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밥이 사라진다…아니 달라진다

이유진 기자 2024. 10. 1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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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을 대부분 집에서 해먹는다” 59%… ‘집밥’이라는 일상 과제가 점점 흐릿해지고 있다.

1970~1980년대에 성장한 세대는 저녁이 되면 온 동네가 지지고 볶는 냄새로 가득 찼던 그 시절을 기억한다. ‘밥 짓는 냄새’는 놀이터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에게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라는 무언의 시그널이었다. 그런 ‘삼시 세끼’는 이제 예능 프로그램에서나 볼 수 있는 향수가 된 것은 아닐까.

미혼자 10명 중 6명이 ‘솔로’라지만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늘 높은 인기와 화제성을 얻는다. 저출생 국가지만 육아 예능 프로그램은 스테디셀러가 됐다. 인생의 필수 과제를 영상 콘텐츠로 충족한다는 말은 더는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집밥’이라는 일상 과제가 점점 흐릿해지고 있다.

직접 요리하기를 포기한 현대인은 스타들이 게임 캐릭터처럼 불을 지펴 끼니를 챙기는 <삼시 세끼>와 프로 셰프들이 쉼 없이 아름다운 요리를 차려내는 <흑백요리사>를 반찬이자 밥친구 삼는다. 전자레인지에 데운 간편식을 앞에 두고.

“밥 해 먹고 살려다 내가 쓰러진다”

관측 이래 가장 더웠다는 지난여름 김영란씨(54)는 ‘집밥을 하지 않겠다’며 앞치마를 벗어던졌다. 에어컨 바람도 잘 들지 않는 주방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혼자 매끼 식사를 준비하다 보니 요즘 말로 ‘현타’가 온 것이다. 그는 가족들과 상의 끝에 기온이 30도가 넘는 날은 가스레인지를 사용하지 않고 각자 알아서 끼니를 챙기는 날로 정했다.

“올여름은 유독 힘들었어요. 불 앞에서 지지고 볶고 있다 보면 뭐 하는 짓인가 싶었죠. 남편이 외식을 싫어해서 연중무휴로 식사를 준비하는데… 아시죠? 내가 요리하면 냄새부터 질리는 거. 앞으로 여름이 계속 더워진다잖아요. 이러다 내가 쓰러진다 싶어 너무 더운 날은 배달음식이나 간단한 밀키트로 저녁을 해결하기로 했어요.”

1인 가구인 서진영씨(29)는 아예 큰 도마를 인덕션 위에 얹어 가린 채 생활한다. 처음 독립했을 때는 해방감으로 이런저런 요리에 도전해봤지만 ‘해 먹는 것’보다 ‘사 먹는 것’이 훨씬 경제적임을 깨닫고 그만두었다. 퇴근 후 지친 몸으로는 요리는커녕 식재료 관리도 쉽지 않았다.

“냉장 보관을 해도 대파는 며칠 만에 마르거나 물러터져요. 장보기, 재료 손질, 보관, 뒷정리, 음식물 쓰레기 처리, 주방 주변 청소까지…. 요리를 해보면 체감상 가사 노동이 3배 이상 늘어나요. 본인이 이런 일에 능숙하거나 시간과 체력적 여유가 있다면 집밥이 좋긴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괜찮은 반찬가게를 통해서 간편하게 해결하는 것이 모든 면에서 나아요.”

그는 김치찌개 한 냄비를 끓인다 치자고 했다. 김치는 늘 갖추고 있더라도 돼지고기, 국물용 멸치, 마늘, 두부, 파, 간장, 설탕 정도는 있어야 찌개의 기본 맛을 낼 수 있다. 김치찌개를 끓이기 위해 대형마트 온라인몰 최저가 순(홈플러스·10월14일 기준)으로 장을 보면 찌개용 돼지고기 200g(3180원), 국물용 멸치 180g(3990원), 한 끼 깐마늘(990원), 두부 300g(1290원), 한 끼 대파(990원), 간장 500㎖(3480원), 설탕 400g(1880원)까지 총 1만5800원이 든다.

어머니의 정성이었던 집밥은 경제적 가성비, 노동력의 가치 변화로 그 의미도, 형태도 달라지고 있다.

