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쓰는 4할 타자? 그래도 한 달 넘게 4할을 지켜낸다

LA 다저스 SNS 캡처

너무 신나서 세리머니도 깜빡

자기 역할을 너무 잘 안다. 출연 시간이 짧다. 망설이면 안 된다는 점 말이다.

그래서 그렇다. 첫 타석부터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

오늘은 2회 초다. 1-0으로 앞선 상태다. 계속된 1사 1, 3루의 기회가 돌아왔다. (한국시간 9일, LA 다저스 - STL 카디널스)

상대는 병살로 끝내고 싶다. 그러려면 땅볼을 유도해야 한다. 하지만 어렵다. 타자는 혜성 같은 스피드를 지녔다.

배터리도 모르지 않는다. 그래서 자꾸 높은 코스를 공략한다. 짧은 플라이볼을 유도하려는 심산이다. 초구 92마일 싱커(파울), 2구째 89마일 커터(볼)가 모두 가슴 높이로 온다.

카운트 1-1에서 3구째다. 이번에는 89마일짜리 커터가 예리하다. 역시 안쪽 깊이 파고든다. 그냥 뒀으면 볼이다. 그만큼 치기는 어려운 코스였다.

여기서 스윙이 출발한다. 느낌이 좋지 않다. 어쩌지? 십중팔구는 나쁜 결과가 뻔하다. 1루수나 2루수 머리 위, 그걸 넘겨봐야 짧은 우익수 플라이 정도가 나올 타이밍이다.

그런데 웬걸. 전혀 다른 타구가 뽑힌다. 매끄럽고, 간결한 스윙 덕분이다. 오른쪽 파울 라인 위로 날렵한 빨랫줄이 널린다. 출구 속도 98.8마일, 발사각도 13도, 비행거리 197피트짜리 라인드라이브다.

타구는 아무도 건드릴 수 없다. 자유롭게 우측 담장까지 뻗는다. 그 사이에 주자 2명은 모두 넉넉하게 홈을 밟는다. 타자는 말할 것도 없다. 3루에서 멋지게 슬라이딩한다. 2타점 적시타, 스코어는 3-0이 된다.

LA 다저스 SNS 캡처

막힌 혈(穴)을 뚫은 3루타

ML 데뷔 첫 3루타다. 기분이 날아갈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세리머니를 깜빡했다.

(슬라이딩 후에) 일어서서 흙을 터는데, 덕아웃이 난리 났다. “킴, 빨리 해.” 동료들이 소리친다. 허겁지겁, 대충대충. 덕아웃을 향해…. 불펜을 향해…. 양손을 높이 들고 한 번씩 흔들어준다.

자칫 벌금을 낼 뻔한 위기(?)를 모면했다. 휴~, 한숨 돌리는 장면이다.

9번 타자다. 멀리 바다 건너온 루키다. 예의도 엄청 챙긴다. 그래서 때로는 조금 어리숙해 보이기도 한다. 그런 타자의 한 방 치고는 무게감이 대단하다.

일단 팀의 막힌 혈(穴)을 뚫는 일격이다. 다저스는 최근 들어 막힘 증상이 심각했다. 득점 찬스를 만들어 놓고, 결정적인 하나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매번 애타는 순간을 맞아야 했다.

이번 시리즈가 특히 심했다. 앞선 2경기에서 합계 19개의 안타를 쳤다. 그런데 올린 점수는 1점이 전부다. 극심한 갈증을 느꼈음은 물론이다.

그걸 신참 9번 타자가 해결해 준 셈이다. 그것도 깔끔하고, 후련한 3루타로 말이다.

덕분에 게임이 술술 풀린다. 선발 투수의 마음도 편해진다. 다름 아닌 클레이튼 커쇼(37)다. 벌써 5번째 복귀전이다. 아직 승패가 없다.

하지만 이날은 다르다. 2회의 상승세가 큰 힘을 준다. 그걸로 5회까지 1실점으로 버텼다. 안타 6개를 맞았지만, 삼진을 7개나 잡아낸다. 통산 213번째 승리 투수의 요건을 갖춘 채 마운드를 내려간다.

공격만이 아니다. 중견수 김혜성은 수비에서도 몇 차례 반짝였다. 좌중간, 우중간으로 빠질 듯한 어려운 타구를 2개나 건져내며, 커쇼를 웃게 만들었다. (최종 스코어 7-3)

LA 다저스 SNS 캡처

며칠 동안 뒤숭숭했던 상황

사실 최근 상황이 별로였다. ‘엔트리에서 빠질지도 모른다(부상자 명단, IL).’ 그런 소리가 자꾸 들린다. 타구에 맞은 발목 통증 때문이다.

