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 병사 3만명이 갑자기 왜 탈영했을까?

[비시 체제 : 협력과 부역의 일대기]

언론, 정부와 손을 잡다

'빨리 끝날 것이다. 아니, 빨리 끝내겠다. 여름이 가고, 가을도 가고 겨울이 오기 전까지 전쟁은 끝난다. 그럼 크리스마스는 집에서 가족들과 오붓하게 보낼 수 있다.'

1914년 6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가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계 과격 민족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손에 암살되자 유럽 강대국들은 일제히 열차 시간표처럼 그동안 나라들 사이에 오고 간 비밀 조약과 협약에 의해 전쟁으로 가는 급행열차에 올라탔다. 프랑스도 예외가 아니었다.

다만 모든 나라들은 전쟁이 금방 끝날 거라 확신했다. 자국의 우수한 국방력이라면 상대를 쉽게 제압하고 원하는 바를 금세 이룰 수 있으리라 여겼다. 때문에 1914년 7월 전쟁이 일어났을 당시 영국, 독일 제국, 프랑스 등 많은 나라들의 젊은이들은 활짝 웃는 얼굴로 마치 소풍가듯이 전장으로 향하는 열차에 올랐다. 하지만 이들은 알지 못했다. 무려 4년이나 전쟁이 이어지리란 사실을.

길어지는 전쟁 속에서 국가는 더 많은 젊은이들을 전선으로 보내야 했다. 그래야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실제로 1차대전 서부전선을 이루는 주된 전장은 다 프랑스–벨기에 영토 안에 자리했다). 비만 오면 참호는 분뇨가 뒤섞인 물로 가득 찬다거나 젖은 발을 관리하지 않았다간 참호족으로 발이 썩을 수도 있다는 말. 5m 전진을 위해 몇 백, 몇 천 명이 죽을 수도 있다는 말. 빗발치는 포탄으로 인해 충격을 받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될 수 있다는, 그러니까 언론이 전쟁의 실상을 제대로 보도하는 일은 국가는 결코 원하지 않았다. 즉 국가는 진실이 아닌, 필요한 논리를 공급하는 언론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프랑스가 내세운 수단은 바로 '검열'이었다. 1914년 8월 2일부터 5일에 걸친 조치에 의해 군 당국은 국익에 해로운 매체 발간을 금지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게 된다. 더불어 언론과의 관계를 조직하고 유지할 책임 역시 받게 된다. 만약 언론이 군 당국이나 프랑스 정부의 방침을 따르지 않는다면 발간이 일시적으로 중단되거나 심할 경우엔 준영구적으로 언론 활동이 제약됨은 물론이었다.

이는 영국과 독일 제국 등 당시 1차대전에 참전한 국가들 모두에서 발견할 수 있는 조치였으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패배의 치욕을 씻어야 된다는 사명을 갖고 있는 프랑스 공화국 입장에선 전쟁 승리를 위해 당연히 취해야 할 조치라고 믿는 경향이 강했다. 이는 전쟁 앞에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가리지 않고 빠르게 단결했던 당시 프랑스 사회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1차대전이 일어난 직후 프랑스 언론의 구체적 보도는 어땠을까. ‘당연히’ 정부와 군 당국의 의중을 반영하여 프랑스 육군의 용맹함을 부각하는 기사나 삽화가 지면에 등장했으며 대표적으로 《릴뤼스트라시옹(L’Illustration)》제3734호(1914년 9월 26일 발행)에 삽화가 조르주 스코트(Georges Scott)가 그린 착검한 프랑스군의 모습은 대표적 사례다.

또 독일 제국 육군의 포격으로 처참하게 무너진 프랑스 마을의 모습을 찍어 보도함으로써 적들이 조국의 영토를 유린하고 있다는 구체적 참상을 국민들에게 전했다. 특히 이른바 마른강의 기적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 육군의 처절한 방어로 독일군이 후퇴하자 《르 프티 파리지앵(Le Petit Parisien)》은 1914년 9월 11일 보도를 통해 ‘적들의 후퇴가 두드러진다’고 밝히며 정부로부터 타전된 소식을 인용하며 프랑스와 영국의 연합군이 퇴각하는 적들을 쫓고 있다는 사실을 다룬다. 이처럼 언론은 정부의 의도대로 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조국이 어려움에 처해도 결국엔 승리한다는 인식을 심어주고자 노력했다.