간편식은 어떨까? 마트에서 판매 중인 생고기에 양념, 마늘, 채소가 포함되어 물만 넣으면 만들 수 있는 밀키트가 9900원이다. 조리된 레토르트 김치찌개는 한 봉지에 5000원대에서 7000원대로 살 수 있다. 서씨는 “지난달은 추석 명절이 끼어 있어 식자재가 비싼 것을 감안했지만 왜 지금도 비싼지 모르겠다”며 “치솟는 장바구니 물가에 집밥 만들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집밥을 포기한 서씨는 인덕션 대신 간편식을 조리할 수 있는 전자레인지와 에어프라이어만 사용한다. 두 가지만 있어도 시판용 간편식이나 가공품을 이용해 밥과 라면, 각종 찌개, 바삭한 튀김까지 가능해 식단 결핍은 느낄 수 없다고 했다.

시청자 의뢰인이 구하는 부동산 매물을 직접 찾아서 보여주는 MBC의 <구해줘! 홈즈>에는 싱크대에 요리용 가스레인지나 전열 기구를 없앴거나, 조리 시 발생하는 냄새를 빨아들이는 후드를 설치하지 않은 집이 몇 차례 소개되기도 했다. 밥 짓는 기능이 사라지고 카페처럼 변신한 주거 공간은 요즘 인테리어 트렌드에서 낯선 풍경이 아니다.

집밥이 사라지고 있는 현실은 데이터로도 체감할 수 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2023년 식품소비행태 조사 결과 ‘집에서 먹는 음식은 대부분 집에서 직접 만들어 먹는다’는 응답 비율이 2017년 89%에서 점점 떨어져 2023년에는 59%가 됐다. 더불어 쌀 소비량도 줄고 있다. 한국쌀가공식품협회 조사에 따르면 ‘밥용’ 쌀의 연간 1인당 소비량이 2011년 71㎏에서 2023년 56.4㎏으로 20.8%포인트가 확 줄었다. 대신 가공용 쌀 소비량은 62만t으로 역대 최고율보다 8.8% 높아졌다. 소비량이 증가한 품목을 보면 떡볶이를 포함한 떡류, 도시락, 즉석밥, 장류 등 쌀을 가공 형태로 먹는 비율이 점점 늘고 있다. 한국쌀가공식품협회 측은 “집밥을 직접 만들어 먹는 비율이 높았던 고령 가구에서도 그 비중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며 “1인 가구 증가·초고령화·맞벌이 가구의 증가에 따라 ‘식(食)의 외부화’ 비중은 더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고 전했다.

자고로 집밥이란 갖은양념으로 조물조물 무친 제철 나물 3종과 집된장으로 보글보글 끓인 찌개 정도는 있어야 마땅히 인정받을 수 있었다.

한국인에게 집밥이란?

한국인에게 집밥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다. 뱃속은 물론 마음마저 든든하게 채워주는 마법 같은 것으로 통한다. 누군가는 ‘행복의 원천’이라고 하고, 거룩한 표현을 더 보태어 ‘영혼의 리셋버튼’이라고도 정의한다. 이쯤 되면 따뜻한 집밥의 기억이 한국인의 DNA에 새겨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집밥은 누군가의 노동과 희생 위에서 지어진다. 지난해 결혼정보업체(온리-유·비에나래)가 재혼 희망자 51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설문에 따르면 재혼 맞선에서 상대방의 호감을 급락시키는 표현으로 남성은 ‘오마카세’(27.0%)를, 여성은 ‘집밥’(31.7%)을 꼽았다. 남성들은 오마카세로 대표되는 비싼 외식을 부담스러워했으며, 여성들은 ‘집밥’으로 함축된 가사 노동 전반에 대한 부담감을 드러냈다. 여러 조건 중 ‘밥’이 재혼의 장벽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집밥은 여성의 가정 내 성 역할 고정관념을 대변하는 말이기도 한다. ‘엄마의 손맛’이라는 표현은 따뜻하고 정성 가득한 집밥을 의미하는 동시에 엄마의 헌신을 끌어온다. 과거 ‘집밥의 정의’ 또한 꽤 까다로운 조건을 갖춰야 했다.

