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 팀 당 10경기만 했을 뿐이다. 벌써부터 곡소리가 곳곳에서 들리고 있다. 성적 부진으로 인해 경질당한 프리미어리그 감독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2일 울버햄턴은 비토르 페레이라 감독을 경질했다. 정상 참작의 여지는 없었다. 울버햄턴은 프리미어리그 10경기에서 2무 8패라는 처참한 성적을 냈다. 독보적인 최하위였다. 늦은감이 없잖아 있기도 했다. 울버햄턴 위에 있는 팀들은 모두 감독 교체를 단행했다. 울버햄턴은 결국 참다참다 못 참으며 경질을 단행한 것이었다.

올 시즌 감독 경질의 레전드는 노팅엄 포레스트가 보여주고 있다. 지난 시즌 팀을 7위로 이끈 누노 산투 감독을 쳐냈다. 에반겔로스 마리나키스 노팅엄 구단주와 마찰을 빚었다. 지난 시즌 말미 산투 감독과 경기장 내에서 격렬한 논쟁을 벌였던 마리나키스 구단주는 시즌이 시작되고 얼마 안된 9월 9일 전격적으로 산투 감독을 잘랐다.
경질 당일 마리나키스 구단주는 엔지 포스테코글루 감독을 선임했다. 포스테코글루 감독은 그리스계 호주인이다. 마리나키스 구단주은 그리스인이다. 그리스 라인이 가동됐다. 경질 당일 감독 선임이라는 사실을 비추어봤을 때 이미 포스테코글루 감독과 사전 교감이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포스테코글루 감독은 오래가지 못했다. 10월 18일 경질됐다. 노팅엄에서 8경기를 지휘하며 2무 6패. 승리는 하나도 없었다. 포스테코글루 감독은 "나 자신은 항상 2년차에는 우승을 해왔다"고 다시 강조했지만 소용없었다. 마리나키스 구단주는 한 달 하고 아흐레가 된 감독의 목을 쳤다. 이어 션 다이 감독을 데려왔다. 그는 3경기에서 1승 1무 1패를 기록하며 전임 포스테코글루 감독보다는 좋은 성적을 내고 있다.
웨스트햄도 감독을 빠르게 갈았다. 9월 27일 그레이엄 포터 감독을 자르고 바로 누누 산투 감독을 데려왔다.
올 시즌 감독 경질의 서막은 18위 노팅엄, 19위 웨스트햄 그리고 20위 울버햄턴이 울렸다.

