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우크라 점령지 병합 '초읽기'.. 푸틴 "우크라인 구하고 싶다" 궤변

김표향 2022. 9. 28.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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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감시 아래 투표, 투표함도 투명
예상대로 초기 개표 결과, 압도적 찬성
속전속결 병합, '대테러작전' 변경 전망
러시아군이 점령한 우크라이나 마리우폴의 실외 투표소에서 25일 주민들이 러시아 귀속 여부를 묻는 투표에 참여하고 있다. 투표함이 투명해서 비밀 투표를 하기는 아예 불가능하다. 마리우폴=EPA 연합뉴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점령지에서 실시한 강제 병합 투표가 27일(현지시간) 종료되면서 우크라이나 전쟁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불 보듯 뻔한 투표 결과를 바탕으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영토 편입 절차를 속전속결로 마무리 지은 뒤 한층 잔혹한 공격을 퍼부을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핵 전쟁’이라는 파멸적 상황으로 치달을 위험도 커졌다.


불보듯 뻔한 결과… 러시아는 정당성 주장

러시아 국영 타스통신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동부 루한스크주(州)와 도네츠크주, 남부 자포리자주와 헤르손주 등 4개 지역에서 러시아 영토 편입 여부를 묻는 닷새간 주민투표가 이날 끝났다. 러시아는 루한스크주와 헤르손주 대부분, 자포리자주 80%, 도네츠크주 60%를 점령하고 있는데, 모두 합치면 9만㎢으로 우크라이나 영토 15%에 달한다. 포르투갈, 헝가리와 맞먹는 면적이다.

러시아 당국은 투표 3일차에 이미 유효 투표율 50%를 넘겼다고 밝혔다. 4일차 투표율은 도네츠크주 86.89%, 자포리자 66.43%, 헤르손 63.58%를 기록했고, 마지막 날인 27일 낮 12시 기준 루한스크주 투표율은 90.64%에 달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마지막 날만 투표소에서 진행됐고, 앞서 나흘은 현지 친러시아 당국자와 러시아군이 가정을 직접 방문해 ‘투명 투표함’으로 투표용지를 수거하는 방식으로 진행돼 주민들이 투표 자체를 거부하거나 반대표를 찍기는 아예 불가능했다. 결과가 이미 정해진, 요식행위에 불과한 투표였다는 얘기다.

러시아 국영 리아노보스티통신이 투표 종료 직후 공개한 초기 결과도 이러한 예상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도네츠크주는 개표가 20.64% 진행된 상황에서 러시아 영토 편입 찬성표가 98.27%로 집계됐고, 루한스크주는 97.83%(개표율 21.11%), 자포리자주는 97.74%(개표율 57%), 헤르손주는 96.3%(개표율 53%)를 기록했다고 설명했다. 타스통신은 현지 선거관리위원회를 인용해 “예비 결과가 27일 저녁에 나오고, 최종 결과는 28일 오전 9시 즈음 발표될 것”으로 전망했다.


이달 내 합병 마무리 전망… ‘대테러작전’ 전환 관측도

예비군 징집령을 피해 탈출하려는 러시아인들이 이웃 나라 조지아 국경 인근 지역을 걸어서 지나가고 있다. 베르흐니 라르스=AP 연합뉴스

러시아는 투표 결과를 근거로 이달 안에 일사천리로 영토 편입을 승인할 것으로 보인다. 타스통신은 28일 합병 법안 제출, 29일 법안 검토, 30일 합병 공식 선언 수순을 밟을 수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영국 국방부도 일일 전황 보고서에서 “푸틴 대통령이 30일 러시아 상하원 의회 연설에서 우크라이나 점령지의 러시아 연방 가입을 공식 선언할 가능성이 있다”며 “러시아 지도자들은 이 선언이 이른바 ‘특별군사작전’을 정당화하고 애국적 지지를 공고히 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201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강제 병합했던 선례도 이러한 관측에 힘을 싣는다. 당시 러시아는 크림반도에서 실시한 병합 투표가 97% 찬성으로 통과되자 이튿날 곧바로 합병조약을 체결하며 자국 영토 귀속을 선언했고, 의회 비준을 비롯한 법적 절차를 일주일 만에 끝냈다.

푸틴 대통령이 영토 병합을 서두르는 건 우크라이나의 반격과 서방의 무기 지원을 러시아 본토 침략으로 규정함으로써 군사력 증강 토대를 쌓기 위한 포석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지금까지는 러시아계 주민 보호를 위한 ‘특별군사작전’이라 불러 왔으나, 앞으로는 자국 영토 방어를 위한 ‘대(對)테러작전’으로 변경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푸틴 “우크라인 보호” 궤변… 서방 “강력 경고”

블라디미르 푸틴(오른쪽) 러시아 대통령이 26일 흑해 휴양지 소치에서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과 회담하고 있다. 소치=AFP 연합뉴스

푸틴 대통령은 투표 마지막날 TV로 공개된 각료 회의에서 “이번 주민투표가 실시되는 지역에서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 우리 사회와 국가 전체의 최대 관심”이라는 궤변을 늘어놨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도 “주민투표 이후 국제법 관점에서 안보 상황이 근본적으로 바뀔 것”이라며 “이 지역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할 것”이라고 거들었다.

러시아가 ‘방어’라는 명분 아래 전술핵을 사용할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푸틴 대통령의 최측근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은 이날 또다시 “러시아는 핵 군축 분야의 국가 정책의 기본 원칙을 엄격히 따라 미리 결정된 경우 필요하면 핵 무기를 사용할 권리가 있다”고 위협했다.

서방은 이번 주민투표를 국제법 위반으로 규정하며 인정하지 않겠다고 못 박았다. 유럽연합(EU)은 이번 점령지 병합 투표를 시행한 조직과 개인 등에 제재를 부과할 것이라며 강경 대응을 예고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지난 21일 유엔총회 연설에서 “푸틴 대통령은 비확산 체제 의무를 무시하며 유럽을 상대로 공공연한 핵 위협을 하고 있다”며 강력히 경고했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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