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준의 돈 이야기<55>] 美 은행 탄생 둘러싼 정치투쟁… 주법은행 설립 촉발한 국법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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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몇 가지 용어를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국법은행, 주법은행미국은 연방국(federation)이다.
사실 전자는 연방법은행, 후자는 주법은행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보다 더 정확하지만, 'federal reserve bank(연방준비은행)' 등과 같은 특이한 법적 실체가 연방이라는 용어를 선점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의 번역 예를 따르는 것이 개념성 혼란을 줄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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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몇 가지 용어를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특정 용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관련 서적과 논문을 읽을수록 수렁에 빠져들고 만다. 미국인이 사용하는 특정 단어의 기의(記意·signifié)와 기표(記表·signifiant)가 우리에게 익숙한 그것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nation’ ‘national’ ‘nationalist’라는 단어다. 대부분의 국내 학자가 national이라는 용어를 ‘국민적 또는 민족적’ 이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이 용어는 ‘중앙집권적 연방국을 추구하는’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과 관련된 nation 은 ‘국민, 민족’이 아니라 ‘연방’을 의미하고, nationalist는 ‘민족주의자’가 아니라 ‘연방주의자’를 의미한다.
국법은행, 주법은행
미국은 연방국(federation)이다. 연방국은 상위 국가인 연방과 하위 국가인 지방이 결합한 이중 국가다. 이때 연방과 지방의 관계는 수직적인 지배·복종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인 대등 관계다. 지방은 자치 사무(자치 입법, 자치행정, 자치 사법)을 담당하고, 연방은 연방 사무(연방 입법, 연방 행정, 연방 사법)를 담당한다. 대표적인 연방 사무로는 대외 업무(외교, 국방, 통상), 대내 업무(인디언, 헌법 집행, 국내적 조정) 등이 있다. 미국의 역사를 돌아보면 초기에는 지방(주)의 권력이 우세했지만, 서부 개척 시대 이후에는 미국 헌법상 인디언과 통상 권한, 전쟁 수행권을 가지고 있었던 연방의 권력이 점차 강화됐다.
오늘날에도 미국의 은행 제도는 미국 헌법상 연방 제도를 반영해 ‘연방법에 의한 은행’과 ‘지방 법(주법)에 의한 은행’으로 구분된다. 미국의 은행법(Banking Act), 연준 법(Federal Reserve Act) 등에서는 전자를 ‘national bank’라고 부르고, 후자는 ‘state bank’라고 부른다. 일부 국내 경제학자는 전자를 국민 은행, 후자를 국가 은행이라고 번역하기도 하지만, 일본의 경제학자는 전자를 국법은행(national bank), 후자를 주법은행(state bank)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사실 전자는 연방법은행, 후자는 주법은행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보다 더 정확하지만, ‘federal reserve bank(연방준비은행)’ 등과 같은 특이한 법적 실체가 연방이라는 용어를 선점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의 번역 예를 따르는 것이 개념성 혼란을 줄여준다.
연방 정부 국법은행 설립은 위헌” 반대에도 해밀턴 손 들어준 워싱턴
1791년 미국 최초의 국법은행인 제1 미국 은행(1st Bank of the U.S.)은 연방파(현 공화당)인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에 의해 설립됐다. 해밀턴은 국법은행이 연방 정부의 권위와 영향력을 높이고, 무역과 상업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며, 국방을 강화하고 정부부채를 상환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에 제1 미국 은행의 설립을 추진했다.
하지만 해밀턴의 국법은행 설립은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과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이 이끄는 농업주의자(agrarian)와 해석주의자(constructionist)의 공격을 받았다. 여기서 농업주의자는 농업을 국가의 기간산업으로 보는 사람들로서 노예노동을 바탕으로 한 남부의 대농장주들을 의미하고, 해석주의자는 연방헌법을 엄격하게 해석해서 연방의 권력 확대를 방지하려는 지방분권주의적 법률가들을 의미한다.
제퍼슨과 매디슨은 연방헌법이 연방의회에 은행의 설립 권한을 명시적으로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은행 설립은 지방(주)의 고유 권한이라고 봤다. 따라서 연방 정부의 국법은행 설립은 위헌이고, 주법의 통제를 받지 않는 국법은행은 다수의 국민 특히 농부에게 이익을 주지 않고 북부 지역의 기업가, 은행가 등 소규모 집단에만 이익을 주기 때문에미국의 건국이념에 반한다고 주장했다.
