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민은 못 심었다..." 담장을 타고 피어난 사연 있는 '여름꽃'

기다림의 꽃, 능소화의 모든 것
능소화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여름엔 골목길 담벼락 위를 주황빛 꽃들이 장식한다. 벽을 타고 올라 꽃송이를 수놓는 능소화다. 흐드러지게 피어난 이 꽃은 멀리서 보면 화려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어딘가 연약해 보인다. 능소화는 여름의 정취를 전하는 꽃나무인 동시에, 긴 시간 기다림과 사연을 간직한 덩굴 식물이다.

양반집에만 허락됐던 꽃

담장 위의 능소화 / 한국원예종묘

능소화라는 이름은 덩굴줄기가 하늘을 향해 솟는 모습에서 비롯됐다. '능소화'에서 '능(凌)'은 업신여길 능, '소(霄)'는 하늘 소이다. 즉, 하늘을 능가하듯 높이 오르는 꽃이라는 뜻이다.

금등화(金藤花)라고도 부른다. 원산지는 중국이다. 한국에는 중부 이남 지역에서 주로 자라며, 예부터 절이나 양반가에서 심었다. 가지에서 나오는 흡착근으로 담벼락을 타고 자라는데, 길이는 10m에 이르기도 한다.

한반도 남부에선 꽃이 6월 말부터 피기 시작해 8월까지 계속된다. 중부 지역에서는 기온 탓에 꽃이 조금 일찍 진다. 꽃은 연한 주황색이며 안쪽은 더 진한 주황빛이다. 꽃잎은 지름이 6~8cm로 제법 크고, 화관은 깔때기처럼 벌어져 나팔을 닮았다. 한 송이씩 떨어지기보다 덩굴 가득 이어지며 피어나는 모습이 장관이다. 꽃이 지면 또 피고, 또 피며 여름 내내 꽃을 감상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는 함부로 심을 수 없었다. 장원 급제자에게 임금이 어사화로 꽂아주던 꽃이기도 했고, 양반 가문에서만 키울 수 있었다. 양반 꽃이라는 별칭도 여기에서 비롯됐다. 평민이 무단으로 심는 것이 금지됐다는 전설까지 내려온다.

꽃송이는 한 번에 지지 않고 하나씩 떨어진다. 그래서 조선의 선비들은 능소화를 지조와 절개의 상징으로 삼았다. 흐트러짐 없는 꽃의 마지막이 단아하고 정갈하다는 이유에서다.

담벼락 위의 꽃, 생명력은 질기고 기품은 깊다

담장 위의 능소화 / 국립수목원

능소화는 담장과 궁합이 좋다. 덩굴줄기가 담장을 타고 올라가며 곧고 단단한 벽선 위에 꽃을 피운다. 기와 담장과 조화를 이룬 능소화는 조선의 풍경 속으로 들어온 듯한 착각을 줄 만큼 아름답다. 대표적으로 충남 아산 신언리 벽화마을에서도 능소화는 담벼락을 배경 삼아 우아한 자태를 자랑한다. 절이나 오래된 한옥 주변에 많이 심는 이유다.

덩굴마다 중간부터 끝까지 꽃이 연이어 매달린다. 무게 탓에 아래로 쳐지며, 멀리서 보면 꽃줄기가 폭포처럼 흐른다. 이 모습이 정돈돼 보이기 위해선 줄기 관리가 중요하다. 겨울에 가지치기를 제대로 해두면 이듬해 꽃이 보기 좋게 자란다. 여름이 끝난 뒤 9월부터는 잎이 떨어지고 생기를 잃는다. 그러나 다음 해 봄, 다시 줄기에서 꽃이 솟아난다.

능소화가 떨어진다 / 위키푸디

능소화는 햇볕을 좋아하긴 하지만 음지에서도 잘 자란다. 병충해에도 강해 관리 부담이 적다. 다만 수분을 많이 요구하는 식물이라 여름에는 물을 자주 줘야 한다. 또 뿌리에 물이 고이면 괴사할 수 있어 배수가 잘되는 흙에 심는 것이 좋다.

개화기 내내 바닥에 꽃이 떨어지므로 청소가 번거롭다는 단점도 있다. 하지만 떨어진 꽃이 만드는 풍경도 아름답기에 일부러 그대로 두는 경우도 있다. 꽃잎이 쌓여 만든 주황빛 융단은 여름 골목의 낭만을 더한다.

예쁜 겉모습과는 반대로 꿀에는 시간이 지나면 독성이 생긴다. 갓 채취한 꿀은 괜찮지만, 48시간 이상 지나면 섭취하면 안 된다. 또 피부에 오래 닿는 것도 피해야 한다.

그러나 꽃가루가 눈에 들어가면 실명한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다. 산림청에 따르면 능소화는 곤충이 수분을 돕는 충매화라 바람에 꽃가루가 잘 날리지 않고, 꽃가루 구조 자체도 해롭지 않다.

사연 담긴 꽃… 전설과 품격의 상징

능소화 / 한국관광공사

능소화에는 슬픈 전설도 있다. 옛날 궁녀 '소화'가 임금의 총애를 받았지만, 점차 잊히고 말았다. 소화는 기다리다 끝내 죽었고, 그녀의 유언에 따라 담장 아래 묻혔다. 그 자리에 피어난 꽃이 능소화라는 이야기다.

이야기의 영향인지 능소화의 꽃말은 '그리움', '기다림', '명예', '영광'이다. 격식을 갖춘 집 정원에 주로 심었고, 여인의 방을 수놓았던 배경으로도 자주 등장한다. 규수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꽃이기도 했다.

능소화는 수명이 매우 길다. 잘 관리하면 수백 년을 사는 식물이다. 전북 마이산 탑사에는 절벽을 따라 자란 거대한 능소화 덩굴이 있다. 2층 건물 높이를 넘는 능소화는 보기 드물다. 벽과 시간, 두 가지를 타고 자라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미국 능소화(좌)와 마담 갈렌 능소화(우). / Scenic Corner, crystaldream-shutterstock.com

비슷해 보이는 꽃 중에는 '미국 능소화'와 '마담 갈렌 능소화'가 있다. 미국 능소화는 꽃이 더 붉고 길쭉하며, 추위에 강하지만 덜 예쁘다는 평이 많다. 마담 갈렌은 두 품종의 교잡종으로, 미국 능소화보다는 덜 길쭉한 꽃이 피지만, 능소화만의 꽃 무더기 감성은 부족하다. 구별법은 간단하다. 능소화는 꽃받침이 연두색이고, 미국 능소화는 붉다. 마담 갈렌은 노랑~주황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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