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현의 ‘옛 신문 속 강원도 읽기’ ] 50. 황금에 미친 시대

박미현 2023. 3. 31.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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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에서 부동산으로 … 일확천금 열망이 부른 씁쓸한 현실 여전
일제 ‘산금정책’ 광산개발 이권 침탈 통제
1930년대 금값 폭등 전국적 금맥찾기 열풍
정선 화암리 중심 ‘조선 제2의 금산지’ 소개
생산량 증가에 강원 철도계획 수정 여론도
강릉·횡성 등 대금광 개발 보도 잇따라
임금 체납·중개비 갈취 등 범죄 기승
일, 사회운동가 체포 수단 악용까지
대재벌 금광개발 이익 독점 ‘양극화’

‘꼴드 랏슈’라는 단어가 근대에 등장했다. ‘골드러시(gold rush)’를 가리킨다. 1930년대 들어서는 ‘황금광시대’, ‘금광시대’라는 표현은 신문지상에 풍미했다. ‘미칠 광(狂)’자를 써서 황금에 미친 시대에 전국 산천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금을 찾아 헤매는 광경이라고 신문은 전한다. “금이라 할지라도 땅 밑에서 고요히 천고의 꿈을 즐기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방방곡곡에서 좀 이상한 빛깔을 가진 바위돌 치고 렵금가의 괭이가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지경이다.”

‘렵금가’는 금 사냥꾼을 가리킨다. 수십년 실패 끝에 결국 금 매장지를 찾아내 갑부가 됐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수시로 신문을 장식했다. 1930년대 재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울산 출신 이종만은 32년 동안 28차례의 실패 끝에 함경남도에 수억 평에 달하는 광대한 금광 개발권을 소유하게 됐다는 기사 따위가 더 욕망을 자극했다. 자본가와 관료들이 밀착해 한창 휩쓸고 간 황금광시대 끝물에 뛰어든 서민들은 사기꾼 농락에 작은 밑천마저 날렸으며, 저임금의 열악한 노동에 시달리며 몸을 망치고 마음도 다쳤다. 1930년대 금에 미쳐 날뛰도록 몰아넣은 것은 다름아닌 일본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한반도 산금정책’이 결정적이었다.

제국주의 일본은 독일, 미국, 러시아와 같은 열강과 함께 한반도 지하자원을 차지하기 위해 눈독을 들였다. 마침내 강제로 맺은 불평등 조약을 근거로 광산개발 이권을 침탈했는데 특히 금광을 공략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의 대리공사를 내세워 조선왕실에 압력을 가하는 동시에 일본 광업 재벌을 불러 채금권을 탈취한 것이다. 강제로 국권을 빼앗은 후에는 ‘산금정책’이라고 해서 금을 더 많이 캐내 수탈하는 시책을 썼다. 1929년 경제공황이 발발하자 일본은 강력하게 금 통제에 들어갔고 금값은 가파르게 올랐다. 1910년부터 3원이고 1930년에는 6, 7원으로 두 배 정도 오르는데 그쳤던 금값은 1933년에 들면서 미친 듯이 상승했다. 1933년 금값은 1931년에 비해 무려 50%p가 뛰어올랐다.

더욱이 일본이 중국 침략전쟁을 일으킨 1937년부터는 해외에서 군수물품을 사오려면 대금을 금으로 결제를 요구하는 경우가 늘면서 금 수요는 더 폭발했다. 1939년 금값은 1930년에 비해 네 배 이상 상승했으니 광풍이 불만도 했다. 1910년 4t, 1930년 6t에 지나지 않던 금 생산량은 1934년 12t으로 2배가 되고 1939년엔 무려 29만t으로 치솟게 된다. 1930, 1940년대 한반도에서는 매년 20만~10만t대 금이 사라진 것이다. 금 열풍이 본격화된 1933년 강원도내 금광은 101개소였다.(1933년 5월 30일자 매일신보) 1939년 4월 18일자 동아일보엔 1938년 말 강원도내 광산 현황을 소개하고 있다. 금을 비롯한 각종 광물을 채굴하는 광구가 900개소로 늘었으며, 채굴 출원 건수는 무려 3000건에 달한다고 알렸다.