연방의회 내에서 연방파(현 공화당)와 공화파(현 민주당) 간의 격렬한 헌법 논쟁이 벌어졌지만, 결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재무 장관 해밀턴의 손을 들어주면서 제1 미국 은행이라는 최초의 국법은행이 설립되었다. 국법은행의 출현으로 위협을 느낀 많은 지역에서 자체 은행(주법은행)을 설립하기 시작했다. 당시에 미국은 통일된 화폐가 없었다. 스페인의 남미 식민지를 통해 유입된 탈러(thaler·은화)가 유일한 전국 통화였다. 주법은행은 탈러를 수취하고 자체적으로 은행권(종이돈)을 발행했는데, 이는 때때로 다른 지역(주)에서 사용되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은 다른 주가 주법은행을 설립하도록 경쟁을 촉발했다. 오늘날 한국은행권은 종이에 불과하지만, 원래 은행권(bank note)은 소지인에게 액면가에 해당하는 귀금속(금·은)의 지급을 약속하는 보관증(예금주) 또는 어음(제삼자)이었다.
제1 미국 은행은 설립 당시 미국 연방 정부 신용의 원천이자 유일하게 특허를 받은 주간 은행(interstate bank), 즉 주의 경계를 마음대로 넘나들면서 영업을 할 수 있는 은행이었지만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중앙은행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시 사람들은 중앙은행이 필요하지도, 중앙은행을 알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제1 미국 은행은 통화정책을 수행하지도 않았고, 민간은행을 규제하지도 않았으며, 초과 지급준비금을 보유하지도 않았고, 최종 대부자(lender of last resort) 역할을 하지도 않았다. 여기서 최종 대부자란 상업은행이 극심한 유동성 위기에 처했을 때 중앙은행이 발권력을 동원해 종이돈을 빌려주는 금융 소방수의 역할을 말한다. 제1 미국 은행이 발행하는 은행권은 오늘날 한국은행권 같은 명목화폐(fiat money), 즉 종이가 아닌 자본금으로 뒷받침되는 실질 화폐였다.
매디슨 대통령의 변신과 시장 지배자의 최후
제1 미국 은행은 연방법에 의한 국법은행, 국가의 특허에 의해 설립된 특허 은행, 20년 동안 한시적으로 존재하는 기한부 은행이었다. 1811년 미국의 제4대 대통령인 매디슨 대통령은 제1 미국 은행의 특허 갱신을 지지했다. 매디슨 대통령은 공화파(현 민주당)였음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 전쟁(1803~1815)으로 인해 영국과 프랑스라는 초강대국의 군사적 갈등이 북미 대륙에서도 재현될 것을 우려했다. 매디슨은 제퍼슨과 함께 제1 미국 은행 설립을 반대하던 엄격한 해석주의자의 태도에서 벗어나 유연한 실용주의자로 탈바꿈했다. 그는 연방의회에서 헌법의 엄격한 원칙이 아니라 국제 정세의 변화에 따른 ‘편의성’과 ‘필요성’에 따를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연방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하던 공화파는 1811년 단 한 표 차이로 제1 미국 은행의 특허 갱신을 부결시켰다. 이로써 북미 지역에서는 연방법에 설립된 유일한 국법은행이 사라지게 됐다.
연방의회에서 제1 미국 은행의 갱신 여부를 논의하는 내내 주법은행은 국법은행의 특허 갱신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제1 미국 은행은 주법은행권을 대량으로 매집해 금고에 쌓아두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일시에 주법 은행권을 주법은행에 제시해 귀금속의 인출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주법은행에서 귀금속이 대량 인출되면 주법은행의 은행권 발행 능력이 제한되고, 적정한 수준의 정화(귀금속) 준비금을 유지할 수 없어서 뱅크런(bank run)에 시달리다 파산하기도 했다. 뱅크런이란 은행예금이 일시에 유출되는 것을 말한다. 제1 미국 은행은 규모의 경제를 이용하여 규모가 작은 주법은행을 지속적으로 괴롭히면서 시장 지배적 지위를 남용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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