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코 엘리시움 & 33원정대, 이야기꾼들의 머릿속은?

지스타 2025의 둘째 날, '내러티브와 서사'를 주제로 진행되는 컨퍼런스 GCON 2025의 무대에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두 게임의 기본 서사를 담당한 이야기꾼이 무대에 올랐다.

압도적인 텍스트량을 자랑하는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처이자, RPG로서의 정체성도 동시에 지니고 있는 '디스코 엘리시움'의 '로버트 쿠르비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그리고 올해 가장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낸 '클레르 옵스큐르; 33원정대'의 수석 작가이자 보이스&로컬라이제이션 프로듀서인 '제니퍼 스베드버그-옌'이 그 주인공이었다.

두 게임의 서사와 밀접한 패널들이 참석한 만큼, 세션의 모더레이터는 웹툰 작가이자 유튜브 '스토리캠프'의 팀장인 이종범 팀장이 담당했다. 이종범 팀장이 질문을 던지고, 패널들이 대답하는 형태로 진행된 세션은 반쯤 인터뷰와 비슷한 형태를 띄고 있었다.

▲ 좌측부터 로버트 쿠르비츠 디렉터, 제니퍼 스베드버그-옌 수석 작가, 스토리캠프 이종범 팀장
1. RPG는 왜 문학적 실험의 장이 되는가

이종범 팀장은 두 사람이 만들어낸 전례 없는 내러티브 경험을 언급하며 대담을 열었다. 그는 “문학과 게임의 경계, 특히 RPG라는 장르가 왜 이런 실험적 서사를 담아내는 데 최적의 그릇이 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두 창작자의 작업 기조를 자연스럽게 끌어냈다.

제니퍼 작가는 자신을 “이야기를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며, RPG는 본질적으로 ‘서사 과잉의 장르’라고 말했다. 플레이어가 스스로 선택하고 세계 속에서 움직이는 구조 덕분에, 소설보다 더 깊은 감정 이입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플레이어는 단순 소비자가 아니라 서사 공동 제작자가 되며, 서사적 실험이 발생하는 최적의 매체가 RPG라고 설명했다.

반면 로버트 디렉터는 RPG의 기원을 ‘실험적 문학의 변주’라고 단언했다. 그는 소설가 출신이라는 점을 밝히며, 초기 테이블탑 RPG에서부터 문학적 장치들이 그대로 이어져 내려왔다고 설명했다. “친구들이 함께 이야기를 쓰는 실험” 자체가 RPG의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그는 “돈이 없으면 실험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며, 문학적 실험이 자연스레 게임 속에 녹아드는 이유를 강조했다.

2. 구조, 규칙, 세계 — 문학에서 게임으로 옮아온 장치들

이종범 팀장은 “문학에는 확립된 구조가 많지만 게임은 이를 그대로 옮길 수 없다”며, 두 사람이 전통적 서사의 구조를 어떻게 게임의 문법 안에서 재해석했는지 물었다.

로버트 디렉터는 “구조는 작가들이 가장 두려워하면서도 의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RPG의 구조는 대부분의 문학보다 훨씬 복잡하며, ‘장소, 시스템, 선택지’ 같은 요소들이 구조를 끊임없이 흔들기 때문에 작가는 건축가처럼 구조를 설계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제임스 조이스식 문학보다도 RPG 구조가 더 어려울 때가 많다며, 글쓰기뿐 아니라 시스템과 맵, 페이싱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구조물로 작동한다고 설명했다.

제니퍼 작가는 구조를 “매크로와 마이크로의 조합”으로 본다고 했다. 삼막 구조 같은 기본 틀은 따라가되, 플레이어가 전투 중인지 휴식 중인지, 감정선이 고조되어 있는지 혹은 이완되고 있는지에 따라 세부 구조가 계속 달라진다는 것이다. 33원정대에서는 “플레이어의 상태”를 가장 중요한 요소로 삼았다고 강조하며,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는 리듬을 다층적으로 쌓아 플레이어를 이야기 속으로 끌어당겼다고 말했다.

▲ 다양한 인물들의 서사를 다각적으로 조명한 클레르 옵스큐르: 33원정대
3. 플레이어로 인해 계속 변하는 이야기

플레이어 개입으로 인해 이야기가 끝없이 변한다는 점을 짚으며, 이종범 팀장은 “이 현상이 서사 확장이라 생각하는가, 아니면 창작자로서 성가시게 여기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로버트 디렉터는 “대부분은 환영하지만, 가끔은 정말 괴롭다”고 털어놨다. 그는 디스코 엘리시움 플레이 영상들을 보며 “제발 그 선택만은 하지 마라…”라고 중얼거렸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몇몇 선택지 같은 경우, 많은 플레이어가 선택에 따라 풍부한 서사를 잃곤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선택지 간의 재미를 ‘등가’에 가깝게 유지하려 했지만, 그 과정은 고통의 연속이었다고 말했다.

