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림픽에서 시작된 악연
벌써 5년 전이다. 장소는 일본 요코하마였다. 도쿄 올림픽 오프닝 라운드가 한창이다. B조의 한국과 미국이 붙었다. (2021년 7월 31일 오후 7시)
USA의 선발은 닉 마르티네스다. 당시는 29세로, 일본 소프트뱅크 소속일 때다. 정통파 우투수다. 하지만 왼손 타자에게 강한 스타일이다. 주무기 체인지업이 뛰어나다. 피안타율이 0.088로 출중했다.
아니나 다를까. 좌타자 7명으로 구성된 우리 타선은 꽁꽁 묶였다. 5회까지 볼넷 없이 삼진만 9개를 당했다. 안타 4개로 1점을 얻은 게 고작이다. 결국 2-4로 패하고 말았다.
이날은 닉 마르티네스의 평생 자랑거리다. 올림픽에서 승리투수가 된 것이다.
다만, 딱 한 명이 골칫거리였다. 2번 타자였던 이정후다. 1회와 3회 두 타석에서 모두 안타를 허용했다. 유일한 멀티히트를 제공한 셈이다.
그 해 12월이다. 닉 마르티네스는 메이저리그 재입성에 성공했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 4년 계약(2550만 달러, 약 370억 원)을 맺었다. 그리고 2023년에는 옵트 아웃의 형태로 이적했다. 새 팀은 신시내티 레즈였다. 2년 2600만 달러(약 378억 원)의 조건이다.
어엿한 빅리그 선발 투수로 자리 잡았다. 작년에는 10승(7패)을 올렸다. 그런데 그의 앞에 꼭 거론되는 타자가 있다. 바로 올림픽에서 만났던 ‘바람의 손자’다. 그가 샌프란시스코 주민이 될 무렵이다. 유난히 자주 언급되던 멘트다.
“올림픽에서 미국의 빠른 볼 투수들과 대결해서 좋은 결과를 얻었다. 그게 MLB에 진출해서도 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작용했다.” (이정후)

가물가물한 궤적
인연은 질긴 법이다. 그 후로도 유독 각별하게 이어진다. 올 해만 벌써 2번을 만났다. 개막 2주 만에 말이다. 같은 지구도 아닌데…. 꽤 희한한 일이다.
첫 번째는 개막 시리즈 때다. 한국시간으로 3월 31일이다. 앞선 두 타석은 투수가 이겼다. 커터에 헛스윙 삼진, 그리고 체인지업이 1루수 직선타로 잡혔다.
문제는 세 번째(6회)다. 카운트 1-1에서 3구째 커터(87.7마일)가 들어온다. 한 번 당했던 공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르다. 바깥쪽 높은 코스를 그대로 돌려보낸다. 좌익수 쪽으로 2루타가 뽑힌다. 2루 주자를 불러들이는 타구였다. 이후로 SF는 2점을 추가했다. 4-0으로 승세가 굳어진 이닝이다.
그러니까 이날 둘의 대결은 3타수 1안타 1타점 1삼진으로 끝났다. 경기 결과는 자이언츠의 승리(스코어 6-3)였다.
당시 바람의 손자는 이런 말을 남겼다.
“영상을 많이 보면서 닉 마르티네스의 공을 연구했다. 올림픽 때 상대한 것도 봤는데, 그건 너무 오래전이다. 어떤 궤적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삼진 당한) 첫 타석에서도 공을 잘못 읽었다. 생각보다 덜 꺾이는 느낌으로 들어오더라.”
그러나 유능한 타자는 다르다. 오류가 오래가지 않는다. 곧바로 교정에 성공한다.
“상대해 보니까 체인지업이 확실히 좋더라. 그래서 두 타석은 타이밍이 안 맞았다. 세 번째는 눈에 익어서 좋은 타격이 됐다.”

