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드민턴 팬이라면 최근 세계 랭킹 발표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을 것이다. 2주 연속 우승이라는 말 그대로 완벽한 출발을 했는데도, 숫자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말레이시아 오픈에 이어 인도 오픈까지 연달아 정상에 오른 안세영. 그런데도 세계 랭킹 2위 왕즈이와의 점수 차는 “확” 벌어지지 않았다. 일부 팬들은 “이게 말이 되느냐”고 반응했고, 또 다른 쪽에서는 “랭킹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이 상황은 이상 현상도, 오류도 아니다. 오히려 세계배드민턴연맹, 즉 세계배드민턴연맹(BWF)의 랭킹 산정 방식이 가진 구조적 특성이 그대로 드러난 장면에 가깝다. 이번 일을 이해하려면 ‘우승하면 점수가 쌓인다’는 단순한 생각부터 잠시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BWF 세계 랭킹의 핵심은 누적이 아니라 교체다. BWF는 최근 52주, 즉 1년 동안 치른 대회 성적만을 기준으로 랭킹 포인트를 계산한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참가한 모든 대회를 더하지 않는다. 오직 점수가 가장 높은 상위 10개 대회 성적만 합산한다. 이 두 가지 규칙이 합쳐지면, 이번처럼 겉으로 보기엔 “충격적인” 결과가 충분히 나올 수 있다.

먼저 52주 규칙부터 보자. 작년 이맘때 얻은 성적은 정확히 1년이 지나면 자동으로 효력이 사라진다. 작년 인도 오픈에서 안세영이 우승하며 받은 1만1천 점은, 올해 인도 오픈이 끝나는 시점에서 더 이상 랭킹에 남지 않는다. 그런데 올해 인도 오픈에서도 다시 우승했다면 어떻게 될까. 점수가 추가되는 게 아니라, 빠질 점수를 그대로 다시 채우는 구조가 된다. 통장에 새 돈이 들어온 게 아니라, 빠져나갈 돈을 막아 세운 셈이다. 그래서 총점은 그대로다.
여기에 상위 10개 대회 규칙이 더해진다. 이미 10개의 고득점 대회로 랭킹이 꽉 찬 선수는, 아무리 대회를 더 뛰어도 기존 기록보다 낮은 점수라면 랭킹 합계에 아예 반영되지 않는다. 강자일수록 “더 잘해야 겨우 유지”가 되는 이유다. 안세영처럼 이미 세계 정상급 성적을 10개나 쌓아둔 선수에게는, 매 대회가 도전이 아니라 방어전에 가깝다.

이번 사례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면 구조가 분명해진다. 안세영은 말레이시아 오픈(슈퍼1000) 우승으로 1만2천 점을 챙겼고, 인도 오픈(슈퍼750)에서도 1만1천 점을 얻었다. 수치만 보면 엄청난 성과다. 하지만 인도 오픈의 경우, 작년에도 우승했던 대회다. 결국 작년 점수 1만1천 점이 빠지는 시점에, 올해 같은 점수로 교체되면서 총점은 유지됐다. “2연속 우승인데 왜 그대로냐”는 질문의 답은 여기에 있다.
왕즈이의 경우도 비슷하다. 그녀 역시 지난 1년간 우승과 준우승을 고르게 쌓아 상위 10개 대회 기록이 이미 탄탄했다. 이번 인도 오픈 준우승 성적이 기존 상위 10개 기록을 밀어낼 만큼 더 높지 않았기 때문에, 총점이 유지되는 결과가 나왔다. 즉, 두 선수 모두 잘해서 점수가 안 오른 상황이다. 못해서가 아니라, 이미 너무 잘해둔 탓이다.

이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가장 큰 역설은 여기서 나온다. 강자는 늘 불리해 보인다. 우승을 해도 점수가 그대로인 주가 생기고, 준우승만 해도 오히려 점수가 깎이는 구간이 나타난다. 반면 상위 10개 기록이 아직 덜 찬 선수는, 4강이나 준우승만으로도 랭킹이 눈에 띄게 오른다. 그래서 팬 입장에서는 “이상하다”고 느끼지만, 시스템 안에서는 매우 일관된 계산이다.
그렇다면 이 구조가 안세영에게 불리하기만 할까. 꼭 그렇지는 않다. 이 방식은 꾸준함을 무엇보다 중시한다. 한두 번 반짝 우승하는 선수보다, 1년 내내 상위권에 머무는 선수가 더 강한 랭킹을 갖게 된다. 안세영이 오랫동안 1위를 지킬 수 있었던 것도, 이 구조 덕분에 흔들림이 적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 대가로, 압도적인 우승 행진조차 숫자로는 즉각 드러나지 않는 순간이 생긴다.

앞으로 관전 포인트는 분명하다. 안세영이 작년에 우승하지 못했거나, 비교적 낮은 성적에 그쳤던 대회에서 이번 시즌 정상에 오른다면, 그때는 ‘유지’가 아니라 순증이 발생한다. 특히 슈퍼1000급이나 월드투어 파이널 같은 고득점 대회에서 성적을 업그레이드하면 격차는 단숨에 벌어질 수 있다. 반대로 작년 성적이 너무 좋았던 대회들은, 올해도 비슷한 결과를 내야만 제자리를 지킬 수 있다.
이번 “충격적인 랭킹 유지”는 안세영의 위상이 흔들린 신호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랭킹 시스템이 그녀를 ‘방어해야 할 절대 강자’로 취급하고 있다는 증거에 가깝다. 숫자가 움직이지 않았다고 해서, 우승의 가치가 줄어든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가치를 읽어내는 방식이 생각보다 복잡할 뿐이다.
Copyright © 구독과 좋아요는 콘텐츠 제작에 큰 힘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