제니퍼 작가는 이에 대해 “플레이어와 개발자의 관계는 악수에 가깝다”고 설명했다. 개발자가 손을 내밀면, 플레이어는 자신만의 가치관·배경·경험을 가져와 다시 손을 맞잡는 과정이 이야기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플레이어는 단순 경험자가 아니라 서사 창작의 공범이라고 표현했다. 그녀는 “선택이 어려울수록, 그 결정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결말인가’ 고민할수록 이야기는 더 깊어진다”고 했다.

4. 현실은 창작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이종범 팀장은 두 게임 모두 “현실의 가치·정치적 구조·역사적 은유가 정교하게 녹아 있다”고 말하며, 현실을 서사에 반영하는 기준을 물었다.

로버트 디렉터는 자신의 창작 동력이 “정치적 상처와 개인적 절망”에 가깝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느끼는 사회적 비극, 분노, 좌절감이 자연스레 게임 세계에 스며들며, 플레이어는 그 감정적 무게를 체험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작가는 자신의 우울을 플레이어에게 떠넘길 권리가 있다”고 말하며 농담을 더했다.

제니퍼 작가는 코로나 팬데믹 시기의 사회적 변화를 핵심 사례로 들었다. 사람들이 서로를 대하는 방식이 급격히 바뀌고, 공포와 불확실성이 일상화되는 경험이 33원정대의 세계관에 깊이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판타지 장치를 사용하면 현실의 편견을 걷어내고 본질만 추출해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현실을 비틀어 보여주는 서사적 거리두기”의 효과를 설명했다.

▲ 작가의 성향(?) 때문인지 온갖 어두운 이야기로 가득한 '디스코 엘리시움'
5. 세계 규칙과 설계의 우선순위, 계획은 의미가 있는가?

이종범 팀장은 두 사람이 세계관을 만들 때 어떤 규칙을 먼저 설정하는지 질문했다.

로버트 디렉터는 세계·설정·스토리·시스템의 순서를 강조한 서부 RPG 디자이너의 말을 인용하며 자신도 동일한 방식으로 접근한다고 밝혔다. 세계와 설정이 먼저 자리 잡아야만, 그 위에서 스토리와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각 단계가 다음 단계를 규정한다”며 세계관의 규칙이 얼마나 강력한 창작 엔진이 되는지 강조했다.

제니퍼 작가는 “계획은 무력하지만 계획 과정은 필수”라고 말했다. 세계관, 캐릭터, 시스템이 선형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확장된다는 것이다. 캐릭터 과거 하나가 레벨 디자인을 뒤집고, 특정 보스 디자인이 서사 구조를 재편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미술, 조명, 음향, 연기까지 모든 팀이 서사를 함께 만든다며, “서사란 텍스트가 아니라 협업 그 자체”라고 말했다.

6. 캐릭터의 내면을 게임으로 묘사하는 기술들

이종범 팀장은 두 게임이 모두 “플레이어의 내면적 선택과 캐릭터 심리 묘사가 중요한 구조”라고 분석하며, 게임이라는 매체에서 내면을 표현하는 방식에 대해 질문했다.

로버트 디렉터는 디스코 엘리시움의 ‘능력치가 말을 거는 시스템’을 연극 연출에 비유했다. 무대 연출가가 배우에게 “지금 넌 이런 감정이야”라고 속삭이듯, 텍스트로 플레이어에게 직접 감정을 전달하는 장치라는 것이다. 이 방식은 플레이어를 캐릭터의 내면 깊숙이 밀어 넣는 효과를 주며, 그 결과 엄청난 텍스트량이 발생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를 “감정을 강제로 주입하는 기법”이라고 웃으며 표현했다.

제니퍼 작가는 텍스트가 적은 게임에서는 환경, 사운드, 연기, 레벨 구성이 모두 내면을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고 설명했다. 모션캡처 배우의 톤, 조용한 캠프 장면의 구조, 주변 소리의 변화 등이 캐릭터의 마음을 ‘보여주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플레이어가 감정을 직접 발견하게 만드는 방식이 33원정대의 핵심이라고 덧붙였다.

7. 텍스트와 비주얼의 균형

이종범 팀장은 디스코 엘리시움의 압도적으로 많은 텍스트량을 말하며, 이 자체가 의도된 것인지, 혹은 취향인지 물었다.

