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후 손바닥의 소소한 굳은살

이틀 전인 15일(한국시간) 촬영된 이정후의 손. 사진 제공 = OSEN

100일 동안 변명은 없었다

이번 겨울은 유난히 길다. 그에게는 그랬을 것이다.

사실 작년은 봄이 전부였다. 여름과 가을은 없었다. 그걸로 한 해가 끝났다. 이후로는 계속 움츠린 날들뿐이다.

일찌감치 돌아와야 했다. 국내 체류 기간은 짧지 않았다. 100일가량 머물렀다. 보통이라면 더 바쁠 비시즌이다. 빅리거 첫 해 아닌가. 여기저기 인사도 다니고, 각종 행사에, 방송에…. 섭외가, 그야말로 끊이질 않았을 것이다.

특히 요즘에는 더 그렇다. 유튜브 채널이 부쩍 늘어난 탓이다. 주인장도 잘 아는 사람이다. 가깝던 선배들이다. 때문에 출연 요청을 거절하는 것도 쉽지 않다.

물론 다들 뜻은 좋다. ‘가서 (마음) 고생한 얘기 나누고, 지금은 잘 회복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근황 알리고, 내년에는 좋아질 것이라는 확신을 주면 된다’라는 취지였을 것이다.

본인도 그런 마음이 왜 없겠나. 사연도 많고, 할 말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꾹꾹 눌러 담았다. 긴 잠행, 혹은 묵언수행을 이어갔다.

지난 1월 13일 인천공항 출국장이다. 이런 말로 그간의 심경을 밝힌다.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많은 선배들이 좋은 마음으로 불러 주셨다. 전부 출연해서 도와드려야 마땅하지만, 상황을 말씀드렸더니 모두 이해해 주시더라. 올 시즌에 좋은 성적을 낸 다음에 돌아와서는 꼭 찾아뵙겠다.”

그리고는 카메라를 향해 활짝 오른손을 펼친다. ‘안녕’ 혹은 ‘바이, 바이’를 뜻하는 동작이다. 그때였다. 렌즈에 뭔가 잡힌다. 손바닥의 검붉은 부분이다. 굳은살, 그 속의 크지 않은 피멍이다.

1월 중순 인천공항을 떠날 때 모습. 사진 제공 = OSEN

재회의 불청객, 못 마땅한 시선들

오랜만의 팀 합류다. 반가운 얼굴들과 다시 만난다.

그러나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재회에는 달갑지 않은 동반자가 따라다닌다. 시큰둥하고, 삐딱하고, 못 마땅한 시선들이다.

당장 비판적인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때로는 비아냥도 섞인 것 같다.

“백업 선수가 어울리는지, 아니면 스타 레벨의 선수인지 모르겠다. 장타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콘택트 유형의 타자다. 얼마나 가치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디애슬레틱)

“그의 첫 시즌은 좋은 출발이 아니었다. 샌프란시스코가 리드오프 타자에게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따지자면 F학점 수준이다.” (블리처리포트)

“(지난 시즌) 최악의 영입은 KBO에서 이정후를 데려온 것이다. 이보다 더 나쁠 수는 없었다.”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

“샌프란시스코의 가장 큰 실수는 2022년 미치 해니거와 3년간 4350만 달러(약 628억 원)에 계약한 것이다. 그리고 이정후는 실패라고 하기는 아직 이르지만, 부상 전까지 초반 성적은 별로 좋지 않았다.” (ESPN)

유력 매체가 이 정도다. 작은 것도 따지면 한이 없다. 그나마 ‘야후 스포츠’가 유보적인 스탠스를 보였다.

“샌프란시스코가 내셔널리그 서부지구에서 경쟁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전력이 이정후다. 지난해 부상 전까지는 엘리트급 콘택트 능력과 수비력을 보여줬다. 인상적인 부분이다. 다만 출루율과 장타력은 더 좋아져야 한다.”

사진 제공 = OSEN

팀 내 여론도 애매모호

팀 내 여론도 긴가민가 하다. 상당히 우호적이던 작년과는 사뭇 다르다.

일단은 분위기가 180도 달라졌다. 고위층의 교체가 무겁게 다가온다. 프런트 1~2인자가 한꺼번에 바뀐다. 파한 자이디 사장과 피트 푸틸라 GM(단장)의 경질이다. 이정후 영입을 주도했던 인물들이다. 책임 추궁의 의미도 일부 포함됐다는 설이다.