금값은 하루가 다르게 오르고 경제공황으로 인건비는 하락해 자본가는 저임금 노동력을 쉽게 동원할 수 있으니 그야말로 일확천금의 광풍을 불게 만드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금맥 찾기 열풍이 번지면서 금 매장지 발견은 단연 시선을 모으는 뉴스가 됐다. 정선군은 금광과 관련된 강원도 기사에 자주 등장하는 지역이다. 전국에서도 수위를 차지할 정도로 생산량이 많은 곳이다. 금광 갱도를 관광지로 꾸며 ‘금과 대자연의 만남’이라고 홍보하는 정선군의 명소 화암동굴은 1922년부터 금을 캔 천포금광이었다. 1925년 7월 12일자 조선일보에 ‘연산 30만원 정선 금광 호적’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정선 화암리를 중심으로 남북에 벌려있는 광산이 여덟 곳이라며 ‘일시적으로 조선 제2의 금산지’라고 부르고 있다. ‘2000여명의 노동자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낮과 밤을 오로지 피와 땀을 흘려가면서 망치와 정 끝으로 채취한 금이 3년에 걸쳐 30만원이다’라고 소개했다. 1929년 3월 20일자 조선일보에 ‘신 금광혈 발견 개광 강원도 정선에서’라는 기사가 실렸다. “세인이 알고 있는 것과 같이 정선군 일원은 거의 토금, 석금, 그 외 숨은 보물이 무한량으로 장치되어있는 만큼 각처에서 연락이 끊이지 않고 있는 가운데 임계면 직원리의 금광사무소에서 최근 새로운 금광 굴을 발견해 수속을 마치고 3월 30일부터 개광한다”라는 소식이다.

이듬해인 1930년에도 정선군 신월리 ‘기우산’이라는 곳에서 처음이라 할 만한 대금광맥을 발견했다는 뉴스가 터졌다. 강덕희, 이기종 두 사람이 채금원을 제출해 4월 허가를 받아 금을 캐는 중이라고 알리고 있다(5월 31일자 조선일보). 1933년 1월 30일자 중앙일보는 ‘강원의 보고 정선 금광 전도 파히 유망하다고’라는 기사에서 평강, 인제, 김화, 삼척 등지 광산이 우수한데 특히 정선에서는 최응채, 오창은이 경영하는 광산 6개소에서 캐낸 금 규모가 대단하다고 꼽았다.

정선군에서 금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강원지역 철도계획까지 수정해야 한다는 여론이 나왔다. 1929년 3월 20일 조선일보에 ‘광산이 풍부한 정선에 철도 부설 계획’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충북 제천에서 평창군 대화를 거쳐 강릉 주문진에 접속하려는 철도 계획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 충북에서 영월을 거쳐 정선으로 들어왔다가 강릉으로 접속하는 것으로 변경하기 위해 이미 내부 조정이 있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같은 해 9월 보도에서는 각지 상업가들이 금광지대에 운집해있는데 당시 유일한 통신기관인 우편소는 40리나 떨어진 정선읍내에 있어서 돈 이체에 불편이 크고 우편물도 늦게 도착해 민간에서 비난이 자자하다고 지적했다. 1934년 3월 26일자 부산일보에 ‘강릉군 망상면에서 대 금광맥 발견’ 뉴스가 실렸다. 앞서 1930년 9월 22일자 중외일보에 ‘횡성 대금광 개발’ 보도가 나왔다. 앞서 같은 해 7월 23일자 매일신보에 ‘선만척식회사에서 신 금광을 발견 대소 17개의 대광굴 횡성 거슬치령’이라는 긴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전부 채굴하려면 80년 동안에도 다 파낼 수 없다고 싣고 있다. 일본어신문 부산일보 1930년 11월 20일자와 31년 1월 8일자는 각기 ‘횡성의 금광 가장 유망한 상안흥리’, ‘횡성의 금광 발전 가장 유망해’라는 기사가 실렸지만 곳곳에서 문제가 불거졌다. 불과 얼마되지 않은 2월 24일자 부산일보에 횡성금광 차압에 반대 폭행 사건으로 재판에 넘겨졌다는 소식이 나왔다. 1934년 7월 7일자 조선중앙일보는 ‘횡성금광의 태업’ 소식을 전했다. 같은 해 3월부터 금 생산량이 좋지 못하자 노동자 임금이 5, 6개월가량 밀렸고, 노자(勞資)간에 분규가 발생했다는 뉴스이다.

