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혈세로 대체 뭐하는 짓인지..." 중계하던 20년 베테랑 해설위원이 분노한 이유

‘초등생보다 느리다’…육상 중계 중단 선언까지, 씁쓸한 한국 육상의 현실

경남 밀양에서 열린 제54회 전국종별육상경기선수권대회에서 한국 육상의 민낯이 드러났다. 남자 대학부 3000m 장애물 결승전에서 선수들이 기록 경신보다 순위에만 집중하며 느린 레이스를 펼친 것이다.
이날 경기 1위 선수의 기록은 10분 16초 56. 이는 한국 남자 대학부 최고 기록인 8분 50초 41(2007년 황준현)보다 1분 이상 느릴 뿐 아니라, 여자 최고 기록인 9분 59초 05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같은 대회 고등부 우승자 기록(9분 40초 90)보다도 뒤처졌다.
결승전 중에는 선수들이 느린 페이스로 달리며 옆 선수와 대화하는 모습까지 포착됐다. 이를 지켜보던 윤여춘 KBS 해설위원은 “조깅도 아니고 워킹보다 조금 빠른 수준”이라며 “이런 경기는 중계할 가치가 없다”고 평가했다.

윤 위원은 “우리 대학 육상의 현실이 이렇다. 국민들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건 육상계의 부끄러운 민낯”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초등학생도 이것보다는 빠르게 뛴다. 세계무대에서는 기록 기준에 미달하면 출전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 선수들이 과연 무슨 꿈을 꾸겠는가”라고 덧붙였다.
윤여춘 위원은 1999년부터 20년 넘게 해설 및 육상 행정, 기획 등 다양한 현장 경험을 쌓아온 베테랑이다. 오랜 기간 육상을 가까이서 지켜본 그는 “당분간 대학 3000m 장애물 경기는 중계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한국 육상계의 구조적 문제를 강하게 비판했다.

현직 1위 선수 “우리 입장도 이해해달라”…박제와 비난에 반발

논란의 중심에 선 1위 선수, 한국체대 소속 정민국은 경기 종료 후 직접 SNS에 장문의 글을 올리며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그는 “저기 뛰고 있는 한국체대 정민국 본인”이라며 “이제야 육상이 인기 종목이 됐다는 걸 몸소 느낀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다른 종목은 전국체전에서 순위 싸움을 하면 그건 전략이고 전술이라면서, 왜 육상만 그런 방식이 비난받아야 하느냐”고 반문했다.

정 선수는 또 “댓글을 보니 ‘나도 뛰겠다’, ‘선수 정지시켜라’는 말들이 많던데, 원한다면 직접 연락해달라. 같이 뛰어보자”며 반발했다. 일각의 조롱 섞인 여론에 대해 “우리는 아직 어린 선수들이고, 누구에게나 소중한 자식들인데 너무 쉽게 말하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 무분별하게 박제된 화면을 언급하며 “이런 식의 공개 비난은 각인에는 좋을지 몰라도, 선수들에게는 두려움으로 남는다”고 지적했다.
정민국은 경기 운영이 느슨했던 이유에 대해 직접적으로 해명하진 않았지만, “우리도 얼마나 힘들고, 지금 일이 이렇게 커져서 얼마나 무섭겠느냐. 잘못이 있다면 당연히 책임지겠지만, 적어도 상황에 대한 이해는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요즘은 조금만 알아봐도 SNS를 통해 선수들 입장을 파악할 수 있지 않나. 그냥 비난만 하기보다는 진심으로 대화를 원한다면 언제든 응하겠다”며 글을 마무리했다.

엘리트 체육 제도에 대한 비판 여론 확산

정민국 선수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여론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발언을 계기로 한국 엘리트 체육 시스템 전반에 대한 비판이 확산됐다. “왜 학생 선수들에게 기록보다 순위를 더 중요하게 여기도록 구조화해 놓고, 막상 경기력이 떨어지면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느냐”는 지적이 나왔다.
특히 일부 네티즌은 “엘리트 육상이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만큼 결과에 대한 책임도 분명히 져야 한다”며, 현재와 같은 *‘내수형 스포츠 생태계’*의 한계를 꼬집었다. “전문 선수들끼리만 경쟁하고, 국제대회와는 동떨어진 기록에 머무는 구조에서는 발전이 없다”는 비판이 이어졌고, “차라리 학교 운동부보다는 생활체육 중심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윤여춘 해설위원 역시 현재의 포상 시스템이 잘못된 동기를 유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전국체전 금메달을 따면 억대 포상금이 주어지지만, 아시안게임이나 세계대회에서 메달을 따지 못하면 아무런 보상이 없다”며, 선수들이 기록보다 순위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원인을 설명했다. 이어 “이런 방식은 결국 육상계 전체의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국제 무대에서는 점점 도태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경고했다.
현장의 전문가와 선수, 그리고 대중이 각자의 시선에서 이번 사태를 해석하며 제기한 문제들은 단순한 ‘느린 경기’ 논란을 넘어, 한국 육상이 안고 있는 시스템 전반의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한국 육상계는 지금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기록 없는 1등이 계속 반복되는 구조를 용인할 것인지, 아니면 뼈를 깎는 자정 노력을 시작할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