로버트 디렉터는 “텍스트는 나의 무기라 어쩔 수 없다”고 웃으며 답했다. 그는 한 권에 8만 단어가 되는 성경 분량을 ‘측정 단위’처럼 사용해 글을 써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텍스트가 폭증했다고 설명했다. 디스코 엘리시움의 경우 성경 2권 단위의 텍스트가 들어가있다 말하던 그는 스트리밍 화면에서 정적 화면과 문자만 가득한 장면을 보고 공포를 느꼈다는 자조 섞인 농담도 덧붙였다. 그럼에도 “그게 디스코 엘리시움의 방식”이라며 자신의 철학을 고수했다.

제니퍼 작가는 33원정대의 텍스트 비중이 적은 이유가 단순한 의도나 취향 때문이 아니라, 게임의 구조와 다중 요소가 서사를 나눠 지탱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음악, 시네마틱, 연기, 환경 요소가 모두 서사를 전달하는 방식이어서 결과적으로 텍스트가 줄어든 것이다. 그녀는 “텍스트벽도 좋고 무텍스트 서사도 좋다”며 다양한 서사 형식의 시대를 반겼다.

▲ 압도적인 텍스트량을 지닌 디스코 엘리시움, 성경 2권 정도 분량에 달한다고 한다
8. 도전, 반대자, 실패의 공포 — 그리고 극복하는 방식

이종범 팀장은 혁신적 시도를 할 때 따라오는 반대와 위험을 어떻게 넘어섰는지 물었다.

로버트 디렉터는 “디스코 엘리시움의 가장 큰 갈등은 출시 후에 벌어졌다”고만 짧게 말하며, 자세한 내용은 인터넷을 찾아 보면 잘 나온다며 말을 아꼈다. 세션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디스코 엘리시움은 제작 이후 개발사가 창립 멤버를 해고하고 IP와 관련해 분쟁이 생기는 등 큰 진통을 겪었으며, 이로 인해 2편의 제작이 취소되기도 했다. 로버트 쿠르비츠도 이 과정에서 해고된 멤버 중 한 명이다.

제니퍼 작가는 제작 과정의 가장 큰 도전은 “서사의 복잡도를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였다고 밝혔다. 플레이어가 혼란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깊이를 유지하는 균형을 찾기 위해 내부에서는 끝없는 토론이 이어졌고, 컷신과 텍스트 비중을 두고 팀 내 의견이 자주 갈렸다고 했다. 그녀는 결국 플레이어들이 복잡한 서사를 사랑해준 덕분에 그 선택이 옳았음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9. 두 창작자가 정의하는 ‘좋은 이야기’란?

마지막 질문은 결국, 이 모든 세션의 근본에 닿았다."좋은 이야기란 무엇인가?"

로버트 디렉터는 “좋은 이야기는 결국 좋은 캐릭터”라고 잘라 말했다. 서사나 구조보다 먼저 기억되는 것은 언제나 인물이며, 인물이 바로 세계라고 강조했다. 그는 “캐릭터와 대화한다는 건, 결국 그 캐릭터를 만든 작가와 대화한다는 것”이라며, 창작자의 고독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제니퍼 작가는 좋은 이야기를 “우리를 생각하게 하고, 동시에 느끼게 하는 이야기”라고 정의했다. 매체가 무엇이든 인간의 관계와 감정에 닿아 있어야 하며, 캐릭터와 맺는 관계가 서사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또 “좋은 이야기는 창작자의 세계를 비추는 창이자, 플레이어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덧붙였다.

▲ 클레르 옵스퀴르: 33원정대가 고평가받은 이유 중 하나는 인간 관계 사이에서 벌어지는 상황의 몰입에 있었다
10. 미래에 시도해보고 싶은 궁극의 서사 실험

마지막 질문 이후 조금 남은 시간에, 이종범 팀장은 하나의 질문을 더 던졌다. “두 사람에게 남아 있는 궁극의 문학적 실험이 무엇인가"에 대해 말이다.

로버트 디렉터는 “가장 절망적이고 가장 비참한 게임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답했다. 인간 존재의 실패를 가장 정교하게 재현하는 게임을 만들고 싶다며, “인류는 지금도 엉망인데 예술은 아직 그 절망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했다”고 비틀린 유머와 함께 설명했다.

제니퍼 작가는 정반대의 목표를 꺼냈다. 그녀는 “서사가 사람들을 서로 더 잘 이해하게 만드는 게임”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개인의 행복뿐 아니라 타인의 행복까지 고려하며 살아가는 법을 이야기로 전달할 수 있다면 그것이 자신의 궁극적 실험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