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제2차 세계대전부터 1960년대까지의 일본 사진 감광 재료 산업의 발전
7.1 전시 체제하의 국산화와 기술 확보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자, 후지필름은 1945년 9월 전 직원 해고라는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연합군(미국을 주축으로 한 GHQ)으로부터 영화용 필름 생산 재개 지시가 내려지면서, 회사는 즉시 활동을 재개했습니다.
전쟁 직후의 궁핍한 상황 속에서 국민들은 라디오와 영화 정도만이 유일한 오락거리였고, 전시 중 군부에 의해 통제됐던 영화 제작마저 해제되며 GHQ는 ‘점령지 국민의 안정’을 위해 영화 활용을 중요한 정책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1945년 10월 초, GHQ는 영화용 필름 생산 재개를 허가하는 ‘가허가서(provisional license)’를 교부했고, 10월 1일부로 후지사진필름도 생산을 재개합니다.
사장은 직원들에게 “점령하 우리에게는 미래를 장담할 만한 정보가 없다. 그러나 후지필름 창업 정신인 ‘사진 제조로 외국 제품을 대체하자’는 사명을 잊지 말고, 설비 규모를 줄이더라도 무사히 필름을 만들어내자”고 호소했습니다.
한편, 小西六(코니시로쿠)도 1945년 10월 서울·대구·부산 등 주요 영업소를 잇달아 재개설하고, 군정청 요청으로 일시 금지됐던 롤필름 생산 제한령을 해제시켜 민간용 필름 공급을 복원했습니다.이처럼 두 회사 모두 전후 패색이 짙은 가운데서도 필름 생산과 유통망 복구에 매진하며 연구개발도 병행했습니다. 특히 전쟁 중 확보한 해외 최고 기술 정보를 토대로 1930 ~ 40년대에 걸친 연구 성과를 재정비하여, 전후 일본 사진 시장의 재건과 국산 필름의 품질 향상 전초기지로 삼았습니다.
7.2 사진 수요의 회복
평화가 찾아오고도 국민들은 식량 조달 등 생계에 급급해 사진에는 손을 대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1946~47년 무렵부터 서서히 사진관이 전쟁 피해 복구에 나서고, 사진 재료점들도 하나둘 문을 열며 영업을 재개했습니다. 다만 전후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필름·인화지 원재료 비용이 폭등해, 120 필름(6×6 cm 12매 촬영분) 1롤 가격은 해방 직후 2엔41전에서 1948년 말 138엔까지 치솟았습니다.
1949년 무렵이 되자 공급 부족 현상은 완화되고, 필름 가용 물량이 꾸준히 증가했습니다. 식량 문제로 전전하던 서민의 생활도 점차 안정을 되찾아 갔고, 사진 촬영에 대한 관심이 서서히 고조되었습니다. 1950년에는 정부 주도의 공정가격제(공정거래위원회 제정)가 폐지되어 필름 가격이 자유화되었고, 같은 해 6월 발발한 한국 전쟁 특수(재팬머니 특수)로 산업 생산이 급반등, 일본 경제는 불황에서 벗어나 첫 성장 국면으로 돌아섰습니다.
이 시기 코니시로쿠는 생산 설비를 대대적으로 확충하고, 1950년대 초에는 기존 다이아세테이트(DAC) 필름 베이스를 모두 트리아세테이트(TAC) 베이스로 전환했습니다. 또한 신공장을 가동하여, 1951~55년 사이 필름 생산량(천 m² 단위)은 739→883→1,007→1,269→1,724로 꾸준히 늘어났습니다。
7.3 건판에서 컷 필름으로의 전환
패전 직후 일본 사진업계의 주력 감광재료였던 유리 건판은 깨지기 쉽고 부피가 커 보관·휴대가 불편했으며, 촬영 후 어두운 암실에서 일일이 장착·현상해야 했습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1946년부터 ‘컷 필름(cut film)’—120·127·70㎜ 규격 시트 형태로 상품화가 추진되었습니다. 컷 필름은 공장 대량생산이 용이하고, 암백만 있으면 어느 현상소에서도 어두운 방 없이 바로현상이 가능했습니다.
· 1946년 10월 후지사진필름, 제1호 전문가용 ‘후지 포트레이트 컷 필름’(흑백) 출시
· 1951년 5월 ‘후지 포트레이트 SS 컷 필름’(ASA100) 발매
· 1958년 TAC(難燃性トリアセテート) 베이스 전환
· 1959년 ‘컷 필름’ 명칭을 ‘シートフィルム’으로 일원화
· 1960년 5월 ‘ネオパンSSS 시트필름’(ASA200) 추가
코니시로쿠도 1949년 ‘사쿠라 컷 필름 포트레이트 판크로’를, 1959년 ‘사쿠라 컷 필름 코니판 SS(ASA100)’를 잇따라 선보이며 시트 시대에 동참했습니다.
