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차 베테랑 배우인데 연극 공연중 추락해서 난리난 이분

(Feel터뷰!) 문소리 배우를 만나다
문소리는 오랜 연극 무대에서 갈고닦은 실력으로 영화, 드라마, 시리즈를 넘나들며 자신만의 캐릭터를 구축했다. ‘지옥’ 시즌2, ‘정년이’, 연극 ‘사운드 인사이드’ 까지 다채로운 작품으로 시청자, 관객과 만났다. 올해 하반기 열일 행보를 가졌다.

시리즈 ‘지옥’ 시즌2에서는 정무수석 이수경을 맡아 시스템의 인간화를 선보였다. 아수라장이 된 세상에서 가장 이성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캐릭터였다. 드라마 ‘정년이’에서는 명창 채공선이자 정년이의 엄마를 연기했다. 자신과 같은 길을 가려는 딸의 꿈을 반대하지만 결국 인정하게 되는 사연이 가슴 아프다. 10월 말 마지막 공연을 선보인 연극 ‘사운드 인사이드’에서는 예일대 문예창작과 교수 벨라를 선보였다.

마른 체구에서 아우라가 느껴졌다. 24년 차 내공의 배우만이 말할 수 있는 여유로움도 뿜어져 나왔다. 올해도 얼마 남지 않은 시기 세 작품이 한 번에 공개되면서 본인조차 저 때 저랬구나 과거 모습에 놀란다고 답했다.

두 작품은 특별출연이지만 묵직한 존재감으로 자리했다.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이기도 하고 작든 크든 의미 있다면 하고 싶다”고 말했다. “어제도 비 오는데 지방 촬영을 마치고 올라왔다”며 넌지시 코로나 때도 끄떡없던 몸이 최근 크게 앓고 나서 에너지가 바닥을 보였다고 털어놨다.

다음은 지난 11일 바쁜 일정을 쪼갠 문소리와 시제스 스튜디오 사옥에서 나눈 즐거운 시간을 정리한 글이다.


무대에서 떨어져 액땜 제대로

-무대가 주는 기운이 남달랐던 건가. 건강을 회복한 게 연극이라는 말은 의외다.

“올해 ‘정년이’, ‘지옥’까지 연달아 끝내고 연초 ‘폭삭 속았수다’를 마치고 B형 독감에 걸려 아팠다. 촬영은 전국 팔도를 돌아다니느라 잠자리도 바뀌고 하니까 몸이 견디지 못하는 거다. 연극은 연습 시간, 공연 시간이 정해져 있으니 루틴이 생기고 규칙적인 생활이 가능하다. 공연을 하면서 많이 회복되었다. 공연 석 달 하고 나니 주변에서 좋아졌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벨라가 다시 글을 쓸 힘을 얻듯, 저도 2시간 동안 오직 쏟아내고 나면 오히려 더 좋아졌다”

-‘사운드 인사이드’를 마쳤다. 연습 한 달까지 총 4개월의 여정의 소감과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뉴욕에서 활동하시던 연출자였고 공연이 끝나도 여전히 화기애애할 정도로 팀워크도 좋았다. 대사가 많아서 긴장은 했지만 실수 없이 잘 끝났다. 다면 공연 초반에 액땜을 제대로 했다. 두 번째 공연 때 무대 익숙하지 않아서 떨어졌다. 완전한 암전 때였다. 회전문이 돌아가고 그사이 신속하게 음식 바구니(소품)를 옮겨 세팅해야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동선 표식을 관객의 애플워치로 잘못 보고 객석으로 다가갔다가 떨어진 거였다. 주변 소리 때문에 쿵 하는 소리가 잘 안 들려 다행이었다. 공연 초반에 다치면 안 되니까 그 와중에 저도 최대한 몸을 둥글게 말아서 떨어졌고 그대로 주저앉아 있었다. 사태 수습이 되고 나니까 눈물이 흘렀다”

운명 같은 정년이,
인간문화재 남해성 명창 인연

-‘정년이’ 10화에서 추월만정을 부르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결국 딸의 꿈을 허락하고 응원하는 엄마의 마음과 소리꾼 선배의 마음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1년 전 처음 레슨받고 4월에 마지막 녹음을 했다. 판소리는 10년 해도 어디 가서 명함 내밀기도 힘든 장르다. 들을 만한 소리를 내는 것 자체가 어렵다. 저도 쉽지 않았지만 기술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믿고 따랐다. 어딜 가도 연습의 연습이었다. 판소리는 악보가 따로 없어서 선생님의 녹음 버전을 많이 듣고 따라 했다. 그걸 듣고 나름대로 강약, 세기를 표기한 걸 토대로 따라 부를 뿐이다. 느린 진양조장단에 낮은음이라 동력도 필요하고 소리의 단단함이 느껴지지 않으면 즐기기 어려운 노래다.