릴뤼스트라시옹(L’Illustration)의 제3734호(1914.09.26.) 삽화
르 프티 파리지앵(Le Petit Parisien) 의 1914.09.11자.

초유의 항명사태 : 하지만 언론은 진실에 눈을 감았다

전쟁이 벌어지면 전선에 있는 장교나 병사들이 후방으로 보내는 서신 등은 보안 위반이나 전해지면 안 되는 민감한 정보가 담겨 있지 않은지 검열을 거친 뒤 전달된다. 특히 1917년 프랑스 육군에선 더욱 그랬을 것이다. 1917년 4월 이른바 ‘니벨 공세’가 막대한 인명 피해만 남긴 채 수포로 돌아가자 제5사단을 대표로 전선을 이탈하는 부대가 급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개전 초기 공격 정신을 강조하며 (비록 전쟁 중엔 이를 폐기하긴 했지만) 유럽 어느 나라의 군대보다 급진적인 공격주의 교리까지 지니고 있던 프랑스에서 일어난 항명사태는 모두를 놀라게 만들기 충분했다. 규모 또한 상상을 초월했다. 전선을 이탈한 병력의 숫자가 무려 3만 명에 이르렀다. 1917년 6월 8일부터 총 3,427회에 걸쳐 이뤄진 군사재판에서 2,878건의 중노동형, 629건의 사형이 선고되었고 실제로 43건의 사형이 집행됐다. 그 여파로 니벨이 총사령관의 직책에서 경질되고 필리프 페탱(Philippe Pétain)이 소방수 역할, 다시 말해 새로운 총사령관으로 임명된다.

페탱은 1916년에 벌어진 베르됭 전투 당시 무의미한 병력 소모를 줄이고 병사들의 고충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병력을 수습했던 지휘관이었다. 말 그대로 부대관리의 기본에 충실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대외적으로 말한 항명사태의 주된 원인은 상식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페탱은 <전시 프랑스 사기의 위기(Une crise morale de la nation française en guerre)>란 입장문을 통해 ‘군대를 끊임없이 흔들어대는 평화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의 선동, 전선에서의 물리적인 어려움, 군 지도부의 전술적 과신’을 항명사태를 불러온 세 가지 요인으로 밝혔다.

그는 사회주의에 빠진 ‘일부’ 병사들을 제외한 대부분은 선한 사람들이었으나 긴 전쟁으로 지쳐 쉽게 꾐에 빠질 수 있는 상태였다는 견해도 덧붙였다. 그러나 후대의 역사가들은 여기에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는다. 1917년 항명사태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프랑스군 수뇌부가 너무나도 무능했다”는 것에 있다. 페드론치니(Guy Pedroncini)가 말한 것처럼 당시 군 수뇌부는 총력전과 산업화된 전쟁의 양상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언론은 먼저 이를 국민들에게 알려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가에 대한 여론을 환기해야 했다.

그러나 언론은 항명사태와 군수뇌부의 무능에 눈을 감았다. ‘병사들의 사기 회복 노력’과 같은 애매모호한 말들만 지면에 등장할 뿐이었다. 이는 정부의 지침과도 무관하지 않다. 1917년에 접어들면서 전쟁에 지친 국민들 사이에 전쟁을 빨리 끝내야 된다는 여론이 고조되자 프랑스 당국은 선전 활동과 검열을 한층 더 강화하며 진실을 가리고 전쟁 열기를 유지시키는 활동에 열을 올렸다.

