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던 일은 모두 달랐다, 용접으로 두번째 인생 연 불꽃 전사 5인방
용접 기술자에 도전한 여성 5인방
한국폴리텍대학 포항캠퍼스의 실습장인 뿌리기술융합센터에 들어서니 위아래로 데님(denim)을 입고 하얀 불꽃을 응시하는 청춘들이 눈에 들어왔다. 멋을 부리기 위해서 입는 데님이 이곳에서는 용접 시 발생하는 뜨거운 불꽃으로부터 작업자를 지켜주는 안전복이 된다.
구슬땀을 흘리는 무리 속에 5인의 여성이 있었다. ‘용접은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편견을 딛고 기술자가 되기 위해 도전장을 던진 이들이다. 용접 기술자라는 꿈을 위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데님차림으로 실습장을 지키는 5인을 만나 분투기를 들었다.
◇용접을 배우기로 결심한 이유
“’어디 여자애가 그런 걸 배우려 하냐’는 말을 들었지만 개의치 않았어요. 기술 하나를 제대로 배우면 평생 써먹을 수 있잖아요. 내 인생은 내가 개척하는 거라 생각하고 도전했습니다.”
맏언니인 김시현(35)씨는 안 해본 일이 없다. 백화점 판매직, 서비스센터 상담 직원, 인사팀 직원 등 다양한 업무를 경험했다. 사회 경험이 쌓일수록 기술직에 갈증을 느꼈다. 줄눈, 타일, 도배 등 다양한 선택지에서 고민을 하다가 우연히 접한 여성 용접사의 기사에 매료됐다. 여성도 용접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용기를 얻어 한국폴리텍대학 포항캠퍼스의 융합산업설비과에 입학했다.
융합산업설비과에는 산업현장에 바로 투입 가능한 인력을 양성하는 전문기술과정이 있다. 일종의 직업교육 과정으로 뿌리기술 중 하나인 용접을 비롯해 4차 산업의 필수요소로 꼽히는 반도체 쿼츠 용접도 교육한다. 2013년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해 화제를 모았던 원현우 교수를 비롯한 탄탄한 교수진이 학생들의 든든한 뒷배가 돼 주고 있다.
올해 융합산업설비과 입학생 90명 중 5명이 여성이다. 이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이곳의 문을 두드렸다. 이영희(32) 씨와 김혜린(30)씨는 원치 않게 직장을 잃은 경험이 있다. 오랜 기간 생산직으로 근무했던 이 씨는 회사의 사정으로 희망 퇴직했다. 쉽게 대체될 수 없고, 안정적인 소득을 누릴 수 있는 직업인이 되기 위해 융합산업설비과의 문을 두드렸다. 유치원 교사였던 김 씨는 인구 감소에 따른 유치원 폐업으로 실업자가 됐다. 이왕이면 적성에도 맞고,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하고 싶어 용접을 배우기로 결심했다.
용접기술자가 되겠다는 목표 하나만으로 서울에서 포항까지 온 이도 있다. 윤지원(30) 씨는 고향이 서울이다. 웹서버 개발자였던 그는 IT 열풍의 열기가 식기 시작하면서 위기감을 느꼈다.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아 스트레스도 컸다. 예전부터 막연히 품었던 ‘기술 하나 제대로 배워두면 좋겠다’는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로 하고 포항행을 택했다.
이들 모두 ‘원익QnC 채용 약정반’ 소속이다. 원익QnC는 반도체 쿼츠웨어 분야 세계 1위 기업이다. 원익QnC 채용 약정반은 캠퍼스 교수진뿐만 아니라 원익QnC 실무자가 쿼츠 용접(고순도 유리인 석영으로 하는 용접) 특화 인력을 양성하는 프로그램으로, 면접부터 실습까지 모두 캠퍼스에서 진행된다. 서류와 면접을 통과해야만 채용 약정반에 들어갈 수 있는데, 5인방 전원이 경쟁을 뚫고 올라왔다.
이유주(30) 씨는 원익QnC 채용 약정반의 비전에 공감해, 이차전지융합과와 융합산업설비과를 동시에 합격하고도 융합산업설비과를 택했다. 인기 많은 이차전지융합과 면접을 본 후 우연히 방문한 융합산업설비과 설명회에서 쿼츠웨어 분야의 장래성에 매력을 느껴 결단을 내린 것이다.
