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직후 정치 거물들은 경성 최고 갑부 집에서 살았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유튜브 https://youtu.be/Xjk--CToVO8 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1946년 서울시헌장
해방이 되고 1년이 흐른 8월 10일 제정된 ‘서울시 헌장’은 ‘경성부’를 ‘서울특별자유시’로 변경했다. 새롭게 탄생한 서울시는 두 달 뒤인 10월 1일 고시를 통해 행정구획명칭도 변경했다. 개정 동명은 대체로 합방 이전 명칭을 채택하거나 위인을 기념하여 작명했고, 일본식 정(町)은 동(洞), 정목(丁目)은 가(街)로 고쳤다. 그리고 11월 21일 ‘서울특별시헌장 수여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경성은 사라지고 서울특별시가 앞으로 탄생할 대한민국 국도(國都)로 선포됐다. 그런데 수여식을 보도한 신문들부터 혼란스러웠다. 행사 다음 날인 11월 22일 자 ‘한성일보’는 행사장을 ‘서울중학 강당’이라고 표기했고 당일인 11월 21일 자 ‘공업신문’은 ‘경성중학’이라고 표기했다. 문영당이라는 출판사는 ‘신동명입(新洞名入) 서울안내’라는 지도를 제작해 재미를 봤다. 지명을 붉게 인쇄한 식민 시대 지도에 검은색으로 새 지명을 추가해 인쇄한 지도였다. 지도에는 출판사 주소도 신주소 ‘인현동’과 옛 주소 ‘앵정정(櫻井町)’이 병기됐다. 그 1년 사이에 참으로 많은 일이 벌어졌다. 해방된 시민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사건이 그 서울특별시 대저택들에서 벌어졌다. 대저택 이름은 각각 경교장, 돈암장, 혜화장과 벽수산장이다.
해방, 그리고 귀국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 천황 쇼와가 항복을 선언하는 라디오방송이 경성 시내에 흘러나왔다. ‘패전(敗戰)’ ‘항복(降服)’ 같은 명시적인 표현은 없었다. ‘4개국에 대하여 그 공동선언을 수락’ ‘잔학한 폭탄을 사용하여 빈번히 무고한 사람들을 살상’ 같은, 얼핏 들으면 뭔 말인지 알 수 없는 말이 가득했다. 다음 날에야 경성 사람들은, 조선인들은, 자기들이 해방됐음을 알게 되었다.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이 일제히 공개적으로 활동을 개시했다. 이미 총독부로부터 권력 인수를 제안받은 ‘건국동맹’ 지도자 여운형은 8월 15일 당일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광주에서 벽돌 공장 노동자로 은신해 있던 공산주의자 박헌영은 즉각 경성으로 올라와 8월 20일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준비위는 남조선노동당, 즉 남로당을 창당했다.
그리고 11월 23일 중국에서 활동하던 임시정부 요인 1진이 환국했다. 만인의 대환영 속에 귀국한 지도자 김구는 다음 날 조선중앙방송 라디오를 통해 “삼천만 동포의 지지를 받아 자주 독립 완성에 매진하겠다”고 선언했다.(1945년 11월 25일 ‘조선일보’) 1940년 강제 폐간 후 복간된 조선일보는 복간 사흘만인 11월 26일 1면에서 ‘김구 주석에의 기대 절대-국내 현실을 파악해 전선 통일이 요체’라고 주문했다. 이미 귀국해 있던 이승만이 김구를 만나 환국을 축하했고 여운형 또한 김구를 찾아가 덕담을 나눴다.
김구의 경교장
위 조선일보 기사 아래에 잘생긴 건물 사진이 게재돼 있는데, 사진 설명은 이러했다. ‘국민의 시청(視聽)이 집중되는 김구 선생 숙소’. 경성 서대문 죽첨정(竹添町)에 있는 2층 양옥이다. 사람들은 이를 ‘죽첨장(竹添莊)’이라고 불렀다. 식민시대 금광으로 떼돈을 번 금광왕 최창학이 1938년 지은 저택이다.
죽첨정(다케조에초)은 1884년 갑신정변 당시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 이름을 딴 지역이었다. 1946년 서울시헌장에 의해 을사조약 때 자결한 민영환 시호를 따 충정로로 이름이 바뀌었다. 최창학은 천만장자로 불렸다. 김구 비서였던 선우진에 따르면 임시정부환영회의 위원장 김석황이 최창학에게 부탁해 죽첨장을 김구에게 내줬다.(오동룡, ‘대한민국 건국 전야-건국의 아버지 백범’, 월간조선 2008년 1월 호) 친일 거부 저택을 받아들인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 기록이 없다.
나머지 임정 요인들은 옛 혼마치호텔인 충무로 한미호텔을 숙소로 사용했다. 1946년 말 주소 체계가 바뀌었어도 사람들은 죽첨장이라고 불렀다. 신문에서 죽첨장이라는 명칭은 1947년 중반까지 ‘경교장’과 혼용되다가 하반기에 가서야 사라졌다.
