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의 아버지는 누구인가...해병대 창설 역사 바꾼 숙군

사라진 군인들, 숙군(肅軍)(1) 호명(呼名): 진해 해군까지 뻗친 이승만의 계략...44명 좌익으로 몰려 희생

(2) 전호극(全浩極): 항일운동 했던 군인…이승만 정권에 희생 당했다

(3) 이상규(李相奎): 해병대의 아버지는 누구인가...해병대 창설 역사 바꾼 숙군

(4) 조작(造作): 피로 얼룩진 국방경비법, 숙군은 이렇게 진행됐다

(5) 해원(解寃): 숙군이 남긴 상흔...멀게만 느껴지는 해원으로 가는 길

이승만 정권의 숙군은 군대 내 권력 투쟁에도 쓰였습니다. 이상규(李相奎·1920) 소령은 실무 능력이 뛰어난 해군이었습니다. 지원 조건이 까다롭지 않았기에 누구든 군인이 될 수 있었던 국군 창설 시기, 지휘부에는 실무 능력이 없는 친일파 장교도 포진해 있었습니다. 이 소령은 지휘부의 부당한 명령에 종종 맞서곤 했습니다. 지휘부는 이 소령을 눈엣가시처럼 여겼습니다. 이 소령은 1948년 해상인민군 사건에 휘말려 징역 4년을 받았습니다. 그는 한국전쟁이 일어날 무렵 처형됐습니다.

이상규 소령의 첫째 아들 이동주(77) 씨가 아버지의 군복 견장을 보여주고 있다. /김다솜 기자 

이상규 소령의 첫째 아들 이동주(77) 씨는 책상 위에 조심스럽게 물건을 꺼내 놓았다. 세월을 머금은 군복 견장과 빛이 바랜 선장면허증, 사령장 그리고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은 청년 사진이 놓였다. 사진 속 청년은 이상규 소령이다.

이 소령은 1940년 무렵 오사카 상선학교를 졸업하며 선박 관련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 당시에 배를 운항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이 소령은 1946년 해군 입대 권유를 받았다. 25세에 입대해 29세에 해군 소령이 됐다.

1948년 10월 19일 여순사건이 일어난다. 이 소령은 정대사령관으로 여순사건 반란군 진압에 투입된다. 이 소령은 부산 5연대 군인들을 태우고 여수 해상으로 갔다. 이들은 반란군이 여수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해상을 봉쇄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 소령은 여순사건을 마치고 와서 아내에게 곧 진급할 것 같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여순사건이 끝나고 한 달도 안 돼 이 소령은 해상인민군 사건에 연루된다.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던 해상의용군 사건 가담자를 탈출시킬 계획을 세웠다는 게 혐의였다. 이 소령은 마산형무소로 끌려가 징역 2년을 받았으나 끝내 죽임을 당했다.

이상규 소령의 첫째 아들 이동주(77) 씨와 둘째 아들 이동춘(76) 씨가 모은 자료들. /김다솜 기자 

◇해병대의 아버지 = 이승만 정권의 숙군은 군대 내 권력 투쟁에도 악용됐다. 이동주 씨는 아버지의 올곧은 성정과 실무 능력에 불만을 품은 상관들이 사건을 조작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그는 아버지가 해병대 창설 최초 제안자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해병대 창설 역사에 이 소령의 이름은 없다.

"한마디로 찍혔던 거죠. 아버지가 생전에 어머니에게 손원일 제독 얘기를 했더래요. 손원일 제독이 항해 능력도 없고 함정을 모르는데 어떻게 참모장을 하느냐고. 신현준 중령은 만주군 출신인데 갑자기 해군 사령관으로 왔어요. 그 사람과도 갈등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이 씨는 이 소령이 실무 능력이 부족한 지휘부와 친일파 장교들 사이에서 갈등을 빚었다고 주장했다. 우리에게 알려진 대로라면 해병대의 아버지는 초대 해병대 사령관이었던 신현준 중령이다. 신 중령은 만주군 출신으로 간도특설대에서 항일무장 세력을 잡아들였다. 친일인명사전에도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신 중령은 여순사건에서 이 소령과 같은 업무를 하고 돌아왔었다. 그는 손 제독에게 해병대 창설을 최초로 제안한다. 그는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에 해군 상륙부대가 꼭 필요하다는 제안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런 제안을 하기에 신 중령은 실무 능력이 없는 군인이었다. 신기철 금정굴평화인권연구소장도 <한국전쟁사>, <북한대남공작사>에서 이상규 소령이 해병대의 필요성을 주장한 보고서를 작성했다는 내용을 찾아냈다. 손 제독과 신 중령이 이 소령의 공을 빼돌렸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증거다.

