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볼 팔고 김밥 말고… 수제맥주, 너 정체가 뭐니? [분석+]
오래 못 간 수제맥주 첫번째 붐
하이볼 생산하는 수제맥주 업체들
수제맥주 최초 상장사 제주맥주
美 인기 끈 냉동김밥 업체 인수
수제맥주 업체의 탈 수제맥주
두번째 붐 일으킬 수 있을까…
2021년 정점을 찍은 수제맥주의 인기를 이어받은 건 '하이볼'이다. 위스키에 탄산수 등을 섞은 하이볼이 수제맥주가 차지하고 있던 편의점 매대를 채우고 있다. 이렇게 하이볼의 인기가 높아지자 주류업체들이 편의점과 손잡고 하이볼을 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수제맥주는 이제 끝난 걸까.
"지금 가장 인기 있는 주류는 하이볼이다." 롯데멤버스의 리서치 플랫폼 '라임'이 주류 트렌드를 조사한 결과, 올해 가장 인기 있는 주류로 하이볼(25.6%)이 꼽혔다. 이런 트렌드를 가장 빠르게 확인할 수 있는 채널은 편의점이다. 편의점 CU(BGF리테일)에선 올해 1월 하이볼 매출 비중(38.6%)이 와인(25.4%), 양주(36.0%)를 처음으로 넘어섰다.
세븐일레븐(코리아세븐)에선 올해 1~7월 하이볼 매출액이 전년 동기 대비 8배가량 증가했다. 최근 수년 새 외식시장에서 하이볼의 인기가 높아지자 편의점업계와 주류업계가 앞다퉈 하이볼 제품을 출시한 결과다.
눈여겨볼 점은 그 대열에 수제맥주 업체도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곳이 국내 수제맥주 1세대로 꼽히는 카브루(2000년 설립)와 세븐브로이(2003년 설립)다. 이들 업체는 지난해 3월과 4월 각각 첫번째 하이볼 제품 '이지 블루하와이 하이볼' '블랙 네온 하이볼 레몬 토닉'을 출시했다. 이후 하이볼 라인업을 지속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특히 세븐브로이는 지난 7월 "위스키 사업을 본격화한다"는 계획을 밝힌 데 이어 8월엔 세븐일레븐과 함께 '하이볼에 빠진 자몽&레몬'을 출시했다. 세븐브로이 측은 "변화하는 주류시장에 유연하게 대응하기 위해 하이볼 제품을 선보였다"면서 "종합음료기업을 지향해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변신을 꾀하는 수제맥주 업체는 또 있다. 수제맥주 업계 최초로 코스닥 시장에 상장(2021년)한 제주맥주다. 지난 4월 창업주의 손을 떠나 자동차 수리전문업체 더블에이치엠에 인수된 제주맥주는 뜻밖의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최근 미국에서 인기몰이 중인 '냉동김밥' 시장에 뛰어든 건 단적인 사례다.
제주맥주는 지난 7월 80억원가량을 투자해 냉동김밥 제조업체 올곧(에이지에프)의 지분 17.39%를 인수했다. 언급했듯 올곧은 미국 시장을 필두로 냉동김밥을 수출하고 있다. 회사 관계자는 "사업다각화 차원에서 최근 해외에서 인기가 높아진 냉동김밥 제조업체를 인수했다"면서 "(올곧은) 올해 미국 코스트코에 제품을 입점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수제맥주 업체들이 또다른 우물을 파는 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2014년, 2020년 주세법 개정으로 '수제맥주 붐'이 일었지만, 금세 수그러들었기 때문이다.[※참고: 2014년 주세법 개정으로 영업장 안에서만 판매할 수 있었던 수제맥주의 외부 유통이 허용됐다. 2020년엔 맥주의 세금 부과 방식을 기존 종가세(출고가 기준)에서 종량세(출고량 기준)로 전환했다. 제품원가가 높은 탓에 세금부담이 컸던 수제맥주 업체로선 가격 경쟁력을 높일 수 있었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수제맥주 인기가 '거품처럼' 꺼진 이유는 별다른 게 아니다. 편의점 업계와 손잡고 '컬래버' 제품을 쏟아낸 게 부메랑으로 되돌아왔다. 발단은 '곰표밀맥주'였다. 세븐브로이와 CU, 대한제분이 함께 출시한 레트로 콘셉트의 곰표밀맥주는 품귀현상을 빚을 만큼 인기를 끌었다.
