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출근길 [우연한 하루]
언젠가부터, 모르는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피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출근을 하기 위해 엘레베이터를 탔다. '오늘은 아무도 타지 않았으면'이라는 마음을 가득 담아 닫힘 버튼을 눌렀다. 내려가는 도중 한두 번 엘레베이터가 멈추는 순간이라도 오면 나도 모르게 한걸음 뒤로 물러선다.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오려는 찰나에는, 나도 모르게 시선은 하늘 위로 벽 쪽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아침은 시작된다.
지하철 9호선 플랫폼엔 늘 사람들이 가득 차 있다. 촘촘하게 늘어선 줄 사이를 비집고 걸어 가려면 어깨를 양껏 접어 온몸을 웅크린 다음, 저 먼 허공에 시선을 고정한 채 지나가야 한다. 그러다 가끔, 누군가와 어깨라도 부딪히는 순간이 오면 날카롭게 날아드는 차가운 시선을 온몸으로 맞지만 외면해야 한다. '혹시나 시비를 걸지 않을까? 묻지마 폭행 기사에 내 이름이 실리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죄송합니다"라는 한 마디만 남긴 채 얼른 그곳을 빠져나와야 한다. '모르는 사람과는 말도 섞지 말아야 한다'라는 말은 나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어느 화요일 출근길이었다. 평소처럼 엘레베이터를 타자마자 닫힘 버튼을 눌렀다. 2~3층 정도 내려갔을 즈음, 엘리베이터는 멈추고 스르륵 문이 열렸다. 평소였다면 나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버렸을 텐데 그날만은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네 다섯살쯤 되어 보이는 꼬마 아가씨가 엄마의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에 발을 올리고 있었다. 자그마한 체구의 그녀는 노란 시폰 치마를 입고, 높게 묶은 머리엔 커다란 꽃이 붙어 있고, 핑크색 메리제인 구두까지 신고 있었다. 작고 아기자기한 그녀를 보며 나도 모르게 양쪽 입고리가 올라갔다.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양껏 꾸민 그녀에게서 “저 좀 봐주세요”라는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평소의 나였다면 보는 둥 마는 둥 지나쳤을 텐데, 그날따라 나도 모르게 “ 와~예쁘네” 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녀는 기분이 좋았는지 코를 찡긋거리며 엄마 뒤에 숨어버렸다. 누군가 자신을 알아봐 주어, ‘부끄럽기도, 기분 좋기도 한 그녀에게 어떤 한 마디를 더 해줄까?’ 그냥 지나쳐 버리기엔 아쉬웠다. 엘리베이터는 곧 일층에 도착했고, 내리기 직전 그녀를 바라보며 “예쁜이 꽃 머리끈도 잘 어울려요 오늘 하루 잘 보내요.” 라는 한마디를 남겼다.
엄마 뒤에 숨어있던 그녀는 아파트 밖으로 걸어가는 나의 뒤통수를 향해 작지만 설렌 목소리로 “감사합니다.”를 보냈다. 평소의 화요일이었다면, 무거운 발걸음으로 하루가 시작되었을 테지만, 그날만큼은 출근 길 내내 깃털 신발을 신은 듯 온몸이 가벼웠다.
며칠 뒤 아침이었다. 그날은 중요한 미팅이 있어 아침 일찍 일어나 머리도 세팅하고, 새로 산 구두를 신은 채 문을 나서는 길이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순간, 앞집 문이 열렸고 막 출근을 하려는 앞집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어머, 이렇게 예쁘게 입고 어디 가요?” 출근 시간대가 비슷해 가끔 마주치는 앞집 아주머니는 경쾌하고 높은 톤의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중요한 미팅이 있어서요 헤헤.” 한껏 준비한 순간을 누군가 알아 주어서 그랬을까, 나도 모르게 밝고 수줍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옷도 단정히 잘 입었고, 준비도 잘 했을 테니, 오늘 일은 다 잘 될 거예요. 화이팅!” 돌아오는 그녀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에너지가 채워지는 듯했다. 중요한 일정이 있는 날은 신경도 쓰이고 긴장까지 살짝 더해져 출근 시간이 편하지만은 않은데, 그날만큼은 어깨를 더 펴도 될 것 같았다.
보통의 출근길은 무엇일까. 오늘 아침에도 길에서 마주치는 누군가와 나는, 서로가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으로 지나쳐 갔다. 모르는 이들이 가득한 장소에선 습관처럼 긴장이 따라오는 매일을 살아가지만, 가끔은 뭔지 모를 여운이 따라오는 순간을 기다려 본다. 그렇게 오늘도, 보통의 하루를 시작한다.
* 글쓴이 - 지은이
우연히 만난 이들과 함께 만든 순간을 기록합니다. 감정을 글로 풀어내는 것을 좋아하며 <세상의 모든 청년> 프로젝트에 참여했습니다.
해당 글은 뉴스레터 <세상의 모든 문화>에 연재되고 있는 글입니다. <세상의 모든 문화>는 총 20여명의 작가들이 매일(주중) 다양한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리는 뉴스레터로, 다양한 분야의 작가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가는 무료 레터 콘텐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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