7.4 35㎜ 필름 보급 확대와 매거진 내장
1950년대 중반, 6×6㎝ 중형 필름 전성기가 끝나고 35㎜ 카메라·필름 시대가 본격화됐습니다. 1956년부터 35㎜ 보급형 렌즈셔터 카메라가 잇따라 출시되자 소형·경량·휴대 편의성과, 롤당 촬영매수(36장)가 많다는 장점이 소비자에게 받아들여졌습니다. 1960년대 초반에는 35㎜ 판 필름 출하량이 중판 필름을 넘어섰습니다.
35㎜ 필름 포장은 크게 두 종류였습니다.
① 어두운 암실에서 벌크 필름을 일일이 매거진에 로딩하는 방식
② 매거진 내장 필름
①의 암실용 필름은 단가가 저렴해 전문 사진점·사진관에서 수요가 많았으나, 이 과정에서 필름 손상, 빛샘이 잦아 품질 신뢰도가 크게 떨어지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신문사·전문가용 대용량 벌크(30.5m) 필름’을 제외한 모든 35㎜ 필름을 ②의 카트리지 내장 방식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2의 방식이지만 벌크 필름과 가격을 같게 해, 실질적인 가격인하가 되었습니다.
이로써 사용자들은 어디서든 매거진을 그대로 현상소에 들고가면 OK였기에 편리성과 신뢰성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습니다
7.5 후지필름의 발전
7.5.1 1950년대 상품화 연구
1950년대에 사진 감광 재료 분야에서 후지필름이 거둔 가장 큰 성과는 ‘고감도 흑백 필름 개발’과 ‘컬러 필름의 상품화’입니다.
첫째, 고감도 흑백 필름 개발 부문에서는, PB 리포트에 소개된 “금(金) 증감(增感) 기법”(은염乳劑에 금 화합물을 첨가해 감도를 획기적으로 높이는 기술)을 연구·응용하여, 안정적인 금 증감법을 확립했습니다. 이 기법은 1936년 아그파社의 R. 코슬로프스키 박사(Agfa Film Plant, Wolfen)가 발견한 고감도 미립자유제 제조 방법으로, 후지필름은 1952년 4월 ‘네오판 SS’ 필름(ASA 100)으로 실용화에 성공했습니다.
둘째, 컬러 필름 상품화 부문에서는, 전후 곧장 ‘외식(外式) 칼라 반전 필름’을 개발·완성하여 시장에 진출한 뒤, 이어 ‘내식(内式) 칼라 네거티브 필름’의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내식 방식에는
• 아그파型:커플러를 수용액 상태로 유제에 혼입하는 방식
• 코닥型:커플러를 고점도 오일에 용해하여 유제 내부에 분산시키는 방식
두 가지가 있는데, 후지필름은 우선 PB 리포트로 거의 전용 특허 내용이 공개된 ‘수용성 커플러 방식’ 연구에 집중, 1955년에는 영화용 컬러 네거티브 필름(내식 방식 첫 제품)을 상품화했습니다. 이어 1958년 10월에는 아마추어용 일반 컬러 네거 티브 필름과 전용 컬러 페이퍼를 내식 방식으로 동시에 출시하며 국내 컬러 시장에 본격 진입했습니다。
7.5.2 생산 기술 연구의 진전
후지필름은 수집한 해외 기술 정보를 바탕으로, 생산 라인과 공정기술 개선에도 박차를 가했습니다.
- 이중층 동시도포 기술
• 기존 코팅법 대신 계면활성제를 신개발하여 유제면과 보호층을 동시에 도포
• 도포 후에 잉여유제를 Air Knife로 밀어내서 균일한 유제층을 얻는 방식으로 고속, 안정적으로 도포가 가능
→ 스크래치나 정전기 대폭 감소 - 고은화 및 탈수(Dehydration) 처리
• 필름의 해상도를 높이기 위해 젤라틴 함량을 줄이고 할로겐화은 농도를 높이는 고은화 시도
• 유제 코팅 전에 기계적/화학적으로 수분을 빼는 공정 → 두께 감소로 분산광 저감, 해상도・선예도 향상
이처럼 1950년대 후지필름은 “상품 설계, 합성 →프로세스 개선→탈수, 고은유제 개발”의 3대 축을 정립, 민수·군수·전문가용 필름을 가리지 않고 고품질·대량생산 기반을 확고히 다졌습니다.
