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의 정점에서 화려한 축제와 북적이는 관광지도 좋지만,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연 속에서 고요히 머물고 싶은 날이 있다.
전남 담양, 고요한 숲길을 따라 들어선 끝자락에서 마주하게 되는 이 정원은, 그 바람과 소리만으로도 한 사람의 마음을 다 씻어내는 힘을 지닌다.
여름이면 배롱나무꽃이 흐드러지는 이곳, 조선 선비의 품격이 살아 숨 쉬는 명옥헌 원림이다.

담양군 고서면에 자리한 명옥헌 원림은 국가 명승 제58호로 지정된 조선 중기의 정원이다. ‘명옥헌(鳴玉軒)’이란 이름은 “구슬이 부딪혀 울리는 듯한 맑은 물소리가 들리는 집”이란 뜻.
실제로 이 정자에 앉아 있으면 계곡물이 흐르는 소리가 귓가를 감싸며 마음까지 정화시킨다.

조선 선비 오희도가 세속을 떠나 자연에 귀의하며 지은 이 정원은, 인공미보다 자연의 이치를 따르는 데 중점을 뒀다.
네모난 연못은 산세를 거스르지 않고 자연의 물길을 그대로 받아들여 만든 것이며, 화려한 조경 대신 초목과 바위, 계곡의 흐름을 있는 그대로 품었다.
이곳을 찾는 이들은 입장료 없이, 시간의 흐름만 느끼며 조선의 여름으로 들어선다.

명옥헌 원림의 중심은 바로 ‘방지(方池)’라 불리는 네모난 연못이다. 이는 동양의 전통 우주관인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 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공간이다.
연못 가운데 둥글게 조성된 섬 위에 심어진 소나무 한 그루까지도 우연이 아닌 깊은 철학의 산물이다.
정자 마루에 앉아 있으면 산과 나무가 연못 수면 위로 비치고, 이는 인간이 자연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스며드는 ‘차경(借景)’의 미학을 실현시킨다. 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스치는 순간 이곳이 왜 ‘명옥헌’인지 온몸으로 깨닫게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명옥헌 원림이 가장 화려해지는 시기는 바로 여름 한가운데다. 7월부터 9월까지, 정자 주변과 연못을 따라 수십 그루의 배롱나무가 붉은 꽃을 피우며 방문객을 맞는다.
이 꽃은 ‘백일홍’이라는 이름처럼 무려 100일간 붉은 빛을 유지하며, 정원의 녹음 위에 찬란한 붉은색을 얹는다.
그러나 이곳에서 배롱나무가 주는 감동은 단순히 눈으로 보는 데 그치지 않는다. 바람이 불면 꽃잎은 흩날려 연못 위에 하나둘 내려앉고, 수면은 붉은 카펫처럼 물들어 간다.
움직이는 것이 거의 없는 고요한 정원에, 꽃잎 하나가 떨어질 때마다 생기는 잔물결이 더없이 섬세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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