저만큼 어린 공선(이가은)도 추월만정을 열심히 연습한 걸로 안다. 막상 신랑(장준환 감독)에게 추월만정을 들려주니, ‘가사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느린 노래를 드라마에서 끝까지 들려주겠냐’고 절반만 연습하라고 하더라. (웃음) 순간 가장 큰 미션이 ‘시청자가 판소리 한 대목을 즐겨줄까’로 수정되었다. 일출 때 바다를 보며 추월만정을 부르는 장면을 찍으려고 전라남도 고성까지 갔다. 해질 때까지 리허설을 마치고 쪽잠 자가면서 장소와 상황을 위해 모두가 공들였다”

-20대 때 수궁가를 직접 배운 이유는 작품 준비 때문이었나.

“사연이 긴데.. (웃음) 제가 선생님 복이 많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집안 형편이 어려웠지만 부모님 지인의 지인 조카가 바이올린 선생님이었다. 저렴하게 배울 기회가 있었다. 저렴한 악기였지만 배움이 더 소중했던 때였다. 고등학생이 되니 선생님, 부모님 모두 그만두라 하시더라. 선생님 왈 ‘실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니 공부해라’ 하셨고, 그때 많이 울었다. 대학에 가서도 미련이 남았다. 관현악부 (동아리)에 갈 수도 있었지만 어디 내놓기 부끄러운 악기라 차선책으로 국악반에 들어갔다. 국악반은 악기가 다 갖춰져 있더라. 바이올린의 경험으로 가야금 현을 뜯으며 배웠다. 가끔 학교에서 가까운 명월관에서 전통 혼례 아르바이트도 했다. 돈을 모아 악기도 사고 국악, 민요도 배울 수 있었다.

이후 연극한다고 휴학했다가 우여곡절 끝에 돌아왔다. 졸업은 해야 하니 꾸역꾸역 수업을 듣고 있었다. (문소리는 성균관대 교육학과 출신) 교육학이 재미있을 리가 있겠나.' (웃음) 그러던 어느 날 마음이 허해서 이리저리 헤매다가 종로3가의 건물 꼭대기 층에서 판소리가 들리더라. 홀린 듯 들어갔는데 하고 싶으면 와서 배우라고 하셨다. 한 달 동안 산이나 물가를 돌아다니면서 산 공부를 함께 다녔다. 산 공부는 산속에 집 하나 얻어 놓고 소리만 하는 공부다. 인간문화재 남해성 선생님이다. 저를 많이 예뻐해 주셨다. 팬데믹 때 돌아가셨는데 장례식장도 못 갔다. (눈물을 훔쳤다)”

-사연을 듣고 보니 ‘정년이’의 특별출연은 운명이지 싶다. 소리의 세계로 이끈 선생님 생각을 많이 했겠다.

“태리가 ‘아가씨’, ‘리틀 포레스트’ 시절부터 제가 소리 했던 것을 알고 있었다. 국극 전시 봤던 이야기나 과거 이야기를 했던 게 생각났는지 엄마 역할을 제안했다. 제 삶에 남해성 선생님이 많은 영향을 미치셨다. 80대까지 목이 짱짱하셨다. 덕분에 생전 유튜브 영상이나 자료도 많이 참고했다. 국극 관련 책을 보다 초창기 멤버에 선생님 사진과 이름이 등장하니 반갑고 감사했다. 그때 배운 소리를 연기로 쓸 수 있다는 게 선생님 은혜에 보답하는 길 같았다”

-자신이 포기했던 길을 자식이 가려고 할 때, 반대하다가 허락하는 부모의 마음이 절절했다.

“감독님 왈 ‘공선은 국극 이야기만 나오면 혼절까지 할 정도의 성격이다’라고 했다. 소리를 잃고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 안타까운 인물이다. 대쪽 같은 성격 탓도 있다. 그런 사람은 꺾이면 부러져 버린다. 이후 삶은 아시다시피 험난했고 짧게 지나가 버려서 더 강하게 그 부분을 보여주어야만 했다. 그래야 시청자가 후반부를 이해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사투리도 리얼리티를 주기 위해 경화랑 태리랑 3박 4일 목포로 어학연수를 갔다. 땅의 기운과 음식, 냄새를 맡으면서 현지 사투리를 맹연습하고 왔다”

-극 중 정년이처럼 연두(딸)가 연기를 한다고 하면 어떨지 생각해 본 적 있나.