7.5.3 가공기술의 진보
필름의 생산에는 코팅 후 필요한 사이즈로의 재단이 필요하다. 롤필름의 경우에는 이를 차광지와 함께 스풀에 감아 넣고, 말려진 필름을 포장지에 싸서 상품명을 인쇄한 작은 상자에 넣어 봉한다. 이 공정의 대부분은 암실 내의 작업이며 가공공정이라 칭한다.
전쟁 전부터 가장 고심한 것이 영화용 필름 가공이었고, 필름을 재단하는 재단기나 천공기의 정밀도 불량으로 인해 화면에 흔들림이 생기거나 재단 시 나오는 쓰레기로 고장이 발생하기도 했다. 전후 필름 베이스의 변경에도 필름 베이스의 조성 변경에 따라 재단기나 천공기의 끊어짐 불량이라는 문제에 직면했지만, 새로운 합금 재료를 사용함으로써 해결했다.
롤필름 분야에서는 필름과 차광지의 접착고장에 시달렸는데, 이는 고온다습한 환경이 문제였다. 전후 고분자 화학의 진보로 방습 포장 기술이 현격히 진보했기 때문에 이 기술을 포장 기술의 개선에 활용하였다. 그 때문에 1950년대에 들어서자 차광지의 기술 진보가 두드러졌고, 동남아시아 방면과 같은 고온 다습 지대에 수출하더라도 차광지의 방습 불량으로 인한 접착 불량은 전혀 발생하지 않아 신뢰성을 높일 수 있었다.
7.5.4 1960년대의 일반용 컬러 네거티브 필름 개발
1958년에 출시한 후지칼라 네거티브 필름은 20매 촬영용 1종뿐이었으나, 1960년 4월에 새롭게 12매 촬영용 제품을 추가 출시했습니다. 그러나 그 감도는 ASA32로, 당시 표준 흑백 필름 ‘네오판 SS’(ASA100)보다 훨씬 낮아, 사용자들은 감도 상향을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이에 1961년 10월, 감도 ASA50의 ‘N50’을 발매해 수요에 대응했습니다.
이로부터 2년 뒤, 1963년 10월에는 색보정 기능을 자동으로 수행하는 ‘후지칼라 N64’ 35mm 필름(12·20매 촬영)을 선보이고, 같은 해 12월에는 중형(6×6cm, 6매 촬영) 필름도 추가했습니다. N64는 기존의 투명 베이스와 달리 오렌지색 마스크를 내장하는 것으로, 프린트 시 색조 보정 부담을 최소화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1965년 8월, 후지필름은 감도 ASA100의 ‘후지칼라 N100’ 35mm 필름을 전국 동시 출시하고, 6×6cm 중형판(6매 촬영) 필름도 함께 발표했습니다. N100은 이전에 개발된 N64의 컬러 커플러를 계승하면서, 네오판 SS와 같은 ASA100 감도를 실현했습니다. 또한 입상감과 해상도를 정교하게 조정해 인물의 피부 톤부터 의류 질감까지 자연스럽게 재현할 수 있도록 화질을 한 단계 끌어올렸습니다.
이 무렵 전국적으로 컬러 현상소(라보)가 급증하면서, 어디서나 컬러 네거티브 필름의 현상과 컬러 프린트를 한 곳에서 처리할 수 있는 인프라가 갖춰졌습니다. 이를 계기로 사용자가 필름 구매 후 현상 의뢰를 더욱 편리하게 할 수 있도록 ‘필름 가격’과 ‘현상료’를 분리해 판매하는 방식을 도입했습니다. 현상료는 각 라보가 자율적으로 책정하며, 사용자는 촬영이 끝난 필름을 가져갈 때 현상료만 지불하면 되었습니다.
이렇게 분리 판매를 시작한 뒤의 N100 소매 기준 가격은 35mm 12매 촬영용이 290엔, 20매 촬영용이 420엔, 중형판 6매 촬영용이 330엔이었습니다.
1964년 도쿄 올림픽을 계기로 아마추어 사진가들 사이에 컬러 사진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높아졌습니다. 1960년대 중반에는 35mm 일반용 필름 가운데 컬러 네거티브 필름 사용 비율이 약 10% 정도에 달했고, 196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그 비율은 더욱 빠르게 늘어났습니다.
7.5.5 코닥사 개발의 오일 프로텍트형으로의 전환
당시 전 세계 컬러 필름 시장에서 코닥사의 제품이 압도적인 점유율을 차지했고, 각국의 현상소에서도 코닥식 처방으로만 현상을 처리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따라서 일본 업체가 세계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컬러 필름과 컬러 페이퍼 모두 코닥사 제품과 똑같은 현상 라인에서 소화할 수 있는 제품을 개발하는 것이 필수 과제였습니다.