“정치인들과 반국가세력이 열심히 전쟁을 하는 군인들의 등에 칼을 꽂았다"는 선전을 전파했던 독일 제국의 군부나 극우 정치인들 정도까진 아니지만 언론과 정부가 나서 전선의 진실을 가렸다는 본질에선 같다. 결국 그들은 알리고 싶은 것만 알리고, 감추고 싶은 건 감춰 프랑스 사회가 진실을 견디고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을 잃게 만들었다.

언론은 전쟁의 상처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전쟁은 잘 끝내야 한다. 특히 대부분의 전투가 자국 영토 안에서 벌어진 프랑스의 경우엔 특히 그러했다. 격전지였던 베르됭은 폐허가 되어 불발탄도 제대로 수거하기 힘들었으며(지금도 베르됭 지역 일부에선 불발탄이 제거되지 않아 위험한 상태로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고 있다) 참전용사들은 제대로 된 보상이나 사회 복귀를 지원받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이들은 포탄충격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은 물론이고 끔찍했던 참호전, 항명사태, 죽어나간 전우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쓰라린 기억을 안고 있었다. 언론이라면 마땅히 이들의 아픔을 다루고 치유할 방법을 찾아 여러 정책이나 활동 등을 사회에 제안하는 활동을 해야 옳았다.

게다가 언론은 이미 실질적인 영향력을 정치인들에게 발휘하고 있었다. 전시에 언론은 검열을 받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정치인들과 관계를 구축하는 일에 성공했다. 주요 정치인들은 사주들에게 재정적인 혜택을 제공하여 국민들로부터 정치적 지지를 이끌어내고자 했다. 정치가 언론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이다. 만약 언론이 정계와 올바른 관계로 사회를 변화시키고 싶었다면 행동할 수 있는 폭이 일정 부분 보장되어 있다는 얘기와 같았다.

하지만 그런 가치를 보여주고자 하는 언론은 매우 드물었다. 오히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호전적인 말들로 독일에 대한 증오심을 부추겼다. 1920년 3월 19일에 발행된 《르 마탱(Le matin)》 첫 페이지를 보면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일어나는 쿠데타 등 움직임을 보도하며 독일이 이전과 같은 호전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슬그머니 알려주는 인상을 준다. 독일은 이미 장기간 전쟁을 일으킬 능력을 잃었음에도 프랑스 언론들은 국민들에게 국가가 적을 상대로 대결하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싶었던 걸까.

전쟁에 나간 남성들을 대신해 각종 산업 현장에서 큰 역할을 담당한 변화된 여성의 모습에 대한 담론도 언론은 효과적으로 보도하는 일에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여성 참정권 요구가 등장하고 경제적 자립과 더불어 사회적 지위 향상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지면에 등장하긴 했으나 이를 전체적인 움직임이라 보기 어렵다. 프랑스는 전후 과거 전통을 좇아야 한다는 명분으로 여성들에게 다시 가정으로 돌아갈 것을 강요했으며 일부 언론은 이런 정부의 입장을 충실히 반영했다.

프랑스 사회가 이미 화학적 변화를 거친 상태였음에도 언론은 현실을 외면했다. 참전용사에 대한 처우 개선, 적개심을 누그러뜨리고 국가 전체에 새로운 대외관계를 주문하는 일, 여성의 사회 참여 확대라는 바뀐 사회상에 대한 수용. 프랑스 언론은 어려운 과제들을 책임 있게 수행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부족했다. 하지만 언론의 부작위라는 상황보다 더 심각한, ‘적극적 작위’에 따른 문제가 이후 프랑스 언론에 나타나게 된다. ③편에 계속됩니다.


※ 필자인 추성목은 평범한 직장인으로, 스스로를 듣고 읽고 쓰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중국어를 전공하고 졸업 후 취업했다. 하지만 언젠가 한 번은 프랑스어를 제대로 배우고 싶다는 마음에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프랑스언어문화학과에 입학해 ‘제2의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비시 체제와 레지스탕스, 쇼아를 공부하며 글을 쓰고 싶다는 목표. 또 중국과 중앙유라시아, 중동 등 지역을 다룬 프랑스어권의 저서나 자료들을 번역해 소개하겠다는 목표. 이 둘을 마음에 지니며 공부를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