이후 수제맥주 업체들은 유통·식품·프랜차이즈 등 업종을 불문하고 컬래버 제품을 쏟아냈다. 불어난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에도 뛰어들었다. 세븐브로이·제주맥주 등은 2021년부터 대기업 주류업체 '롯데칠성음료'를 통해 '제주위트에일' '대표밀맥주' '골든에일'과 같은 제품을 위탁생산해 판매했다. '소규모 양조장에서 생산하는 개성 있는' 수제맥주라는 틀을 스스로 벗어난 셈이다.
문제는 생산량은 급증했지만 이를 뒷받침할 수요가 갈수록 쪼그라들었다는 점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출시되는 컬래버 수제맥주에 식상함을 느끼는 소비자가 늘어난 탓이었다. '맥주 4캔 1만원'이 일상화한 편의점 시장에서 경쟁하기 위해 재료비를 절감하고, 그 과정에서 대기업 맥주와 맛·품질 차별성이 흐릿해진 게 패착이었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그 결과, 국내 수제맥주 시장 규모는 2017년 433억원에서 2021년 1520억원으로 251.0% 급성장했지만 내실 있는 성장을 거둔 수제맥주 업체는 드물었다. 일례로 세븐브로이의 매출액은 2020년 72억원에서 이듬해 402억원으로 458.3% 증가했지만 2023년 매출액은 123억원에 그쳤다. 같은 기간 영업이익은 3억원, 118억원, -61억원으로 롤러코스터를 탔다. 적자의 늪에 빠졌던 카브루와 제주맥주는 지난해에도 각각 8억원, 110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수제맥주 업체들이 하이볼이나 냉동김밥 시장에 뛰어드는 건 불가피한 결정이란 분석이 나온다. 서용구 숙명여대(경영학) 교수는 "주류시장 트렌드가 수제맥주에서 하이볼로 넘어간 만큼 전략적인 선택을 내린 것"이라면서 "생산량은 늘렸지만, 수제맥주로서 브랜드력이 약하다 보니 인기를 끄는 하이볼 생산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수제맥주 1세대라 불리는 업체들이 '정체성'을 상실한 것 아니냔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 이은희 인하대(소비자학) 교수는 "수제맥주에 전력투구하기엔 시장 상황이 녹록지 않은 게 사실"이라면서도 "이럴 때일수록 1세대 업체들이 높은 퀄리티를 유지하고, 원재료의 특성을 살린 프리미엄 수제맥주라는 정체성을 공고히 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어 보인다"고 꼬집었다.
그렇다면 하이볼에 자리를 내준 수제맥주는 또 다른 부흥기를 열 수 있을까. 가능성은 없지 않다. 편의점 등 유통채널에 의존한 첫번째 수제맥주 붐을 반면교사로 삼으면 새로운 전기를 열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윤한샘 한국맥주문화협회 협회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수제맥주 시장의 성장을 이끌었던 기존 업체들이 종합주류회사로 나아가고 있다면, 생산규모는 작지만 로컬의 특성을 살린 독립적인 '크래프트 비어(craft beer·수제맥주)' 브랜드들이 꾸준히 성장하면서 시장이 분화하고 있다. 이런 크래프트 맥주 브랜드들이 '문화' 자체를 즐기는 MZ세대의 선택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개별 브랜드들이 큰 폭의 성장을 이루기는 어렵더라도 여러 크래프트 비어 브랜드들이 하나의 신(scene)을 이뤄 함께 성장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장명재 한국수제맥주협회 사무국장도 "다양한 양조장이 '개성'과 '다양성'을 지키면서 지역에 뿌리를 둔 로컬 양조장으로서 성장해가고 있다"면서 "국내 양조장이 세계적 맥주 대회인 '월드비어컵' '유로피언 비어스타' 등에서 입상하는 등 질적인 성장을 이뤄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수익성을 노린 컬래버 전략 때문에 첫번째 '붐'을 놓친 수제맥주는 과연 두번째 붐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이지원 더스쿠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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