“단단히 준비하고 들어갔다”
그리고 열흘 만이다. 재회가 이뤄졌다. 어제(한국시간 10일) 경기다.
첫 타석은 비슷하다. 체인지업(80마일)에 배트가 헛돈다. “옛다. 삼진 하나.” 그런 느낌이다.
하지만 이후는 다르다. 특히 두 번째 타석이 백미다. 카운트는 0-2로 몰린 상태다. 3구째 바로 승부구가 온다. 또다시 체인지업(77.4마일)이다.
‘오래 끌 것 뭐 있냐. 빨리 끝내자.’ 그런 도발이다.
그런데 착각이었다. 올림픽 때를 잊으면 안 된다. 열흘 전 개막 시리즈 때를 기억해야 했다. 상대 타자의 적응력, 오류를 수정하는 속도를 감안하지 못했다.
사실 공 자체는 흠잡을 데가 없다. 존에서 너무 멀다. 한참 빠지는 코스다. 그곳으로 배트가 나와주면 ‘땡큐’다. 십중팔구는 헛스윙, 잘해야 빗맞은 타구가 나올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웬걸. 그 먼 곳을 따라붙는다. 말도 안 되게 정타가 이뤄진다. 타구는 오른쪽 라인 안쪽에 떨어진다. 우익수도 어쩔 수 없다. 펜스까지 굴러가는 3루타다.
경기 후 이정후의 설명이다.
“워낙 체인지업이 좋은 투수라 준비를 단단히 하고 들어갔다. 몸이 일찍 열리면 안 되기 때문에 최대한 잡아 놓고, 늦게 반응하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제대로 된 타이밍에 맞출 수 있었다. 타구도 파울 라인을 벗어나지 않고, 안으로 들어왔다.”
◇ 이정후 VS 닉 마르티네스 일지
2021년 7월 (올림픽) = 2타수 2안타
2025년 3월 31일 = 3타수 1안타 1삼진
2025년 4월 10일 = 3타수 2안타 1삼진
합계 = 8타수 5안타, 타율 0.625

현지 언론이 한 술 더 떠
며칠 새 3안타 경기가 두 번째다. 각종 지표가 뜨겁다.
현지 언론이 한 술 더 뜬다. ESPN은 벌써 타격왕을 논한다. 가장 정교한 타자 루이스 아라에스(파드리스)와도 비교한다. “더 빠르고 출루 능력을 가진 타자다. 작년에 타석수만 적었다면(기준에서 15타석 초과) 신인왕도 노릴 수 있었을 것”이라고 칭찬한다.
야후 스포츠도 여기에 동참한다. 시즌을 가장 뜨겁게 시작한 6명으로 지목했다. “빅리그에서 충분히 통할 수 있는 타격 기술을 가졌다. 이대로 가면 올스타에 뽑힐 가능성이 크다”라는 전망이다.
MLB닷컴은 자이언츠 상승세의 원동력이라고 분석했다. 3번 타순에서 공격력의 핵심 역할을 잘하고 있다는 평가다. “샌프란시스코가 21이닝 무득점에 묶였을 때, 이정후의 적시 3루타가 터졌다. 어려운 역전승이 여기서 시작됐다”라고 전했다.
그의 가장 큰 장점은 ‘타격 범위’다. 그야말로 못 치는 공이 없다.
비단 스트라이크 존 안으로 오는 것만 치는 타자가 아니다. 벗어난 투구도 쳐내는 능력을 지녔다. 일반적으로는 치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걸 맞춰서, 인플레이 타구를 만들어낸다.
일찍이 MLB닷컴이 소개한 글이다. “이정후의 컨택 능력은 플레이트 중심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스트라이크 존을 확장하고, 칠 수 없는 공까지 때려내는 능력을 갖췄다. 그것은 곧 약점이 많지 않다는 뜻이다.”
반대로 상대에게는 최악이다. 분명히 승부구(유인구)가 제대로 들어갔다. 스윙이 끌려 나오는 순간 “됐다” 싶다. 그런데 아뿔싸. 그걸 쳐낸다. 권투로 치면 카운터 펀치를 맞는 느낌이다. 충격과 심적 타격이 몇 배나 크다.
아마 닉 마르티네스가 그런 심정일 것이다. 커터가, 혹은 체인지업이 완벽한 코스로 들어갔다. 도저히 칠 수 없는 곳이다. 하지만 그게 배트에 걸린다. 심지어 라인을 타고 흐르는 3루타가 된다.
이 정도면 심각한 위협이다. 투수라는 직업에 대한 안정성이 흔들린다. 그야말로 공포의 배드볼 히터(Bad-Ball Hitter)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