#단기 성과
“감독의 수명은 이제 1년 남짓.”
프리미어리그에서 이런 말이 낯설지 않게 된 지 오래다. 지난 5년 동안 20개 구단 중 절반 이상이 매 시즌 감독을 바꿨다. 누군가는 부진의 책임을 졌고, 누군가는 ‘상호 합의’라는 포장 속에서 퇴장했다. 그러나 이유를 막론하고 결과는 하나였다. 빠른 해고, 그리고 더 빠른 잊힘.
2022~2023시즌은 그 잔혹사의 절정이었다. 단 한 시즌에 13명의 감독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첼시의 포터, 토트넘의 안토니오 콘테와 크리스티안 스텔리니, 리즈의 제시 마시와 하비 그라시아, 사우스햄턴의 하젠휘틀과 네이선 존스까지. 구단주들은 위기의 순간마다 해법을 ‘감독 교체’에서 찾았고, 리그는 마치 회전문처럼 돌았다.
그 끝은 뻔했다. 새 감독이 오면 잠시 팀이 반짝했다. 그러나 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경질이 팀을 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모두 알면서도, 구단은 또다시 ‘결단’이라는 이름으로 방아쇠를 당긴다. 혹자는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선수들은 자를 수 없다. 감독을 자르면서 팀 분위기를 쇄신하는 것이 '더 싸게' 먹인다."
근본적인 원인은 ‘단기성과 구조’에 있다. 거대한 중계권료와 스폰서 자금이 얽힌 프리미어리그에서 1~2위와 10위의 수입 격차는 천문학적이다. 순위표의 한 줄이 곧 매출이며, 강등은 재앙이다.
프리미어리그에서 챔피언십으로 강등되면 그 구단이 입는 재정적 손실은 매우 크다. 각각의 구단마다 구체적인 액수는 다르다. 레스터시티는 2022~2023시즌 프리미어리그에서 강등됐다. 강등 직후 재정 보고서에 기록된 순손실은 9870만 파운드에 달했다. 강등으로 인해 프리미어리그 분배금과 중계권 수입 등이 크게 줄어든 것이다. 물론 강등 구단들은 일정 기간 프리미어리그로부터 강등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한 낙하산 지급금(parachute payments)을 받지만 손실을 메우기에는 역부족이다.
구단주들의 성격이 바뀐 것도 감독 경질 러시의 또 하나의 이유이다. 예전에는 구단주들은 영국 귀족이나 부호 출신이 많았다. 워킹 클라스라고 대변되는 서민들을 위한 스포츠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하는 차원에서 구단을 운영했다. 때문에 이들은 경제나 투자의 관점보다는 팀의 역사나 인맥, 지역 내 여론에 맞춰 팀을 운영했다.
현재는 다르다. 20개팀 가운데 영국 부호나 귀족 계층이 오롯이 팀을 소유하고 있는 경우는 토트넘 정도(루이스 가문)밖에 없다. 나머지는 미국, 중동, 중국 등 해외 자본들이 들어와 운영하고 있다. 이들의 대부분은 수익을 창출하거나 브랜드 가치를 키운 후 매각해 차익을 실현하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다. 성적이 떨어진다면 수익이 감소하고 브랜드 가치도 떨어질 수 밖에 없다. 때문에 구단주들은 강등을 피하려 감독 교체라는 '충격 요법'을 쓸 수 밖에 없다.
SNS의 확산도 잔혹사에 기름을 부었다. ‘#SackHim(그를 경질하라)’ 해시태그가 트렌드에 오르면, 여론은 전광석화처럼 번진다. 팬들의 실시간 분노와 언론의 클릭 유도형 헤드라인은 구단의 판단을 서두르게 만든다. 축구는 더 이상 ‘프로젝트’가 아니라 ‘즉각적 콘텐츠’가 되었다.

#감독은 시스템의 업데이트
이런 상황에서 주목해야하는 팀이 있다. 바로 브라이턴이다.
2016~2017시즌 챔피언십에서 준우승했다. 이를 통해 2017~2018시즌 프리미어리그로 승격했다. 강등 위기를 넘어서며 프리미어리그에 계속 잔류하고 있다. 2022~2023시즌에는 6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지금도 꾸준히 프리미어리그의 중위권팀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들은 감독에 목을 메지 않는다. 자신들의 축구 철학, 축구 시스템을 갖추고 모든 것을 맞춘다. 빌드업과 전진패스, 하프 스페이스 점유를 핵심 전술 DNA로 하는 축구를 구사한다. 선수 영입도 여기에 맞춘다. 구단주 토니 블룸은 '스마트 베팅'을 현실화하고 있는 데이터 분석가 출신이다. 그는 데이터 기반 스카우팅 시스템을 구축했다. 감독의 취향이 아니라 팀 철학에 맞는 선수를 찾아내고 스카웃한다. 예를 든다면 쿠쿠레야에서 에스투피난으로, 비수만에서 카이세도, 발리바 등으로 이어지는 비슷한 스타일의 선수 승계 작업이다.
감독 교체도 이런 시스템의 연장선 상에 있다. 포터가 첼시로 떠나자 데 제르비를 영입했다. 데 제르비 역시 브라이턴의 기존 시스템을 바꾸지 않았다. 데 제르비 감독의 후임으로 파비안 휘르첼러를 데려왔다. 모두가 구단이 만든 시스템에 제대로 적응할 수 있는 감독들이었다. 감독은 시스템을 바꾸는 이가 아니라 시스템을 업데이트하는 이인 것이다.
물론 모든 팀에 이러한 모습을 강요할 수는 없다. 스타 선수들과 스타 감독을 꾸준히 수급해야 하는 빅팀들에게는 안 맞을 수 있다. 다만 브라이턴의 던지는 화두는 많은 중위권 팀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감독 교체로 엄청난 내홍을 겪고 있는 팀에게 큰 힌트가 될 수 있다.
결국 축구는 감독이 하는 것이 아니다. 시스템이 축구를 만드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한국 축구에 가장 필요한 말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