코닥사의 칼라 감광 재료에는 ‘오일형’ 커플러가 쓰였으나, 일본산 내식(乳剤 혼입) 칼라 필름에 들어간 커플러는 수용성 커플러였습니다. 오일 프로텍트형 커플러 필름과 수용성 커플러 필름은 현상 처리 방식이 전혀 달랐고, 오일 프로텍트형을 쓴 필름은 생필름 보존성과 현상 후 이미지 내구성 면에서도 우수했습니다.
이에 후지필름은 1966년 4월 출시된 외식(外式) 반전 칼라 필름 ‘Newtype 후지칼라 R100’에 처음으로 오일 프로텍트형 커플러를 도입했습니다. 이어 1969년 3월에는 컬러 페이퍼, 1971년 4월에는 칼라 네거티브 필름 ‘Newtype 후지칼라 N100’에도 차례로 오일형 커플러를 적용해 신제품을 내놓았습니다. 小西六(현 코니카미놀타)도 1971년 ‘나우컬러’라는 애칭의 오일 프로텍트형 ‘사쿠라 컬러 N-100’을 출시했으나, 이는 코닥사가 1942년 개발한 ‘코다컬러’ 후로 약 30년 만에 일본 기업이 같은 구조를 채택한 사례였습니다. 그러나 이 덕분에 ‘월드 타입’ 필름으로 자리매김하며 세계 각국으로의 수출 길이 열렸습니다.
7.5.6 상업사진용 컬러 네거티브 필름 개발
후지필름이 상업사진 시장에 본격 진출한 계기는 1963년 6월 ‘후지칼라 N50 시트필름’ 출시입니다. 같은 해 12월에는 일반용 네거티브 필름 ‘N64’를 선보이며, 동시에 N64 규격의 시트필름을 내놓았습니다. 이 무렵 결혼식 촬영 등에서도 컬러 사진 수요가 늘어나자, 후지필름은 이 분야 전용 상품 개발에 힘을 쏟았습니다. 1965년 12월에는 감도 ASA80의 데이라이트(주광)용 ‘뉴타입 후지칼라 네거티브 필름’을 시장에 도입했고, 1966년 9월에는 백열등 촬영에 최적화된 감도 ASA32 ‘후지칼라 네거티브 필름 Type L’(L은 Long Exposure, 장시간 노출 약칭)을 상품화했습니다.
Type L은 사진관 내 설치된 백열등 조명 아래에서 눈으로 빛의 양을 확인하며 촬영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지만, 노출 시간이 1/10초에서 몇 초까지 길어 피사체 움직임에 민감해 흔들림이 생길 수 있습니다. 또한 저색온도의 조명에서 충실한 색 재현을 위해 청·녹·적 감도 밸런스를 조절하는 성능 개량도 필요했습니다.
한편 기존 주광용 필름은 ‘Type S’(S는 Short Exposure, 단시간 노출 약칭)로 개칭했습니다. Type S는 스트로보(플래시) 촬영 전용 감재로, 별도의 조명 없이도 촬영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플래시 발광 순간에 피사체에 닿는 빛을 예측·제어하는 기술과, 1/100초~1/10,000초 사이 초단시간 노출에 견딜 수 있는 할로겐화은 성능이 요구됩니다. 이처럼 Type S와 Type L을 촬영 조건에 따라 필름을 구분함으로써, 정확한 컬러 밸런스와 고품질 사진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필름 베이스를 기존 TAC에서 PET로 전환해 필름컬링도 크게 줄였습니다.
7.5.7 PET 베이스의 개발
전후 석탄에 의존하던 화학공업의 원료가 석유로 전환되면서, 섬유용 고분자 신소재가 잇달아 등장했습니다. 이들 중에는 필름 베이스로서도 우수한 물성을 가진 재료가 적지 않았고, 전 세계 사진 감광재료 업체들은 신소재를 이용한 필름 베이스 개발 경쟁에 돌입했습니다.
후지필름도 1952년경 트리아세테이트 셀룰로오스(TAC) 베이스의 개발이 일단락되자, 치수 안정성·강도 등 여러 특성이 더욱 우수한 차세대 필름 베이스 소재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고분자들이 시장에 나올 때마다 ‘필름 베이스로 쓸 수 있을까’를 검토했고, 폴리염화비닐(PVC)→폴리스티렌(PS)→폴리카보네이트(PC)→폴리에틸렌테레프탈레이트(PET) 순으로 상용화 검토를 했습니다.