자이디는 다저스로 돌아갔다. 구단주 보좌역이라는 직함을 얻었다. 푸틸라 역시 애틀랜타로 떠났다. GM 보좌역으로 재취업했다.

다행히 밥 멜빈 감독은 살아남았다. 다만 당장의 스탠스가 조금 애매하다. 캠프-인 시점에서의 인터뷰가 눈길을 끈다. 샌프란시스코 지역 언론 머큐리 뉴스의 취재였다.

“개막전 톱타자는 이정후가 아닐 수 있다. 라몬테 웨이드 주니어의 출루 능력을 눈여겨봐야 한다. 그리고 3번 타자도 누군가 맡아야 한다.”

이 멘트는 처음에 우호적인 의미로 소개됐다. ‘바람의 손자가 3번으로 기용될 수도 있다’라는 해석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달달하지는 않다. 핵심은 ‘3번 타자’가 아니다. ‘1번 타자’다.

즉 멜빈의 말은 이런 뜻으로 풀어야 한다.
“리드오프는 라몬테 웨이드 주니어도 괜찮아 보인다. 그럴 경우 이정후는 3번 혹은 다른 타순으로 기용될 것이다. 본인에게 물었더니 (타순은) 상관없다고 하더라. 8번, 9번도 괜찮다고 하더라.” (작년에는 1번-31회, 3번-5회, 7번-1회 기용됐다.)

사진 제공 = OSEN

“오히려 차분하고 냉정하다”

사실 잔인한 말이다. 감독이 물으면 선수의 답은 뻔하다. 게다가 겨우 2년 차 아닌가. 특히 예의 바른 아시아계는 더 그렇다. “할 수 있다. 어디든 상관없다.” 그런 코멘트를 대외용으로 소비하는 건 적절치 않다.

하지만 현실이다. 어쩔 수 없다.

다만 주목할 점이 있다. 본인의 반응이다. 이 애매한 상황을, 이 달갑지 않은 분위기를…. 과연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그게 중요하다.

“부상 이후로 인터넷도 잘 안 본다. 그냥 하루하루 작은 목표를 세운다. ‘어깨가 1cm씩이라도 늘어났으면 좋겠다.’ 같은 것들이다. 덕분에 100%에 가까운 컨디션으로 스프링캠프를 시작할 수 있게 됐다.”

그러면서 제시한 키워드는 ‘부담감’이다.

“따지고 보면 어렸을 때부터 압박감이 컸다. ‘누구 아들’이라는 소리를 매일 들으면서 자랐다. 그래서 많은 시선을 받았고, 더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시달렸다. 그때가 지금보다 훨씬 더 심했다.”

지금은 오히려 당연하다는 말이다.

“부상에 대한 트라우마는 별로 없다. 그런 점은 아버지 보다 오히려 내가 더 많이 이겨냈던 것 같다. 그로 인해 가해지는 부담과 압박은 모든 프로 선수라면 감당해야 할 부분이다. 기대감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그래서 오히려 감사하게 느껴진다.”

26살답지 않은 성숙함도 풍긴다.

“사람들이 천재라고 부르지만, 전혀 아니다. 그냥 여러 선수 중에 한 명이다. 솔직히 작년에는 마냥 설레는 마음이었다. 지금은 차분해진 상태다. 의욕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냉정하게 시즌을 준비하겠다.”

사진 제공 = OSEN

그러면서 얼핏 보인 게 손바닥이다. 한 달 전 인천공항 때보다 조금 더 크고 붉어졌다. 단단해진 굳은살이다. 그동안의 시간이 느껴진다.

그렇다고 드라마틱한 변화는 아니다. 여기저기 물집이 터지고, 핏자국이 낭자한 흔적과는 다르다. 그냥 ‘훈련 좀 했네’ 하는 정도의 소소함이다.

그게 오히려 낫다. 그의 말처럼 요란하고, 과하지 않다. 차분하고, 냉정해 보인다. 적당한 절제도 엿보인다.

그의 손바닥에도, 그리고 마음에도. 이제는 제법 단단한 굳은살이 느껴진다.

사진 제공 = OS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