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친척집에 맡겨져서 자란 사람들의 특징
밥 먹고 살기가 빠듯했던 부모님과 떨어져 살던 나는 잊을 만하면 시골 큰집으로 오셔서 얼굴만 비추는 아버지가 싫었다. 막연하게 ‘오늘은 날 집으로 데리고 갈지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오시면 멀리 떨어져 사는 아들이 건강하게는 자라고 있는지 눈으로 확인하는 게 전부였다. 나는 그 시선에 몸 둘 바를 몰랐다. 내 존재를 확인하고 살피는 누군가라니…
나도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큰엄마 큰아빠를 엄마 아빠라고 부르며 자랐기에, 진짜 아빠가 왔지만 호칭을 어찌해야 될지 몰라 헤매기 일쑤였고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몰라서 몸을 배배 꼬고 바닥만 쳐다봤던 것 같다.
감정적인 교류는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은 컸다. 성장 과정을 전혀 지켜보지 못했던 탓에 아버지는 생소한 질문을 던질 때가 있었지만 기를 쓰고 어떻게 해서든 원하는 답을 들려주고 싶었다.
가장 황당한 질문은 ‘태규는 공부 같은 걸 잘 하니?’였다. 분교가 겨우 하나 있는 시골 마을에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이 있을 리 만무하다. 이제 겨우 의사소통이 가능한 5살 아이에게 공부라니.
그렇지만 온 힘을 다해서 잘 보이고 싶었던 나는 부리나케 친척 형과 누나들의 공책과 연필을 가져와 ‘봉, ㅌ, 구' 세 글자를 열심히 써서 보여줬다. 딱히 칭찬을 듣지는 못했지만 최선을 다한 퍼포먼스였다.
아버지는 이른 저녁식사를 하시고는 어김없이 나늘 작은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잠을 재우셨다. 절대 잠들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가끔 보는 아버지와 어색하게 단 둘이 있으면 긴장을 해서인지 금세 눈이 스르륵 감겼다. 번쩍 놀라 잠을 깨고 방을 둘러보면 어김없이 아버지는 떠나고 없으셨다.
혹시라도 아버지를 쫓아갈 수 있을까 싶어 울면서 쫓아가려고 할 때마다 우악스러운 할머니 손이 나를 붙잡았다. 그만 뚝 그치라고 엉덩이를 때리는 건 덤이었다. 그나마 내가 금세 그치면 손바닥에서 멈추지만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엉엉 울면 몽둥이를 들고 나를 다그쳤다. 그런다고 해서 한번 터져버린 울음이 그칠 리가 없지만 할머니는 매번 무섭게 몰아부치셨다.
차라리 오지 말지… 이럴 거 왜 왔을까… 바보같이 뭐가 그렇게 좋다고 금세 잠이 들었을까…
할머니에게 한바탕 혼이 나고 목구멍에서 꺼이꺼이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울음이 쉽게 그쳐지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으면 또 혼이 날 것이 뻔하기에 기를 쓰고 참아본다. 그럴 때 나도 모르게 “아빠… 아빠…!” 하는 말이 튀어나온다. 나를 버려두고 도망간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울고 있는데 그걸 진정시키고 멈추게 하는 단어도 아빠라니.
오랜만에 마주하는 아버지를 보면 ‘아빠'라고 부르지 못했다. 막연하게 그리웠던 존재가 앞에 나타나니 그 감정을 수습하기 벅찼다. 그럴 때 사람은 평상시 생활에서 가장 익숙했던 행동이 나온다.
당시에 나에게 익숙했던 엄마 아빠는 큰엄마 큰아빠였고 어색한 마음에 진짜 아빠를 앞에 두고 나는 익숙한 두 사람만 찾았다.
아버지가 떠난 걸 보고 그제야 급한 마음에 아빠라고 불러봤지만 너무 늦어버렸다. 울음을 참으려고 불렀던 아빠는 그렇게 튀어나왔다. 미안하고 미안해서. 부리나케 가셨던 아버지도 나와 비슷한 마음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미안하고 미안한.
다음에도 아버지는 잊을 만하면 오셨고 그때도 여전히 나는 아빠라고 불러드리지 못했다.
*위 이야기는 배우 봉태규의 실제 어린 시절을 담은 글입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서 기본적으로 애정 결핍이 있는데, 이 결핍이 관계성과도 이어지고 결국 아이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더라고요. 부모 자식 간의 관계를 넘어 타인과 관계를 맺을 때도 마찬가지고요.
단순히 내 문제만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버지 이야기를 하면서 생각을 풀어내고 싶었어요. _채널예스 인터뷰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