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PBA 2026-27시즌 개막전 32강은 사실 한슬기에게 쉬운 판이 아니었다. 수치만 보면 그렇다. 애버리지 1.063. 3쿠션 투어에서 이 숫자는 공격력 면에서 평균 이상이다. 그런데도 경기는 세트스코어 2-1 우위에서 4세트를 내주는 방향으로 흘렀고, 결국 다섯 차례의 승부치기를 거쳐야 비로소 결판이 났다. 경기 내용을 복기할 때 중요한 건 한슬기가 이겼다는 사실이 아니다. 왜 이 경기가 그토록 길어졌는가다.

상대는 정수빈(NH농협카드)이었다. 월드챔피언십 출전 경험을 보유한 선수로, 지난 시즌 리그에서 중위권에 안착해 있던 이름이다. 리그 미디어가 이번 시즌 "첫 우승 후보" 중 하나로 지목한 선수이기도 하다. 반면 한슬기는 2024년 팀리그에서 방출됐다. 에스와이 바자르 소속으로 복식 전문 역할을 하다가 단 1시즌 만에 엔트리에서 제외됐다. 이후 비팀리거로 투어를 이어왔고, 2025-26시즌에는 상금 랭킹 20위, 비팀리거 중 전체 2위라는 수치로 자신의 위치를 다시 확인시켰다. 그리고 이번 시즌 하나카드 소속으로 팀리그에 복귀했다.
이번 개막전 32강의 구도는 그 자체로 흥미롭다. 한슬기는 1세트를 11이닝 만에 11-6으로 가져갔다. 8이닝 이후 1-2-1-1의 연속 득점 흐름은 공격의 리듬이 잡혀 있다는 신호였다. 그러나 2세트에서 초반 정수빈의 3연속 득점에 1-7로 끌려가며 리듬이 무너졌다. 따라붙긴 했으나 후반 정수빈의 1-2-1 연속타에 다시 역전당하며 세트를 내줬다. 세트마다 초반 전개가 갈렸다. 누가 먼저 흐름을 가져가느냐의 싸움이었고, 그 싸움은 4세트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됐다.
3쿠션에서 세트 초반 흐름의 중요성은 수치로도 확인된다. 이날 경기에서 한슬기가 리드를 지킨 세트(1, 3세트)와 정수빈이 선점한 세트(2, 4세트)의 결과는 그대로 세트 승패로 연결됐다. 3세트에서 한슬기가 하이런 7점타를 선공에 성공시킨 것은 단순한 행운이 아니다. 직전 2세트 패배 직후 선공권을 잡은 상황에서의 고점 득점은 정신적 리셋의 실행 여부를 보여주는 지표다. 이것이 한슬기가 팀리그 방출 이후에도 투어에서 상위권을 유지한 이유 중 하나다.

승부치기 국면은 또 다른 변수였다. 5번의 승부치기 가운데 한슬기는 첫 공격에서 득점에 실패했다. 무실점 선공이었지만 정수빈도 첫 공격을 실패했고, 이후 양측이 번갈아 1점씩 주고받으며 1-1 동점에 이른 뒤 두 차례 연속 무득점이 이어졌다. 5번째 시도에서 한슬기는 뒤돌리기 대회전을 성공시켰다. 이후 정수빈이 길게 비껴치기를 시도했으나 실패하며 종료됐다. 총 5회의 승부치기를 거쳤다는 건 양측 모두 정상 경기력에서 멀어진 상태였다는 뜻이다. 집중력 소모가 누적된 상황에서 한슬기가 먼저 결정적 샷을 성공시켰다.
개막전이기 때문에 이 경기에서 얻을 수 있는 데이터는 제한적이다. 애버리지 1.063은 하루의 수치다. 그러나 맥락은 다르다. 팀리그 방출 이후 비팀리거로 리그를 버티다가 하나카드 유니폼을 입고 첫 대회에 나섰고, 팀리그 복귀 첫 대회 첫 경기에서 16강행을 확보했다. 상금과 랭킹 포인트가 아닌 소속팀의 이름을 달고 치른 경기였다.

이번 시즌 한슬기의 성적을 판단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개막전 16강은 출발점이다. 문제는 다음 경기다. 16강에서 만날 상대와 그 대진에서 자신의 애버리지를 어느 수준에서 유지하는지, 특히 세트 초반 선점력이 일관되게 발휘되는지가 기준이 될 것이다. 지난 시즌 8강 진출은 증명이었다. 이번 시즌은 증명 이후의 첫 시험이다.
방출 이력을 가진 선수가 팀리그에 재합류해 개막 무대에서 곧바로 16강에 오른다. 수치는 이미 그가 팀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걸 말해왔다. 리그가 그 판단을 뒤늦게 따라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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