이 소령의 이름이 해병대 창설 역사에 남아있지 않은 이유는 그의 성정과도 맞닿아있다. 그는 상관의 지시를 그대로 따르지 않아 미움을 샀다. 위에서 아래로 명령을 하달받는 군대 조직 문화와 맞지 않았던 탓이다. 이 씨는 어머니에게서 들은 아버지의 이야기를 전달했다.

"하루는 이기붕 씨(훗날 부통령) 등 이승만 대통령을 보좌하는 사람들이 군함 진수식에 왔데요. 그때 조타실에서 부하가 손이 잘렸다는 보고를 받고 아버지가 성을 냈다고 해요. 장관 부인이 임신한 상태로 승선했거든요. 그때는 임산부가 군함에 타면 안 된다는 금기가 있었어요."

이 소령은 필리핀에서 마닐라 로프를 구해 오라는 상관 지시도 거부한 적이 있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필리핀은 일본인이 대규모 학살을 저지른 곳이다. 일본인과 겉모습을 구별하기 어려운 한국군이 필리핀에서 위험할 수 있다고 판단한 이 소령은 부하들 신분이 보장되지 않으면 떠나지 않겠다고 버텼다.

상관에게 거슬리는 부하인 이 소령은 부하는 각별하게 챙기는 상관이었다. 이 소령 아내는 콩나물을 판 돈으로 김치를 만들어 부대로 보내곤 했다. 형편없는 급식을 배급받는 사병들을 위한 일이었지만 번거롭고 힘겨운 것은 분명했다. 이 소령은 고단한 아내에게 국가를 위해 힘들게 일하는데 그것도 못해주느냐고 호통을 치곤 했다고 한다.

1946년 9월 15일 김구가 진해를 방문했을 때 촬영한 기념사진. 이상규 소령은 맨 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에 있다. /이동주 제공 

◇김구를 만난 이상규 소령 = 이승만 정권에 충실했던 손 제독과 신 중령은 알려진 대로 '해군의 아버지', '해병대의 아버지'로 각자 승승장구한다.

김구는 1946년 9월 15일 해군을 격려하고자 진해에 방문했다. 당시 이 소령은 김구를 만났다. 김구는 '이 군에게'라고 쓴 <백범일지>를 이 소령에게 전달했다. 이승만은 자신의 숙적인 김구 계열 인사를 숙청하는 일에 숙군을 활용했다. 이 소령이 갑작스럽게 처형당한 배경을 뒷받침하는 이야기다.

이 씨는 "아버지는 좌익이 아니라 김구 선생을 추종하고 따랐다"며 "김구 선생이 군대 안에도 자기 세력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장교들과 인연을 맺었다. 아버지와도 그렇게 김구 선생과 연결이 됐다"고 설명했다.

이상규 소령의 둘째 아들 이동춘(76) 씨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혼인 사진을 들고 있다.(왼쪽) 아버지 이상규 소령의 사진(오른쪽). /김다솜 기자

◇진실을 찾아서 = 이 소령에게는 두 아들이 있다. 그는 한 살배기 아들 이동주 씨와 만삭의 아내를 두고, 관사에서 연행됐다. 이듬해 둘째 아들 이동춘(76) 씨가 태어났다. 걷지도 못했던 아기들은 이제 여든을 바라보는 노인이 됐다.

장남 동주 씨는 지난해 9월 식도암 2기 판정을 받았다. 서울과 부산을 오가느라 갈수록 야위고 있다. 그는 항암치료를 받느라 10㎏ 넘게 살이 빠졌다. 차남 동춘 씨도 몸 상태가 좋지 않다. 이전에 뇌졸중을 앓았고 당뇨도 있다.

동춘 씨는 "역사의 진실은 이념이나 이데올로기에 좌우돼서는 안 된다"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진실규명 통지서를 받은 지 2년이 다 되어간다. 지체하지 말고 조사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지만, 진실화해위원회는 아직도 결론을 내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그는 "빼앗긴 아버지의 공도 해군과 해병대가 나서서 진실을 밝혀줘야 한다"며 "건강이 좋지 않지만 억울하고 원통한 상황을 바로잡을 때까지 몸을 아끼고 추스르겠다"고 힘줘 말했다.

/김다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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