◇용접엔 꼼수가 없습니다
융합산업설비과의 커리큘럼은 피복아크용접기능사, 이산화탄소용접기능사, 가스텅스텐용접기능사 등 세 가지 용접 실습 중심으로 진행된다. 공유압, CAD, 기계정비, 설비보전 등 다양한 기술도 배울 수 있다. 1년 동안 이곳의 교육을 통해 취득 가능한 자격증 종류만 10가지 이상이다.
90명 정원보다 실습장 수용 가능 인원이 더 많다. 1인당 1대 이상의 장비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욕심만 있다면 원없이 실습을 할 수 있다. 3종류의 용접을 한 번에 할 수 있는 융복합 용접기를 비롯해 최신 장비를 갖추고 있다.
- 전반적인 커리큘럼이 궁금합니다.
(김시현) “철저히 실습 위주입니다. 3월 한 달 정도만 이론 수업을 했는데요. 저는 입학 첫날부터 바로 용접을 했어요. 처음엔 불꽃이나 화상이 무서웠는데 막상 해보니 재미있었습니다. 3월 말 개인 작업복이 주어지면 그때부터는 실습장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본인의 상황에 맞춰 실습할 수 있는 점이 좋습니다. 기능사 시험이 1년에 4번 있는데요, 응시 일정과 과목에 맞춰서 실습할 수 있어요. 2학기부터는 원익QnC 채용 약정반에서 쿼츠 용접을 배우고 있습니다.”
- 용접 종류별 특징을 알고 싶습니다.
(윤지원) “용접의 종류는 용접봉과 재료에 따라 나뉩니다. 이산화탄소용접의 경우 전류나 전압을 가장 많이 신경 써야 해요. 용접을 하고 나면 볼록하게 올라오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걸 비드라고 하는데요전류와 전압을 잘 설정하지 않으면 비드의 모양이 흐트러집니다. 실력이 뛰어난 용접사들은 적정 전류나 전압을 알려주지 않는다는 말이 있어요. 그게 비법이니까요.”
(김혜린) “피복아크용접은 용접봉을 사용해 동일한 금속끼리 합치는 용접 방법입니다. 처음에 철판에 용접봉이 달라붙어서 애먹었습니다. 용접 환경이 아주 뜨거워 화상의 우려도 있습니다. 용접하다가 옆에 있던 비닐에 스파크가 튀어서 깜짝 놀란 적이 있어요.”
(이영희) “티그용접라고도 불리는 가스텅스텐용접은 송곳처럼 생긴 텅스텐 전극봉으로 발생시킨 아크로 금속을 녹이면서 용접하는 방식입니다. 용접을 하다 보면 텅스텐 앞부분이 점차 닳기 때문에 텅스텐 앞 부분의 모양을 고려해서 토치의 각도를 설정해야 합니다. 산화도 주의해야 해요. 용접판 뒷면이 산화되면 곰팡이처럼 보기 싫은 꽃이 핍니다. 용접이 잘못된 것으로, 시험에서는 실점 사유에요.”
- 용접을 배워보니 어떤가요.
(김시현) “용접이 잘됐을 때 비드를 보면 예술작품 같습니다. 잘된 비드는 물고기의 비늘처럼 반질반질하죠. 그런 결과물이 나온다는 게 정말 매력적입니다.”
(윤지원) “소위 말하는 ‘간지’가 나요. 철에 용접을 하면 스파크가 튑니다. 처음 그 모습을 봤을 때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용접을 그저 ‘때우는 작업’ 정도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요. 배우면 배울수록 머리를 많이 써야 하는 작업임을 느낍니다. 토치의 각도, 가는 길까지 고려해야 하죠. 용접길은 내가 하는 대로 나와요. 꼼수가 통하지 않죠.”
-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다면요.
(윤지원) “작업복과 장갑, 작업화 모두 남성 사이즈가 기준이라 큽니다. 특히 용접 장갑이 엄청 두꺼운데요. 크기까지 하니까 버겁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하루는 이산화탄소용접 실습을 하다가 장갑이 너무 불편해서, 한쪽 손에 목장갑을 착용했어요. 아무 생각없이 결과물을 잡았는데 목장갑이 녹아내렸어요. 그 순간 교수님이 응급 처치를 해주고, 차가 있는 친구들이 응급실에 데려갔습니다. 부모님이 들으면 싫어할 일화지만, 그 이후로 더 이상 용접이 무섭지 않아요. 불꽃과 뜨거움에 익숙해졌죠.”
◇길을 넓혀둘 테니, 저희의 여정에 동참해주세요.