박헌영의 혜화장 그리고 벽수산장
광주에 은신해 있던 박헌영은 서울로 올라오자마자 혜화정에 자리를 잡았다. 혜화정에는 전라도 익산 함열 출신 거부 김해균이 사는 저택이 있었다. 갑부인 동시에 사회주의자인 김해균은 해방 전부터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공산주의자에게 경제적 후원을 하던 인물이었다.(김남식, ‘남로당연구’, 돌베개, 1984, p20) 김해균은 해방과 함께 박헌영에게 집을 내줬고, 그 집은 이후 혜화장이라 불렸다. 박헌영은 이곳에 조선공산당준비위원회를 설립했다. 박헌영은 ‘비슷하되 결이 다른’ 사회주의 계열인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와 합작해 조직 재건을 시도했다. 건국준비위원회 멤버는 차곡차곡 공산주의 계열로 메꿔졌다. 그리고 9월 6일 박헌영-여운형은 옛 경기여고(현 헌법재판소)에서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열고 ‘조선인민공화국(인공)’ 설립을 선언했다(경기여고는 한 달 뒤 정동으로 이사하고 창덕여고가 이 자리에 들어섰다). 9월 14일 인공이 발표한 내각은 주석에 이승만, 내무부장에 김구 등 제사상 웃기처럼 민족주의 세력이 있었을 뿐 절대 다수가 공산주의자들이었다. 강령에는 민족반역자 재산 몰수 및 주요 시설 국유화가 포함돼 있었다.
그 강령을 만들고 발표한 조선인민공화국 사무실은 경성 옥인정 47번지에 있었다. 바로 식민시대 문을 열고 그 시대 일신 영달을 위해 마음껏 살다간 친일 귀족 윤덕영이 지은 ‘경성 아방궁’ 벽수산장이 이들 공산주의 공화국 사무실이었다. 식민시대 말 윤덕영 일가가 일본 기업에 팔아버린 이 집을 수용해 새 나라 건국 사무실로 쓴 것이다.(정상윤, ‘건준 천하 20일’, 월간 4월 5권 제9호, 사월공론사, 1971. 손세일,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과 내무부장’, 월간조선 2010년 7월 호, 재인용) 10월에 귀국한 이승만은 11월 7일 조선인민공화국 주석 취임을 공식적으로 거부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선인민공화국’) 벽수산장은 전쟁 뒤 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 사무실로 쓰이다 1966년 화재로 사라졌다.
이승만과 돈암장
10월 16일 귀국한 이승만은 조선호텔에 여장을 풀었다가 다음날 돈암정(敦岩町)으로 거처를 옮겼다. 돈암정에는 자전거 타이어회사와 광산업으로 부자가 된 장진섭의 저택이 있었다. 황해도 출신인 민족주의계열 지도자 장덕수가 동향인 장진섭에게 부탁해 이뤄진 일이었다. 사람들은 당시 큰 저택 명칭에 유행하던 방식으로 이 집을 ‘돈암장(敦岩莊)’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장진섭은 이미 집을 내준 직후부터 “이승만이 측근들에 둘러싸여 자신을 비롯해 정치 자금을 제공한 경제인들을 멀리하고 있다”고 여기저기에 불만을 표시했다.(배진영, ‘이승만의 발자취 서린 돈암장과 마포장’, 월간조선 2017년 10월호)
결국 1947년 8월 이승만은 미군정 협조로 마포에 있는 옛 안평대군 정자 담담정(淡淡亭) 터이자 총독부 정무총감 다나카 다케오(田中武雄) 여름별장 자리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암살 기도 사건이 적발되면서 두 달 뒤 기업인들이 모은 돈으로 이화동 ‘이화장(梨花莊)’으로 이사했다.
해방, 그 혼돈과 미래
공산주의자는 자기네 이념을 좇아 사상의 건국을 추구했다. 민족주의 진영에서는 또 나름으로 민족 국가 건국을 추구했다. 35년 동안 소통이 단절된 채 벌였던 투쟁은 결국 갈등으로 폭발했다.
1946년 미국 언론인 마크 게인(M. Gayn)이 방한했다. 그가 꼼꼼하게 기록한 취재수첩과 수첩에 근거한 단행본 ‘재팬 다이어리(Japan Diary)’는 태평양전쟁 직후 한국과 일본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취재수첩 원문은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에 디지털화돼있다.
1946년 11월 7일 게인이 경교장을 방문했다. ‘일본이나 친일파와 불구대천의(irreconcilable) 적인 김구가 기자회견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친일파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묻자 김구는 특유의 무뚝뚝한(bluntness) 목소리로 이렇게 답했다. “사실상 조선에 있는 모든 사람은 친일파들이다. 모두 감옥에 보내야 한다(Practically everyone in Korea is a collaborator. They all ought to be in jail).”'(게인, ‘Japan Diary’, William Sloane Associates, 1948, p433)
게인은 ‘그런데 통역가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not even blinking) “조심스럽게 연구해야 할 문제(problem to be studied carefully)라고 하셨다”라고 통역했다’라고 기록했다. 국내파 독립운동가에 대해 임정요인들이 가지고 있던 이 같은 생각은 장덕수 평전인 ‘설산 장덕수’(이경남, 동아일보사, 1981, p329~332)에도 나와 있다. 1945년 12월 국일관에서 열린 임정요인 환영연에서 임정 측으로부터 ‘국내에 있던 사람은 크거나 작거나 간에 모두 친일파’라는 말이 튀어나오면서 극도의 갈등이 터져버렸다는 것이다. 여운형은 이같은 친일파 취급에 ‘혁명세력을 분열시키는 과오를 범하는 것’이라며 비난했다.(이만규, ‘여운형선생투쟁사’, 민주문화사, 1946, p226)
김구가 이 말을 한 곳이 옛 죽첨장인 경교장이었다. 마크 게인은 ‘그런 김구가 금광왕 저택에 살고 있다는 사실은 김구 또한 타협할 생각이 있다는 뜻’이라고 적었다.(게인, 앞 책, p434)
하지만 갈등은 해소되지 않았다. 무법천지였다. 1945년 12월 30일 송진우가 암살당했다.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이 암살당했다. 그해 12월 2일 장덕수가 암살당했다.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암살당했다. 범인들은 검거됐지만 배후는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런 갈등을 안고 1948년 대한민국이 섰다. 여전한 갈등 속에 지금 우리가 산다. 여기까지 해방 직후 벌어졌던, 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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