학해 대학병원과 의대교육이 모두 파행을 빚고 있다.
다시 버크에게 돌아가 보자. 버크는 프랑스 혁명을 보며 급진주의가 가져올 파괴적인 결과를 우려했다. 급진주의가 득세한 프랑스 혁명이 다듬어 써야 할 건물을 모두 파괴한 뒤 제로(0)라는 빈터에서 추상적인 이념에 의해 급하게 지으려 한다고 비판했다. 버크의 우려는 자코뱅의 공포정치와 나폴레옹의 독재로 현실이 되었다. 현대사회에서도 과격하고 급진적인 정책은 사회에 파괴적인 후유증을 남긴다.
한국의 보수가 계엄령과 대통령 탄핵소추로 다시 천 길 벼랑 끝에 섰다. 보수는 회생할 수 있을까. 해법은 보수의 가치인 '안정과 미래'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세상일은 만만치 않으며, 국민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장기판 위의 말이 아니다. 진정한 보수로 거듭나려면 무엇보다 겸손한 태도로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고 안정감을 주는 신중한 정책을 추진하면서 실현 가능한 미래를 제시해야 한다. 과학기술 R&D 예산 삭감 정책과 의대 2000명 증원 정책에 대해 신중치 못했음을 사과하고 수정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과격한 몇몇 정책에서 미래에 대한 불안을 느끼고 떠난 과거의 지지층과 중도층의 마음을 다시 돌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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