• PVC는 원가가 가장 낮았으나 연속 생산이 어렵고 내열성도 부족해 채택에서 제외
• PS는 전기 절연성과 투명성, 이축 연신(縦·横 이중 인열)으로 균일·강투명 필름이 가능해 제품화 검토 대상이었으나, 85℃ 이상에서 급격히 연화되어 내열성 기준을 충족하지 못함
• PC는 1956년 바이어社가 합성에 성공한 고분자이며, 강도·투명도·내충격성·내열성·전기 절연성이 모두 뛰어난 데다 기존 TAC 베이스 생산 라인 그대로 사용할 수 있어 매우 유망
이에 후지필름은 PC 합성법 연구와, 반응 용액 단계에서 바로 필름 베이스를 얻는 일관 제조 공정 개발을 추진했다.
한편 PET 베이스 연구도 병행되면서, 어느 쪽을 채택할지가 핵심 과제가 되었습니다. 대량 생산 시 원가를 낮추려면 수요가 많은 분야, 즉 섬유용 소재로서의 전망이 중요했는데, PS·PC는 섬유 소재로서 특별히 각광받지 못한 반면, PET는 촉감·강도 등에서 섬유용 수요가 기대되었기에 PET가 최종 선택되었습니다.
PET는 영국 ICI사에서 산업화에 성공한 열가소성 수지로, 1957년 2월 동양레이온(현 도레이)·제국인조(현 테이진)과 ICI사의 기술 제휴로 국산화 길이 열렸습니다. PET 베이스 필름의 시제품 연구는 처음 DuPont과 ICI산 PET 필름을 사들여 시작했고, 이어 동양레이온이 ‘루미라’ 브랜드로 국산 PET 필름을 내놓자 이를 수입해 시험 제조를 이어갔습니다. 타공·테이프 접합 등의 가공 기술이 확보되고 시제품이 안정화되자, 1961년 3월 동양레이온으로부터 라이선스를 받아 PET 베이스를 자체 생산하기로 계약을 맺었습니다. DuPont에 이어 1960년 코닥도 ‘리스 필름’ 브랜드 PET 베이스 출하를 개시했고, 1966년 가을 DuPont이 X선 필름 베이스에 PET를 채택하자 코닥도 곧바로 따라잡아 PET 베이스 개발이 급물살을 탔습니다.
7.5.8 영화용 컬러 네거티브 필름 개발
1950년, 일본 전국의 영화관 수는 전쟁 전 수준으로 복귀했고, 이후에도 늘어나 1958년에는 7,000여 개관을 넘어섰습니다. 같은 해 영화 제작 편수는 500편에 달했고, 연간 관객 수는 1억1,270만 명으로 최고치를 기록했는데, 이는 국민 1인당 매달 거의 한 번씩 극장을 찾은 셈이었습니다.
1956년에는 일본에서 첫 수입 영화가 상영된 지 60주년을 기념해 12월 1일을 ‘영화의 날’로 지정했습니다. 그러나 1958년을 정점으로 관객 수는 내리막을 타기 시작했고, 1960년대 들어 그 감소세는 가속화되어 1963년에는 정점의 절반가량으로 줄었습니다(그림 7.3 참조).

이는 고도성장에 따른 여가 수요 다변화와 텔레비전 보급 확산이 원인으로 지목됩니다. 일본 TV방송은 1953년에 시작됐고, 민간 방송국 개국, 수신기 대량생산과 가격 하락이 이어지면서 텔레비전은 순식간에 국민 매체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같은 TV 보급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영화업계는 관객 감소를 막고자
• 스크린을 종전보다 획기적으로 가로로 넓힌 와이드스크린 도입
• 컬러 영화 제작 비중 확대
• 양산 중심에서 대작 중심으로 제작 체제 전환
• 제작 인력 축소 등 합리화
등 일련의 조치를 단행했으나, 그 결과 다수 극장이 폐업하는 등 영화산업은 매우 어려운 국면에 빠졌습니다. 35mm극영화의 와이드스크린화는 1953년 일본에 처음으로 시네마스코프 방식 작품이 수입·개봉된 데서 시작됐습니다. 비율을 종전보다 거의 두 배로 넓힌 대형 스크린은 관객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1957년에는 일본영화도 와이드스크린 제작에 들어가 1960년대에 접어들자 상영되는 극영화의 대부분이 와이드스크린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변화에 따라 영화용 필름에는 한층 더 높은 화질이 요구됐습니다.
1951년 후지필름의 첫 극영화 컬러작 ‘카르멘 고향에 돌아오다’가 제작된 이후, 1950년대 중반까지는 극영화 대부분이 흑백이었으나, 내식방식 컬러 필름이 등장하면서 1950년대 후반부터 컬러 제작이 급증했고, 1962년부터는 컬러가 흑백을 추월했습니다. 국산 35mm 컬러 포지 필름 판매량도 늘어나 1960년대에 들어 국내 시장의 과반을 차지하게 됐습니다.
