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 시론] 시와 와인의 날들, 슬로베니아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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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에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에 다녀왔다.
8월에 슬로베니아에서 열리는 '시와 와인의 날들(Days of Poetry and Wine)' 시 축제에 초대받은 뒤 그동안 미루고 미루던 잇몸수술을 결심했다.
내 시를 슬로베니아어로 번역하고, 슬로베니아 시인의 시들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은 즐거웠다.
시간에 쫓겨 슬로베니아 시인들의 훌륭한 시들을 더 많이 읽지 못한 것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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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최영미 시인·이미출판사 대표)
지난 8월에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에 다녀왔다. 두 나라 체류 소감을 친구들에게 이야기했지만, 내가 거기서 느낀 것들을 다 이야기하지는 못했다. 아직도 길을 걸으며 슬로베니아를 떠올리곤 한다. 지금도 내 혀는 젤레나 오아자에서 마신 오렌지 와인의 맛을 느낀다. 여행의 끝은 귀가가 아니다. 그곳에서 보고 듣고 느꼈던 것들을 친구들에게 다 들려주기까지는 여행이 끝난 게 아니다. 앞으로 날 만나는 이들은 한동안 슬로베니아의 아름다운 시골 경치 그리고 크로아티아의 환상적인 바닷가에 대한 수다를 들어야 할 터.
마을 정원과 도서관에서 각국 시 낭송회 개최
여행을 떠나기 전 치과에서 잇몸 치료를 하고 담배를 끊었다. 담배가 잇몸에 가장 안 좋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그날부터 금연을 실행해 지금까지 넉 달 넘게 금연 중이다. 대학교 2학년 겨울에 담배에 손을 댄 이후 내 생애 몇 번 금연을 결심했지만 2개월 넘게 담배를 끊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8월에 슬로베니아에서 열리는 '시와 와인의 날들(Days of Poetry and Wine)' 시 축제에 초대받은 뒤 그동안 미루고 미루던 잇몸수술을 결심했다. 잇몸에 피가 나서 슬로베니아 와인을 못 마시면 억울하지 않나!
자그레브를 거쳐 슬로베니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로마 등 여러 제국이 거쳐간 문명의 교차로 프투이(Ptuj)에 도착했다. 고대 로마의 흔적이 남아있는 예쁘고 오래된 마을에서 하루를 잔 뒤, 첫날부터 나는 이곳 언론의 인터뷰에 응하느라 바빴다. 유럽이나 미국에서 번역 출간된 나의 책이 한 권도 없어, 내 시들을 많이 읽어보지 못한 그들은 나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 궁금한 것들이 많았다. 국제 시 낭송 축제에 처음 참가하는 나는 기자들의 질문에 성실하게 답했다. 프투이의 호텔에서 1박을 한 뒤 'Jerusalem'이라는 성스러운 이름의 시골마을로 가는 길에 시골 경치가 아름다웠다. 사람의 기척이 없는 산길, 키가 큰 옥수수밭, 길가에 나뒹구는 탐스러운 호박을 보며 나는 오래전에 잊었던 1970년대, 서울 세검정 우리 집 앞뜰에 심었던 옥수수, 원주의 할머니 집 앞에서 보았던 호박 덩굴이 생각났다.
와인을 생산하는 포도밭 옆의 게스트하우스, 젤레나 오아자(zelena oaza)에서 보낸 며칠, 4일의 낮과 저녁이 시인이 된 뒤 가장 행복한 한때였노라. 이렇게 쓰고 나니 조금 부끄럽다. 한국에서 여성 시인으로 살면서 얼마나 힘들었길래 너 이런 문장을 그냥 내보내니? 내 손가락이 내 머리보다 먼저 진실을 두드리는데 나더러 어쩌라고.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슬로베니아 시인들과 1대1로 팀을 이뤄 번역 워크숍을 마친 뒤, 번역한 시들을 들고 저녁에 인근 마을의 정원이나 도서관에서 시 낭송회를 했다. 내 시를 슬로베니아어로 번역하고, 슬로베니아 시인의 시들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은 즐거웠다. 시간에 쫓겨 슬로베니아 시인들의 훌륭한 시들을 더 많이 읽지 못한 것이 아쉽다.
슬로베니아 텔레비전 방송과 인터뷰하며 땡볕에 서있느라 더웠지만, 내 영어가 통해 기쁘고 이 늙은 몸이 잘 버텨주어 고맙다. 젤레나 오아자에서 제공하는 음식이 내 입맛에 맞고 와인이 맛있었다. 어느 날 점심에는 스튜루키(Struklji·'치즈 만두' 비슷한 음식)와 함께 모스카토를 3잔이나 마시고 취했다. 번역 감수를 해야 하는데 취해서 어쩌나. 날 놀리던 슬로베니아 시인들의 순수한 표정, 살아서 나탈리야를 다시 볼 수 있을까?(최영미 시인의 '국제 시 낭송 축제'는 다음 시론에서도 계속 이어집니다.)
※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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