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터 창간 19주년 특별기획
팬데믹 기간에 폭증했던 유동성이 위축되며 기업들은 '선택과 집중'이라는 새로운 과제에 직면했습니다. 더 이상의 무분별한 외형 확장이 통하지 않는 시대에 SK를 필두로 전 산업계에 확산되는 '리밸런싱'의 현주소를 진단하고 기업들의 생존전략을 분석합니다.

SK그룹의 반도체 소재 계열사인 SK엔펄스가 사업부를 떼어내 매각하는 카브아웃(분리매각) 형태의 딜을 잇따라 추진하고 있다. 이는 모회사 SKC의 반도체 소재 사업 전략과 맞닿아 있다. SKC는 완성된 칩을 패키징·테스트하는 후공정에 필요한 반도체 부품·소재 사업으로 무게중심을 옮기고 있다. 이에 따라 대체로 전공정에 필요한 SK엔펄스의 제품군은 상대적으로 집중도가 떨어진다. 이에 SK엔펄스에 잔존한 사업부인 CMP슬러리 역시 매각 수순을 밟을 가능성이 높다고 점쳐진다.
전공정 사업 황금기 있었지만 결국 쇠퇴
현재 SK그룹에서 SK엔펄스의 입지는 좁아진 상태다. SK엔펄스는 반도체·디스플레이 공정용 파인세라믹 부품 전문 업체인 SKC솔믹스가 전신이다.
파인세라믹은 웨이퍼 위에 회로를 형성하는 전단계에서 고온, 화학반응 같은 극한환경을 잘 견딜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다만 국산화가 어려워 연구개발(R&D)에 성공한 일부 부품사들만 공급이 가능했고, 그중 SKC솔믹스가 대표적이었다. 회사는 SK하이닉스에 납품하며 그룹 반도체 소재 포트폴리오의 중요한 축을 담당했다.
SK엔펄스는 2016년 비주력사업이던 태양광 부문을 웅진에너지에 매각하며 본격적인 리밸런싱에 나섰다. 반도체 소재 사업에 좀 더 집중한다는 이유로 태양광사업부도 정리했다.
실제로 2020년 SKC가 직접 하던 CMP패드·슬러리 사업과 블랭크마스크 사업 관련 자산을 현물출자 방식으로 넘겨받아 흩어졌던 전 처리 공정 반도체 핵심 소재들을 SK엔펄스 산하에 뒀다. 사업부 양수 직전 SK엔펄스의 자산 규모는 2000억원대였지만 이후 5000억원에 육박하게 됐다.
그러나 경쟁력 강화 기조는 오래가지 못했다. SK엔펄스는 고부가 소재 부품 사업에 주력하기 위해 2023년 중국 웨트케미컬 사업을 매각한 데 이어 이듬해에는 파인세라믹 사업을 사모펀드인 한앤컴퍼니에 넘겼다.
SKC 리밸런싱 의지에 잇따라 자산 매각
앞선 사례와 달리 파인세라믹 매각은 SK엔펄스만 놓고 보면 매각 유인이 크지 않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당시 파인세라믹 부문은 SK엔펄스 전체 매출의 70%를 책임지는 핵심 사업부인 데다 매각과 동시에 SK엔펄스의 자산 규모가 사실상 반토막이 났기 때문이다. 또 부채비율도 100%대로 비교적 안정적이었다느 점에서 매각 유인은 외부 요인에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된다.
이후로도 SK엔펄스의 자산 매각은 지속됐다. 지난해에는 해외 자회사 SKC-ENF일렉트로닉머리티얼스, SKC솔믹스 홍콩 등을 정리했으며 올 4월에는 CMP패드사업부를 파인세라믹 딜로 인연을 맺은 한앤코에 팔았다.
시장에서는 최근 블랭크마스크사업부가 정리 수순을 밟는 것도 파인세라믹 매각의 연장선이라고 본다.
SK엔펄스는 연말 블랭크마스크사업부를 떼어내 신설회사인 루미나마스크를 설립할 예정이다. 회사 측은 지난해 말부터 이 사업부를 정리하기 위해 물밑에서 여러 원매자와 접촉했으며, 중국 태양광 소재 회사가 적극적으로 의사를 타진해 결국 협상에 이르게 됐다.
블랭크마스크는 웨이퍼 위에 반도체 회로를 패터닝하는 노광 공정에 사용되는 포토마스크의 핵심 소재로 역시 전처리 과정에 쓰인다. 이에 반도체 소재 사업을 후공정 중심으로 재편하려는 SKC의 의지가 반영됐다는 의견이 제기된다. 재계 관계자는 "SKC는 몇년 전부터 후공정 중심으로 반도체 소재 사업을 재편하고 있다"고 말했다.
반도체 후공정은 웨이퍼에서 완성된 칩을 패키징·테스트하는 단계로 전통적인 모바일·PC 칩 고객 외에도 인공지능(AI) 반도체 수요가 늘면서 고객사 풀이 다양해지고 있다.
SKC는 2023년 반도체 테스트 소켓을 국내 최초로 개발·양산한 ISC를 인수했다. ISC는 번인 소켓, 테스트 소켓(실리콘러버 소켓, 포고 소켓), 테스트솔루션(테스트 장비) 등을 종합 패키지 형태로 글로벌 팹리스(반도체설계회사), 종합반도체회사(IDM), 테스트·패키징(OSAT) 기업,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 빅테크 등에 공급하고 있다. SKC는 반도체 소재 사업의 무게중심으로 ISC로 옮기고 있으며, 같은 맥락에서 올 초 SK엔펄스의 후공정 관련 장비 업체인 아이세미와 테크드림을 ISC 산하에 뒀다.

CMP슬러리 매각 수순 밟을 듯
블랭크마스크사업부 분할로 400억원 규모의 신규 시설을 포함해 총 519억원의 자산이 신설회사로 넘어간다. 올 상반기 SK엔펄스의 총자산이 4800억원인 점을 감안하면 약 10%의 자산이 줄어드는 셈이다. 회계상 사업부 분할에 따른 영향은 크지 않다. 다만 기존 자산의 80%가 현금 및 현금성자산임을 고려하면 사실상 사업회사로서의 수명은 끝난 것으로 평가된다.
시장에서는 남은 CMP슬러리 부문 역시 정리 수순을 밟을 것으로 보고 있다. CMP슬러리는 반도체 웨이퍼 표면을 물리, 화학적으로 연마해 평탄하게 만드는 데 쓰이는 소재다.
블랭크마스크 사업 정리 이후 680억원의 현금을 확보하지만 CMP슬러리 사업에 재투자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시장의 중론이다. 업계 관계자는 "매각을 포함해 CMP슬러리 사업과 관련한 여러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김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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