반면 컬러 네거티브 필름 시장은 상황이 달랐습니다. 1958년 출시된 ‘후지칼라 네거티브 필름 Type 8512’(노광 지수 25)가 영화제작 현장에 도입된 직후, 코닥은 노광 지수 50의 ‘New Type’을 내놓아 일본 시장을 단숨에 장악했습니다.
이에 맞서 코닥과 경쟁 가능한 필름 개발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 연구한 결과, 후지필름은 1965년 1월에 개량형 ‘Type 8513’을 상품화했습니다. 이 타입은 노광 지수를 50으로 올리는 한편, 2년 전에 선보인 일반용 컬러 네거티브에 적용된 컬러 커플러를 채용해 탁도가 낮고 충실한 색 재현이 가능한 ‘마스크 부착 필름’으로 완성했습니다.
동년 10월에는 계조(階調)와 색재현성까지 개선한 ‘Type 8514’를 완성했습니다. 이 단계에서 실용성을 인정받은 Type 8514는 '가드맨 도쿄용심보’에 채택된 것을 시작으로, 이후 수많은 작품에 쓰이며 고품질 영화용 네거티브 필름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한편 세계 시장 진출을 위해 필수였던 ‘수출 적합성(export compatibility)’은 아마추어용 컬러 필름처럼, 전 세계 어디서나 동일 처방으로 현상할 수 있는, 즉 코닥 제품과 똑같은 처리를 거칠 수 있는 필름을 뜻했습니다.
영화용 컬러 필름 중 최초로 수출 적합성을 실현한 것은 컬러 포지 필름입니다. 1968년 3월 16mm 컬러 포지 필름(Type 8829)을, 같은 해 9월에는 35mm 컬러 포지(Type 8819)를 상품화해, 35mm 컬러 포지 필름의 수출이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35mm 컬러 네거티브 수출 적합 제품(Type 8515)은 이듬해 1969년 11월에 완성됐습니다. ISO 100을 확보해 세트 촬영과 야간 촬영이 한결 수월해지고, 입상성·색재현성도 크게 향상됐습니다. 이어 1972년 2월에는 35mm 컬러 네거티브 개량형(Type 8516)을 출시했습니다. 이 개량형으로 영화용 컬러 네거티브 필름은 마침내 세계 수준의 화질을 달성해, 기존에 극영화에 쓰이던 것을 비롯해 PR·교육·문화 영화 등으로도 폭넓게 사용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참고문헌
1) 「写真とともに百年」、小西六写真工業㈱編、昭和 48年4月10日発行等
2) 「金増感」、R. Koslowsky and H. Mueller, Agfa Film Plant, Wolfen, Germany. Reports September October(1936)等
3) 「富士フイルム50年のあゆみ」、富士写真フイル ム㈱編、108、昭和59年10月20日発行
4) 一般社団法人 日本映画製作者連盟ホームページ 日本映画産業統計 過去データー一覧表より
8장 1970년대의 컬러 네거티브 필름 개발
1970년대는 일본의 감광재료(필름) 메이커들이 마침내 코닥의 컬러 네거티브 필름에 근접할 만큼 기술 격차를 줄인 시기입니다. 1971년 1월, 일반용 컬러 롤필름 수입이 자유화됐고, 같은 해 4월에는 관세율까지 대폭 인하되면서 해외 제품 가격 인하가 즉각 시행되었습니다. 이로써 일본 시장도 해외 시장과 마찬가지로 본격적인 국제 경쟁 체제에 돌입했습니다.
1972년 3월, 코닥사는 35mm 롤 필름의 1/4 크기인 ‘110 포맷’ 포켓 시스템을 발표했습니다. 화면 면적이 작은 이 포맷에서도 컬러 프린트 확대 시 충분한 선명도와 미립자도를 확보하기 위해, 화질을 특별히 개선한 신형 컬러 네거티브 ‘코다컬러 II(Codachrome II)’가 개발됐습니다. 이 필름에는 ‘DIR 커플러(Development Inhibitor Releasing coupler)’라 불리는 신규 커플러가 도입되었는데, 현상 시 필름 내부에서 억제제가 방출되어 입자감 감소·선명도·색 재현성을 한층 높여 줍니다. 또한 코다컬러 II는 현상 온도를 높이고 시간을 단축한 설계로, 종전 약 1시간 가량 걸리던 컬러 현상 시간을 절반 수준으로 크게 줄였습니다.
이에 대응해 후지필름은 ‘IRG(Inhibitor-Releasing Grain) 기술’을 완성하여 1974년 11월부터 ‘후지칼라 F-II(Fujicolor F-II)’ 시리즈를 시장에 내놓았습니다. IRG 기술은, 사진 유제(乳劑) 입자 표면에 현상 억제제를 균일하게 흡착시켜 두었다가, 노광된 입자만이 현상 과정 중 억제제를 방출하도록 해 감도가 높은 입자들이 과도하게 과현상되는 것을 막는 방식입니다. 이는 코닥의 “커플러가 산화형 현상제와 결합하며 억제제를 방출한다”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독자적 접근이었습니다.