가톨릭대 소비자학과 김경자 교수는 “과거 집밥은 신선하고 좋은 식자재를 사용해야 하고, 인공조미료나 첨가제는 들어가면 안 됐다”며 “무엇보다 ‘정성’이 들어가야 집밥이 완성되기에 음식을 만드는 데에 상당한 노력과 시간을 들여야 했다”고 말했다. “가령, 아무리 맛있고 몸에 좋은 음식이라도 짧은 시간에 빨리 만들 수 있다면 그건 ‘그리운 집밥’에 해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스팸에 계란프라이를 찬으로 내놓는 것은 과거에는 집밥으로 불릴 수 없었다. 갖은양념으로 조물조물 무친 제철 나물 3종과 집된장으로 보글보글 끓인 찌개 정도는 있어야 마땅히 ‘집밥’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간편식 ‘삼치 스테이크&닭갈비 세트’와 ‘콩비지 김치덮밥 소스 세트’로 차린 집밥 밥상의 모습. 현대그린푸드 그리팅

‘집에서 먹으면 집밥’…의미도 새로 쓰인다

요즘은 식사에서도 가성비와 간편함이 최고의 미덕이다. 번거롭지 않으면서 설거짓거리도 줄일 수 있는 ‘원팬 레시피’와 ‘불 없이’ 한 끼를 만들어내는 샐러드 등 시간과 비용을 최소화하는 식단이 20~30대에게 선호된다. 집밥의 정의도 달라졌다. 어떤 음식이든 ‘집에서 먹으면’ 최소한 집밥의 카테고리에 들 수 있다.

1인 가구 뉴스레터 ‘혼삶레터’와 리서치 플랫폼 ‘픽플리’가 전국 20~40대 1인 가구를 대상으로 음식 소비 습관에 대한 설문 조사를 하며 ‘집밥의 정의’를 물었다. 다수의 응답자가 ‘통조림햄, 참치캔, 즉석밥 등 가공식품을 활용(43.8%)’하는 것까지 집밥으로 여겼다. 배달음식을 비조리 상태로 주문해 집에서 조리하면 집밥(1.7%)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이런 생각은 나이가 어릴수록 강했다.

김 교수는 “조리 과정에서 뭐가 들어갔는지 모르는 데다가 상업적 마인드가 담긴 외식을 하는 것보다는 가공식품이라도 포장을 벗기고 데우고 그릇에 담는 과정에 최소한의 정성이 담기는 것이 낫다는 심리가 집밥의 정의를 바꾸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는 최근 간편식 업체들이 집밥이나 건강식의 느낌을 살린 식품을 개발하고 마케팅에 주력하는 이유다. 사라지고 있는 집밥의 공백을 자사 제품으로 채워 넣겠다는 의지다. 간편·즉석밥 시장 규모도 커지고 있다. 시장조사회사 닐슨IQ코리아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즉석밥 시장 규모는 5297억원으로 추산된다. 코로나19 유행 전인 2018년(4279억원)보다 23.8% 커졌다.

‘더미식’ 브랜드로 잡곡 즉석밥을 출시한 하림의 한 관계자는 “고객의 건강 밥 요구에 발맞춰 백미뿐만 아니라 현미밥, 귀리쌀밥, 흑미밥, 보리쌀밥 등을 출시하고 있다”며 “선택권이 넓어지면서 소비량도 더욱 증가하고 있다”고 밝혔다.

배우 류수영은 본업이 아닌 실용 집밥 레시피를 알리는 집밥 전도사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프라이팬 하나로 뚝딱 만드는 ‘원팬 잡채’를 비롯해 일상적인 재료를 이용해 손쉽게 따라 할 수 있는 30가지 이상의 집밥 레시피를 소개하는 관련 유튜브 채널은 누적 조회 수 1억뷰 이상을 달성했다. 얼마 전 미국 스탠퍼드대 강연자로 나선 그는 “요리하는 사람도, 먹는 사람도 모두 행복한 것이 좋은 요리”라며 “집에서 하는 요리는 하는 사람도 쉽고 간편하게 할 수 있고, 먹는 사람도 맛있게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만드는 사람의 과도한 노동력과 희생이 들어가야만 하는 요리는 좋은 집밥이 아니다. 집밥의 의미가 새로 쓰이고 있다.

이유진 기자 882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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