일확천금을 안길 순간을 꿈꾸는 열망을 틈타 각종 사기 범죄도 기승을 부렸다. 1933년 강릉 옥계 산계리 금광 매매를 둘러싸고 거액의 중개비를 챙긴 사기 범죄가 있었다. 서울에 사는 김성근과 장보상은 서로 짜고 광업계에서 경험이 풍부하다며 이력을 속인 뒤 금광 소유주인 김연수에게 접근했다. 가짜 매입자를 내세워 거액의 중개수수료를 챙겼다가 경찰에 붙들렸다고 1934년 5월 3일자 매일신보에 나왔다. 일본 총독부에서는 금광시대를 등에 업고 항일사상, 민족의식을 가진 사회운동가들을 체포하는 수단으로 쓰는 비열한 짓을 저질렀다. 1935년 9월 4일자 조선일보에 ‘운동 자금 얻고자 금광을 습격 탈금’했다고 보도됐다. 명확한 증거도 없이 당시 삼척에서 농민조합과 노동조합을 결성해 독서운동과 체육대회 개최 활동을 해오던 사회운동가들이 범죄 용의자라며 붙잡아들여 취조한 뒤 그 중 16명은 재판에 넘겼던 것.

채금 노동에 종사하다가 장애인이 된 안타까운 사연도 있다. 1934년 7월 강원도내 한 금광에서 일하다가 장애인이 된 사연이 신문에 소개됐다. 금을 캐는 작업을 하던 중 다리를 절단하는 사고를 당했다. 그후부터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늙은 모친마저 병에 걸려 신음하는데 약 한 첩을 봉양하지 못하는 신세를 탓하며 철도에서 자살을 기도했는데, 이번엔 한쪽 팔이 잘리는 비극이 발생했던 것. 반면에 금광개발로 인한 이익은 재벌이 차지하고 있다고 지적한 보도가 나왔다. 1934년 2월 16일자 조선일보에 ‘보고는 발견되어도 결국 대재벌이 독점’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날로날로 들리는 소문은 이곳저곳에서 새로 발견된 금광이야기와 그것으로 인해 일시에 졸부가 된 사람들의 듣기 좋은 소식뿐이다. 그러나 조선의 금광권은 점차로 대자본가의 수중에 집중되어가는 경향이 가장 농후하게 나타나고 있다.’라고 알렸다.

일본은 ‘국익’이라며 더 많은 금을 생산하도록 허용하고 독려함으로써 사회적 광기를 부추겼다. 백년 전에는 황금이었지만, 현대엔 부동산이 대체했다. 사는 곳에 따라 부동산 가치가 천차만별이니 살아가는데 필수인 주택과 점포가 투기처가 돼 삶의 질을 양 극단으로 몰고 사회를 피폐하게 하고 있다. 국가가 지역 차별없는 정책과 사회기반시설 조성에 부응하지 못함으로써 가장 약한 지역과 시민이 피해를 봤다. 현재 진행형일뿐 아니라 병폐가 해소될 기미는 보이지 않아 답답하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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