한편 코니카(구 小西六)는 1974년 9월 ‘사쿠라컬러 II N-100’을 출시했습니다. 이 필름에는, 코닥의 DIR 커플러 특허 범위에서 벗어난 완전 무색(非呈色) DIR 커플러를 독자 개발·도입했습니다. 코닥 특허는 화학구조를 특정한 데 불과해 개념 전반을 보호하지 못했기에, “색소와 억제제를 동시에 형성한다”는 청구항을 회피해 “색소 형성 없이 억제제만 방출하는” 커플러 구조를 구현, 세 감광층(청·녹·적) 모두에 공통 적용했습니다.
다음 변곡점은 ASA 감도 400의 초고감도 컬러 네거티브 필름입니다. 1976년 9월 제14회 포토키나에서 후지필름은 세계 최초의 ASA400 컬러 네거티브 ‘후지칼라 F-II 400’을 발표했습니다. 해외 선진 업체 제품을 뒤쫓기만 하던 일본 메이커가, 처음으로 경쟁사를 앞서 그 이상의 성능을 갖춘 제품을 내놓았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신작이었습니다. 이어 1977년 3월 코니카가 ‘사쿠라컬러 400’을, 같은 해 5월 코닥이 ‘코다컬러 400’을 차례로 출시했습니다. 이전까지는 고감도 제품 출시 시 구형을 단종하는 관례가 있었으나, 이번에는 새 ASA400 모델과 종전 ASA100 모델을 병행 판매해, 컬러 네거티브 필름 사상 처음으로 ‘감도 다변화’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8.1 후지필름의 기술 개발
8.1.1 후지칼라 F-II 400의 기획·출시
F-II 400 기획의 첫걸음은 ‘사진 수요 확대’ 관점에서 목표 감도를 어디에 둘지 정하는 일이었습니다. 아마추어 촬영은 주로 실외에서 이뤄지지만, 실내 촬영도 전체 촬영 컷의 약 1/4을 차지합니다. 실내에서는 셔터 흔들림이나 노출 부족 사례가 적잖았기에, 시장조사 데이터를 토대로 ‘가급적 모든 보급형 카메라에서 보조광(스트로보) 없이도 실내 촬영이 가능한 고감도 필름’을 개발해야 한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게다가 해변·설원 등 야외 촬영에서도 과노출 없이 적정 노출을 유지해야 하므로, 실내·실외 구분 없이 쓸 수 있는 감도가 필요했습니다. 이 같은 논의 끝에 필름 목표 감도를 ASA400으로 설정했습니다. 또한 ‘스트로보 없이 실내 촬영’을 달성하려면, 형광등·백열등 등 여러 광원에서 정확한 색 재현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사실도 요구사항으로 부가했습니다.
필름 감광성의 근간을 이루는 건 바로 수억 개의 할로겐화은 미결정립(微結晶粒)입니다. 할로겐화은 입자 크기가 클수록 감도가 올라가지만, 일정 이상 크기를 키워도 더 이상 감도가 오르지 않는 한계가 있습니다. 연구를 진행하며 새로 개발한 두 가지 핵심 기술이 있습니다.
첫째, ‘집중 잠상 입자(CLGe) 기술’:
대형 입자는 광 조사 시 생성된 전자가 정작 한 곳에 모이지 않고 퍼져버려 충분한 잠상이 형성되지 않습니다. 이에 입자 내부의 요오드 조성과 형상을 정밀 제어해 잠상 분산을 억제, 같은 입자 크기에서 더 많은 전자를 효과적으로 모아 고감도를 달성했습니다.
둘째, ‘ICL(Image Controlling Layer) 기술’:
컬러 네거티브 필름은 적·녹·청 3개 감광층이 각기 고감도·저감도 입자를 혼합해 구성됩니다. ICL 기술은 이들 고·저감도 입자층 사이에 ‘ICL’이라는 추가 층을 삽입, 고감도 입자의 색소상이 저감도층으로 번지는 부작용을 막아 입상성을 개선하고 선예도를 확보합니다.
이 두 기술을 적용하느라 F-II 400의 유제층 구성은 중간층과 보호층을 포함해 총 14개 층에 달했으나, 장비의 개량과 최첨단 컬러 공장 설비 덕분에 무리 없이 구현할 수 있었습니다.

