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에는 ‘할머니 갱스터’가 있다 [임보 일기]

백수혜 2024. 10. 5. 0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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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개발 단지에서 버려진 식물을 데려와 임시 보호할 수 있었던 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역할이 참 크다.

어찌 보면 자기 집이 아닌 남의 집에서 기거하는 식물도 나도 임시로 집의 보호를 받으며 살고 있다.

아이가 없으니 '밥값을 못하는 X'이라고 내게 욕하던 할머니는 대뜸 우리에게 귀엽다며 '토깽이 새끼들'이라고 부르겠다 선언하셨다.

식물이나 나나 이곳에 뿌리내리며 적응한 것도 잠시, 또 뽑혀 다른 곳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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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완에서 반려로, 반려 다음 우리는 함께 사는 존재를 무어라 부르게 될까요. 우리는 모두 ‘임시적’ 존재입니다. 나 아닌 존재를, 존재가 존재를 보듬는 순간들을 모았습니다.

재개발 단지에서 버려진 식물을 데려와 임시 보호할 수 있었던 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역할이 참 크다. 우선 집 근처에는 지하철 노선이 무려 4개나 지나다닌다. 그럼에도 아직 아파트가 아닌 주택이 남아 있는 동네다. 작지만 마당도 있다. 어찌 보면 자기 집이 아닌 남의 집에서 기거하는 식물도 나도 임시로 집의 보호를 받으며 살고 있다.

우리 집은 막다른 길 끝에서 두 번째 집이다. 오토바이 한 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작은 골목길을 꼭 통과해야 한다. 여기서 산 지도 벌써 3년째다. 오가며 이웃과 인사하다 보니 그들의 이름도 성향도 잘 모르지만, 낯선 친밀감이 생겼다. 특히 집에 가려면 무조건 지나쳐야 하는 골목길 한쪽에는 날 좋을 때면 이웃 할머니들이 모여 도란도란 수다를 떠는 빨갛고 파란 플라스틱 의자들이 줄지어 선 장소가 있다.

ⓒ백수혜 제공

멤버는 고정적이지 않고 때때로 바뀐다. 모여 앉아 지나가는 사람을 쳐다보는 그들을 나는 ‘할머니 갱’이라 부른다. 이유가 있다. 우리는 마주칠 때마다 어색하고도 가벼운 인사를 나눴다. 그들은 낯을 익힌 후 내게 무례한 말을 서슴지 않았다. ‘요즘 통 안 보이던데 애 뱄냐?’ ‘맨날 지 신랑만 짐을 들게 시켜 나쁜 X’···.

이해하기 힘든 언어폭력에 한동안은 그 골목을 지나기가 겁날 정도였다. 평소의 나라면 불같이 화를 내며 따지고 들었을 텐데 어쩐지 그럴 힘이 없었다. 연륜이 느껴져야 마땅할 연배인데, 배려와 예의는 어디로 간 걸까. 궁금했지만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왜 저렇게 말할까 혼자 유추해보았지만 답을 얻지 못했다. 이 거친 말은 어쩌면 그들이 윗세대에게 들었던 말이고, 이웃과 교류하는 방법이라 생각해서 아무렇지 않게 나에게 똑같이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렴풋이 추측해볼 뿐이다.

의아하게도 ‘할머니 갱’들은 내게 무례한 말을 쉽게 하면서도 나에 대해 궁금해하지는 않았다. 몇 살인지, 왜 아이가 없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등 신상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본 적은 없다. 재개발 단지에서 구조한 식물을 들고 오갈 때면 한 뿌리 나눠 달라는 정도에 그쳤다. 나름 나의 사생활은 지켜준다는 느낌이라 물어보지 않는 것이 오히려 고마웠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둘이 안 덥냐, 더운데 손 꼭 잡고 다녀 쟤네는’이라든지, 이른 아침이나 늦은 저녁에 다니는 걸 보면 ‘일 가냐, 고생이 많네~’라며 조금씩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낯설게 온화한 말투로 우리를 대하기 시작했다. 아이가 없으니 ‘밥값을 못하는 X’이라고 내게 욕하던 할머니는 대뜸 우리에게 귀엽다며 ‘토깽이 새끼들’이라고 부르겠다 선언하셨다. 내 앞니가 많이 튀어나와 그런 걸까 싶은 생각이 살짝 스쳤지만, 귀엽다는 말에 그동안의 치욕은 눈 녹듯이 녹고 할머니에게 정이 붙어버릴 것 같다. 그들의 말이 불편해도 올라오는 분노를 무심히 내려놓았더니 생긴 좋은 변화였다.

이 동네도 5년 정도 뒤에는 재개발이 될 거라고 한다. 그때가 되면 나와 식물은 어찌 되는 걸까. 식물이나 나나 이곳에 뿌리내리며 적응한 것도 잠시, 또 뽑혀 다른 곳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또 다르게 생각해보면 어차피 우리는 모두 한시적으로 지구에 거처하고 있으니 긴 호흡으로 모든 것을 일시적으로 받아들이면 익숙해지는 일이겠다. 길지 짧을지 모를 마주하는 만남에 사람이든 식물이든 조금은 서로에게 부드럽고 따듯하게 대하며 지내길 바랄 뿐이다.

백수혜 (‘공덕동 식물유치원’ 원장)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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