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텔 팻 겔싱어 CEO, 경영 위기 지속에 결국 사임
인텔의 ‘반도체 왕좌’를 되찾겠다며 복귀했던 팻 겔싱어 최고경영자(CEO)가 결국 4년여 만에 사임한다. 인텔이 50여 년 역사상 최대 위기에 빠지자 책임을 지고 CEO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풀이된다.
2일(현지시간) 인텔은 겔싱어가 지난 1일부로 CEO직과 이사회에서 물러났다고 발표했다.
인텔 이사회는 겔싱어의 후임을 찾기 위해 특별 위원회를 구성했다고 밝혔다. 차기 CEO가 선임될 때까지 최고재무책임자(CFO)인 데이비드 진스너 부사장과 클라이언트컴퓨팅그룹(CCG) 총괄인 미셸 존스턴 홀트하우스가 임시 공동 CEO를 맡는다.
인텔은 한때 개인용컴퓨터(PC) 중앙처리장치(CPU) 시장을 선도하는 세계 1위 반도체 생산업체였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모바일 및 인공지능(AI) 분야에서 뒤처지며 경쟁력을 잃었다. 특히 최근 몇 년 동안 엔비디아와 AMD와 같은 경쟁업체를 따라잡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겔싱어는 2001~2009년까지 인텔의 최고기술책임자(CTO)를 역임한 바 있으며 2021년 2월 CEO로 회사에 복귀했다. 겔싱어는 취임 당시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사업 재진출을 선언하고 경쟁사와의 기술 격차를 줄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2030년까지 삼성전자를 뛰어넘어 대만 TSMC에 이은 세계 2위 파운드리 업체가 되겠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이를 위해 대규모의 자금을 투입해 오하이오에 대규모 파운드리를 건설하며 야침차게 사업을 진행했다.
그러나 겔싱어가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PC 수요가 둔화됐다. 또 인텔은 AI 반도체 분야에서 좀처럼 성과를 내지 못하며 고전했다. 인텔은 AI 칩인 ‘가우디’를 출시했지만 판매 부진으로 올해 5억달러의 매출을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게 됐다. 이런 가운데 파운드리 사업은 고객 유치에 어려움을 겪었고 미국 반도체지원법에 따라 오하이오 공장 건설을 위한 보조금 지급이 지연됐다.
인텔은 지난 2년 동안 250억달러를 투자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했다. 올 3분기에는 170억달러에 가까운 손실을 기록했다. 실적 부진으로 경영난이 심화되자 지난 8월 전체 인력의 15% 감원, 100억달러 규모의 비용 절감, 배당금 지급 중단 등의 고강도 구조조정 계획을 내놨다. 또 9월에는 파운드리 사업을 자회사로 전환하고 일부 공장 건설을 중단하다고 발표했다. 최근에는 퀄컴에 사업 매각 가능성까지 거론되며 시장에 충격을 안겼다.
겔싱어가 취임한 이후 약 4년 동안 인텔 주가는 60% 가까이 하락했다.
블룸버그통신은 사안에 정통한 소식통을 인용해 “최근 이사회가 겔싱어의 회생 계획에 대한 신뢰를 잃으면서 그를 몰아냈다”고 전했다. 보도에 따르면 겔싱어와 이사회는 지난주 시장 점유율 회복과 엔비디아의 격차를 좁히기 위한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그러나 겔싱어의 전략이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확인돼서 양측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고 겔싱어는 결국 인텔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겔싱어는 성명을 통해 “인텔은 내 커리어 대부분을 차지했기 때문에 오늘은 당연히 달콤 씁쓸한 날”이라며 “인텔이 현재의 시장 상황에서 자리 잡도록 하기 위해 어려운 결정들을 내린 한 해였고 우리 모두에게 도전적인 해였다”고 밝혔다.
경제전문 매체 CNBC는 겔싱어가 CEO로 취임하며 떠안았던 문제 대부분이 이사회와 전임 CEO들이 내린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고 진단했다. 특히 인텔은 2005년에 엔비디아 인수, 2017~2018년에 챗GPT 개발사인 오픈AI 투자 기회가 있었지만 AI의 중요성을 간과해 기회를 놓쳤고 결국 경쟁력이 악화됐다.
겔싱어의 사임 이후 인텔이 보다 적극적인 구조 조정안을 내놓을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울프리서치의 크리스 카소 애널리스트는 “이번 조치는 우리가 한동안 주장해 온 새로운 전략의 문을 여는 것”이라며 “겔싱어는 일반적으로 인텔의 공정 로드맵을 진전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인텔이 AI 분야에서 존재감이 없는 상황에서 독자적으로 첨단 제조 기술을 추구할 수 있는 규모를 갖추지 못했다고 생각한다”고 분석했다.
다만 현재 이사회가 인텔이 직면한 위기를 잘 헤쳐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된다. 올 8월 립부탄 전 이사가 회사를 떠난 이후 인텔 이사회에 반도체 전문가가 단 한 명도 없는 점은 특히 우려스럽다.
최경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