8.1.2 영업 사진용 컬러 네거티브 필름 개발
1960년대부터 결혼식(웨딩) 사진에도 컬러 필름이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1972년을 정점으로 불붙은 ‘브라이덜 붐’은 스튜디오 시장의 컬러화 열풍을 크게 가속화했는데, 결혼식뿐 아니라 七五三(7·5·3)·成人式(성년식) 등 기념 사진과 개인·가족·학교·관광지 기념 사진까지 컬러화가 확산되었습니다. 1970년대 후반에는 이 분야에서도 컬러 사진이 흑백을 넘어섰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1972년 3월 후지필름은 현상 과정에서 유제 입자 자체에 미리 억제제를 흡착시켜 두었다가, 노광된 입자에서만 억제제가 방출되어 과도한 현상 은화를 억제하는 ‘오일 프로텍트형 커플러’를 도입한 ‘후지칼라 N Professional Type S(단노광·ASA100)’와 ‘Type L(장노광·ASA50)’을 개발·발매했습니다. Type S는 스트로보 촬영용, Type L은 스튜디오 백라이트 촬영용으로, 사진관 조명 환경에 맞춘 전용 제품이었습니다.
1976년 1월에는, 일반용에서 선보인 IRG(Inhibitor-Releasing Grain) 기술을 응용해 더욱 미세 입자로 샤프니스와 입상성을 개선한 ‘후지칼라 F-II Professional Type S(ASA100)’와 감도를 올린 ‘Type L(ASA80)’을 출시했고, 1980년 4월에는 ‘후지칼라 F-II 400’에서 개발한 CLG 기술 유제를 사용한 ‘후지칼라 100 Professional Type S(ASA100)’과 ‘Type L(ASA80)’을 각각 시장에 내놓았습니다.
8.1.3 영화용 컬러 네거티브 필름 개발
1968년 개발된 16mm 컬러 포지 ‘Type 8829’, 1972년 35mm 컬러 네거티브 ‘Type 8516’ 등 오일 프로텍트 커플러를 도입한 수출 적합 제품이 완성됨에 따라, 영화용 필름 수출이 크게 늘어났습니다. 특히 컬러 포지 필름은 미국 시장에서도 대량 사용되었지만, 네거티브 필름은 현장 관행으로 쉽게 바뀌지 않다가 20세기 폭스의 인기 TV 영화 ‘페리 메이슨’에 채택된 이후부터 점차 작품 사용률이 높아졌습니다. 1977년 6월에는 ‘후지칼라 네거티브 Film A’를 개발했으며, 신형 커플러·IRG·CLG 기술 유제를 탑재해, ASA100 감도에 미세 입자·고선예를 달성, 특히 16mm 영화에서 뛰어난 화질을 보여 주었습니다. 현상 면에서도 40℃ 이상 고온 신속 현상에 대응하는 특성으로, 현상소의 신속 처리 시스템에도 부합했습니다.
8.1.4 연구 체제의 진일보
1970년대 들어 연구 주제별로 전문 분야 연구자들이 모인 TF(태스크포스)를 구성해 연구 효율을 높였고, 평가 조직을 신설해 상품 설계 관점에서 연구자들의 시각을 새로 정립했습니다. 연구 장비도 고도화돼, 할로겐화은 결정에 대한 마이크로파 흡수·유전 손실 측정으로 결정 특성을 규명하고, 분석 조직은 단순 화학구조 확인을 넘어 ‘왜 이 성분이 이 위치에 있어야 하는가’라는 기술사상까지 분석하는 기법을 도입했습니다. FT-NMR·라만 분광기 등 분자 구조 해석 장비도 신속히 연구에 편입되었습니다.
후지칼라 F-II 상품화 과정은 코닥·코니카에 비해 다소 뒤처졌으나, 이를 계기로 연구 매니지먼트 방식을 혁신하고 2년 뒤 세계 최초로 ‘후지칼라 F-II 400’을 개발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F-II 400은 단순히 세계 첫 ASA400 컬러 네거티브 필름이라는 데서 그치지 않고, 내부에 다수의 독자기술을 집약해낸 대성과였으며, ‘우리도 세계를 선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연구진에게 심어 주었습니다. 새 제품 개발 중 가장 큰 동력은 필름 미세 특성 측정과 색 재현 연구, 레이저 기반 컬러 시뮬레이터 도입 등 화질 평가 기법의 비약적 발전이었습니다. 이 컬러 시뮬레이터를 활용해 실험 없이도 제품 개발 방향을 정확히 예측·결정할 수 있게 되었고, 분석·영상 분석 전문가들도 상품화 프로젝트에 적극 참여해, 종합적인 팀 역량이 개발 성과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참고문헌
1) 「富士フイルム50年のあゆみ」、富士写真フイル ム㈱編、221、昭和59年10月20日発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