역대 융합산업설비과 이수자들은 원익QnC나 포항 산업단지 내 기업에 취업해서 기술력을 뽐내고 있다. 실무 중심의 커리큘럼 덕분에 대부분 새 직장에서 잘 적응하고 있다. 여성 5인방도 취업을 하기 위해 매일매일을 알차게 보냈다. 입학 첫 날부터 지금까지 단 하루도 헛되이 보낸 적이 없다.
노력은 달콤한 결실로 돌아왔다. 김시현 씨와 윤지원 씨는 3개의 용접기능사 자격증 취득에 성공했다. 지게차, 위험물 기능사, 설비보전 기능사 등 산업 현장에 필요한 다른 자격증도 취득했거나 필기에 합격한 상태다. 나머지 세명도 용접기능사 자격증을 이미 취득했거나 준비 중이다.
- 자격증은 어떻게 준비했나요
(윤지원) “용접기능사 자격증 3개는 꼭 따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어요. 서울에서 3개를 한 번에 따려고 10년치 기출 문제를 3번씩 풀었어요. 그때 설비보전 자격증도 같이 취득했습니다. 자격증 4개를 딴 후에 포항으로 돌아왔죠. 기억력이 안 좋은 편이라, 수업 시간에 들은 내용을 돌아서면 까먹어요. 그래서 매 수업마다 다이어리에 전류나 전압값, 기타 노하우를 꼼꼼히 기록했습니다. 그런 공부 습관이 한 몫 한 것 같아요.”
(김시현) “저 역시 3개의 용접기능사 자격증은 꼭 취득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임했습니다. 입학 첫 날부터 야간 실습할 저도로 열정이 넘쳤죠. 이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쉬는 시간엔 유튜브에 올라오는 영상도 참고했어요. 잘 모르겠는 건 가감 없이 질문했고요.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필기 커트라인이 60점인데 90점 넘는 점수가 나왔습니다.”
- 기술을 배우겠다는 결단의 소회는 어때요.
(김혜린) “아이들은 하나의 습관을 형성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매일 같은 걸 알려줘야 하고, 아이들의 집중력도 부족하기 때문에 ‘내가 잘 하고 있는 건가’ 자문할 때가 많았습니다. 가치 있고 중요한 일이지만 저의 적성엔 맞지 않다고 느꼈는데요. 용접은 내가 하는 만큼 결과가 보이고, 실력이 느는 게 눈에 보여서 너무 좋습니다.”
(이영희) “첫 직장에서 한 일은 특별한 기술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8년이나 했지만 언제든 대체될 수 있다고 생각했죠. 용접을 배우면서 실패도 해보고, 계속 안되다가 어쩌다 한번 성공하는 경험이 쌓이면서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특히 자격증을 취득했을 때의 성취감이 아주 컸어요.”
- 앞으로 어떤 기술자가 되고 싶나요.
(김혜린) “지금은 원익 QnC 입사를 위해 쿼츠 용접 실력 향상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산화탄소 용접에 흥미가 있는데요. 훗날 다른 용접 분야로도 경력을 쌓고 싶습니다.”
(윤지원) “1차 목표는 원익QnC에 입사하는 겁니다. 최대한 오래 다니고 싶어요. 원익QnC에는 장기근속자에게만 부여하는 명장 제도가 있는데요. 명장이 되는 게 목표입니다.”
- 도전을 앞두고 망설이는 여성들을 위한 응원의 말 부탁드려요.
(윤지원) “이상을 좇는 것보단 냉정한 현실 인식도 필요합니다. 용접만 배우면 당연히 잘될 줄 알았는데, 아직 여성에게 열린 문이 좁다는 걸 느껴요. 아예 여성을 채용하지 않는 곳도 있죠. 어쩔 수 없이 눈을 낮춰야 하는 경우도 생길 겁니다. 무작정 자격증을 취득하고자 하는 것 보다는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고, 전략적으로 접근하는 걸 추천합니다.”
(김시현) “여자라서 못하고, 여자라서 안되는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런 분야가 있다는 걸 모르거나, 주변 시선 때문에 도전을 못하고 있을 뿐이죠. 예전에 타 캠퍼스의 여성 교수님과 통화한 적이 있어요. 그분이 ‘내가 먼저 걸어갈 테니까, 내 발자국만 따라와’란 말을 했어요. 감동받았습니다. 지금은 다른 여성 기술자들의 후배이지만, 훗날 선배가 될 텐데요. 대한민국 여성 용접사의 한 획을 그을 정도로 노력해서 후배를 양성하고 싶습니다. 선배들의 발자국을 따라 길을 넓혀둘 테니, 조금만 더 용기를 내서 저희의 여정에 동참해주면 좋겠습니다.”
/진은혜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