“하.. 연두는 연기에 관심 없는데.. (웃음) 일단 말릴 거 같고 마음이 아플 거 같다. 엄마로서 뭘 해도 응원하고 품어주고 싶지만, 내 자식이 연기한다고 하면 앞선 엄마는 될 수 없다. 무서운 비평도 할 수 있는데 엄마로서 그러고 싶지 않다. 연기를 평생 해왔기에 외면할 수도 없으니, 사이가 틀어질 수 있다고 솔직하게 말할 거 같다. 그래도 굳이 하겠다고 하면 언젠가 하게 된다. 말린다고 꼭 좋은 건 아니더라. 선택한 길은 끝까지 가봐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지옥2, 수연 언니가 만들어준 인연

-‘지옥 2’에서 시스템의 인간화인 이수경을 연기했다. 개인의 욕망을 품은 한 개인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대통령실 정무수석답게 국가 자체 같아 섬뜩했다. 세상의 질서와 균형을 새롭게 잡기 위해 새진리회와 손을 잡고 박정자를 수단으로 쓰기도 하는 등 지옥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제정신인 악인처럼 보였다. 이번에도 특별 출연이지만 존재감이 엄청나다.

“연상호 감독님과 부산영화제 뒤풀이 때 처음 만났는데 썩 좋은 기억이 아니었다. (웃음) 그땐 하이텐션이셨는지 날아다니셨고 저는 그런 텐션이 부담스러웠었다. 이후 수연 언니 장례식장에서 재회했고 화장터까지 같이 갔었다. 그때 양익준 배우도 있었는데 셋이 언니를 추억하다가 단골집에 모여 술자리까지 이어졌다. 부산의 추억도 있고 하니까 분위기가 좋았다. 나름 귀여워 보이는 구석도 있더라. (웃음) 어떤 자리에서 어떤 상황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 보였던 거다. 그때 ‘제대로 겪어보지 않고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되겠구나’를 느꼈다.

수연 언니가 맺어준 인연이라고 우리끼리 말하던 차에 ‘지옥2 작은 역할이고 예산도 많지 않은데 해줄 수 있겠냐’고 제안하시더라. ‘저 그렇게 안 비싸다고 맞춰 드린다’고 농담조로 이야기했다. 막상 시나리오가 왔는데 말이 안 되는 캐릭터더라. 답이 안 나와서 어려웠다. (웃음) 이 세계관 사람들은 다 미쳐 있는데 이수경만 제정신이다. 근데 또 재미없는 대사만 해서 (시청자가) 저만 나오면 빨리 감기로 넘겨 버릴 거 같았다. 감독님 왈 ‘그 말이 이해가 되게 해 달라’는 주문이 들어오더라. 자신 없었지만 또 제가 도전하는 역할을 좋아해서 출연하게 되었다. 지치지 않는 열정의 소유자다”

-정무수석 이수경은 유독 등산복과 텀블러를 장착한 편한 스타일을 추구한다. 본인 아이디어인지 궁금하다.

“감독님이 시나리오를 수정한다고 하길래 뭘까 기대했다. 정치인 룩이 뻔하잖냐. 저보고 첫 등장에 등산복 입을래, 추리닝 입을래 하시더라. (웃음) 추리닝은 아니겠다 싶어 등산복을 정했다. 거기서 이수경의 아이템이 등산복, 태블릿, 텀블러인 거다. 환경을 생각하고 자연 친화적인 정치인이 더 위선적으로 보일 것 같다며 과감하게 가보자고 했던 감독님 아이디어다”

-지옥 시즌3가 제작된다면 합류할 생각인가.

“연상호 감독님과 작업은 언제나 열려 있다. 현장이 워낙 재미있었고 작업도 흥미로웠다. 좋은 인연도 계속 이어가고 싶다. 저와 영화를 보는 세계관이나 취향이 다르지만, 다른 관점이 오히려 보완되는 시너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작업은 언제나 환영이다”

-<여배우는 오늘도>(2017)로 연출에도 도전했다. 새로운 작품을 볼 수 있을까.

“연출은.. 집 안에 먼저 출항하시는 분이 대기 중이시다. 배가 두 대가 출항하면 힘들어서 먼저 한 배가 떠나야 저도 나갈 수 있다. 그분은 느려터져도 절대 허튼짓은 안 하는 분이시라 믿고 있다. (웃음)”

글: 장혜령
사진: 시제스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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