데이브 로버츠 감독은 이럴 때면 부지런하다. 마이너리그에서 2명을 택시 스쿼드로 불러 올린다. 여차하면 플랜 B를 가동하겠다는 뜻이다. 다행히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

이상한 일은 또 있다. 며칠 전에 전해진 내용이다.

‘LA 다저스가 대타 자원을 찾고 있다. 좌타자가 필요해서 리스트를 검토하는 중이다.’

흔한 루머는 아닌 것 같다. 출처가 확실하다. USA투데이의 밥 나이팅게일이다. 신뢰도가 높은 기자가 SNS에 올린 내용이다. 뭔가 소스가 있다는 뜻이다.

이 내용은 몇몇 현지 매체에 인용, 보도되기도 했다. 국내에도 일부 전해졌다.

뜻밖이다. 기존 전력도 충분하다. 이미 라인업에는 막강한 좌타 라인이 포진됐다. MVP 출신인 오타니 쇼헤이와 프레디 프리먼이 버티고 있다. 그 외에도 맥스 먼시, 토미 에드먼이 좌타석을 채워준다.

대체 자원도 여럿이다. 제임스 아웃맨, 마이클 콘포토가 준비 중이다. 여기에 달튼 러싱도 있다. 어디 그뿐인가. 막강한 4할 타자도 초롱초롱한 눈빛을 빛낸다. 이제나 저제나. 내보내 주기만 기다리는 눈빛이다.

LA 다저스 SNS 캡처

허샤이저 해설의 농담 반, 진담 반

우리끼리만 애태우는 게 아니다. 현지의 감정도 다르지 않다.

어제(한국시간 8일) 경기였다. 초반이 무득점으로 이어진다. (LA 다저스-STL 카디널스)

중계진 입장에서는 싱겁다. 뭔가 슬슬 입을 풀어야 할 타이밍이다. 스포츠넷 LA의 노련한 해설자가 시동을 건다.

오렐 허샤이저 “테드 윌리엄스가 나오는군요.”

갑자기? 테드 윌리엄스(마지막 4할 타자)? 캐스터가 웃느라고 멘트를 못 친다.

스티븐 넬슨 “ㅎㅎㅎㅎ. 혜성 킴에게 초구는 스트라이크.”

허샤이저 “보세요. 지금 (타율이) 0.404를 치고 있잖아요. 시즌이 제법 많이 진행됐는데 말이죠.”

넬슨 “오늘이 25번째 게임입니다. 그러니까 애런 저지 (4할) 얘기는 이제 그만하고, 혜성의 4할 얘기나 더 하자는 말이죠?”

허샤이저 “혜성은 더 많은 타석에 서야 해요. 그는 이 레벨에서 플레이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어요. 그걸 이미 보여줬잖아요.”

김혜성이 3경기 만에 선발로 나선 날이다. 그 첫 타석을 보면서 중계석에서 이뤄진 대화다.

스포츠넷 LA는 다저스를 전담하는 곳이다. 둘의 관계는 파트너에 가깝다. 그러니까 주로 좋은 얘기를 많이 한다. 웬만해서는 비판적이지 않다.

허샤이저 역시 마찬가지다. 부드럽고, 유머러스한 해설을 한다. 감독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이런 식으로 속내를 드러낸 적은 거의 없다. 그만큼 비상식적이라는 얘기다.

LA 다저스 SNS 캡처

대단한 감독이다. 4할 타자를 아무렇지 않게 방치한다. 2~3게임 연속으로 벤치에 앉혀 놓는다. 어쩌다 내보내도 중간에 빼 버린다. 홈런을 쳐도, 결정적인 적시타를 쳐도 마찬가지다.

오늘(9일)도 그랬다. 3번째 타석에서는 우타자(키케 에르난데스)를 대타로 기용한다. 좌투수로 바뀐 직후다.

그런데 더 대단한 일이 있다. 저런 식이라면 보통 흔들린다. 거친 현장 용어를 쓰자면 ‘맛이 간다.’ 제 아무리 좋던 타격감도 위축되기 마련이다. 4할은커녕, 3할도 지키기 어렵게 된다.

하지만 그는 다르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기 일을 열심히 한다. 그리고 악착같이 지켜낸다.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여전히 무너지지 않는다. 오히려 조금씩 올라간다.

허샤이저가 감탄할 때가 0.404였다. 1게임만 못 치면, 평범한(?) 3할대가 된다. 그런데 이틀 동안 3안타를 쳐낸다. 그러면서 숫자를 0.414로 올려놓는다. 그게 더 신기하고, 장하고, 대견할 따름이다.

LA 다저스 SNS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