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냐, 윌은 빠지지 않을 거야”
지미 키멜(57)이라는 인물이 있다. 미국 코미디언이다. ABC-TV의 간판 ‘지미 키멜 쇼’의 진행자이기도 하다.
벌써 22년 된 장수 토크쇼다. 트럼프 대통령이 극도로 싫어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것 때문에 시비가 자주 벌어진다. (외부 압력으로) 잠시 방영이 중지되기도 했다.
아무튼.
그곳에 다저스 멤버 5명이 초대됐다. 바로 엊그제(현지시간 4일) 일이다. 데이브 로버츠 감독, 타일러 글래스나우, 블레이크 스넬, 윌 스미스, 키케 에르난데스가 출연했다.
3차전 얘기가 나왔다. 연장 18회까지 갔던 경기다.
키멜 “윌(스미스), 홈 플레이트 뒤에 쪼그려 앉아서 그 경기를 다 뛰었다.”
(출연자, 방청객 모두 웃음)
키멜 “우리가 찾아봤다. 스쿼트 가장 오래 한 기록이 2시간 47초다. 그런데 그 게임은 6시간 39분이 걸렸다.”
스미스 “맞다. 정말 길었다. 너무 길었다.”
키멜 “어떤 느낌이었나.”
스미스 “13회부터 다리에 경련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물과 음식을 조금씩 먹으면서 버텼다.”
이때 감독이 끼어든다.
로버츠 “트레이너에게 보고가 들어왔다. ‘윌(스미스)이 경련 때문에 곤란하다. 경기에서 빼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이렇게 대답했다. ‘아냐, 윌은 빠지지 않을 거야.’”
(윌 스미스도 동의한다. “맞다.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다저스의 플러팅 “몸 푸는 척만”
그다음이다. 투수 얘기가 나온다.
키멜 “(18회까지 가면서) 더 이상 던질 투수가 없으면, 누굴 마운드에 보내게 되냐.”
로버츠 “(옆에 있던 키케를 가리키며) 이 친구나 미게로(미겔 로하스)가 나갔을 것이다. 그런데 13회쯤이다. 하루인가 쉰 야마모토가 얘기하더라. ‘월드시리즈에서 야수를 던지게 할 수는 없다. 내가 나가겠다’라고.”
키멜 “정말 그렇게 하려고 했나.”
로버츠 “그때 윌(클라인)이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4이닝을 막아준 게 정말 컸다. 그 사이에 야마모토도 준비를 마쳤다. 만약 프레디(프리먼)의 끝내기가 없었다면, 그가 (19회에) 올라갔을 것이다.”
3차전에는 그래도 낫다. 본인이 직접 의사를 밝혔다. 그나마 완투 후에 하루 쉬는 날이 있었다.
그런데 7차전에서는 달랐다. 이미 전날(6차전) 96개를 던졌다. 바로 다음 날 또 나간다는 생각조차 못했다. 스승인 트레이너(야다 오사무)에게 “한 해 동안 감사했다”라고 마무리 인사까지 마쳤다.
하지만 세상 일이 다 그렇다. 뜻대로 풀리는 법 없다. 또다시 연장 혈투가 벌어진다. 이미 다저스는 손을 다 써 놨다. 일종의 플러팅이다.
아마도 이런 식이었던 것 같다. ‘불펜에 가서 몸 푸는 척만 해라. 그것 만으로도 주는 메시지가 있을 것이다.’ (혹시 선동열의 전설을 들었는지 모르겠다.)
순진한(?) 야마모토가 넘어간다. ‘그런가? 그럴 수도 있겠군.” 그러면서 슬슬 준비하는 시늉을 낸다. 스트레칭하고, 가볍게 몇 개 뿌려본다. 하다 보니 스스로 찌릿한다. ‘어라, 왠지 던질 수 있을 것 같다.’

남은 투수가 6명이나 있었는데…
결국 ‘GO’ 사인이 나온다. 9회 말 1사 1, 2루였다. 불펜 문이 열린다. 천근만근 무거운 발걸음이 마운드로 향한다.
이때만 해도 몰랐다. ‘그냥 1이닝 정도만 막아주면 되겠지.
24년 전의 일이 떠오른다. 전설의 랜디 존슨이다. 월드시리즈(2001년 D백스-양키스) 6차전의 승리투수다. 다음 날 7차전에도 등판한다. 8회에 나가서 아웃 4개를 잡아냈다. 덕분에 팀은 역전에 성공했다.
그러니까 천하의 투수도 ‘0일 휴식’ 후 1.1이닝이 최대치였다.
하지만 달콤한 상상은 금물이다. 야마모토에게는 훨씬 더 독한 일이 벌어진다. 9회 말은 힘겹게 막았다. 10회 말도 어찌어찌 버텼다.
그런데 11회 말에도 또 올라간다. 이때부터는 호러/서스펜스물로 장르가 바뀐다.
선두 타자(블게주)가 2루타로 나간다. 무사 2루에서도 안 바꾼다. 위기는 점점 깊어진다. 1사 만루까지 된다. 여기서도 꿈쩍도 않는다. 마치 교체라는 단어를 잊은 것 같다. 감독은 팔짱만 끼고 있을 뿐이다.
뒤에 남은 투수가 없나? 천만에, 만만에다. 블레이크 트라이넨, 사사키 로키, 클레이튼 커쇼, 윌 클라인, 잭 드라이어, 에드가르도 엔리케스…. 무려 6명이나 대기 중이다.
그런데 불안한 전력이다. 혹은 실패한 자들이다. 그쪽으로는 아예 눈길도 주지 않는다. 오직 앞만 본다. 흔히 하는 표현이다. 그야말로 갈아 넣는다. 너무나 냉정하고, 가혹하다. 섬뜩한 광기마저 느껴진다.

“Nice guys finish last”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2016년 이맘 때다. 한국시리즈가 싱겁게 끝났다. 두산 베어스가 NC 다이노스를 4승 무패로 압도했다.
승자는 환호한다. 원정 구장은 온통 그들의 무대가 된다. 유희관이 아이언맨으로 변신했다. 헹가래가 이어진다. 갈채와 환호가 창원 구장을 가득 메운다.
그러나 뭔가 이상하다. 우승팀 감독의 표정이 영 별로다. 왠지 어둡고, 그늘이 가득하다. 급기야 카메라 앞에서 일이 벌어진다. 축하 인터뷰 자리 아닌가. 갑자기 눈물을 글썽인다.
“마음이 한편으로는 무겁고 착잡하다. 야구라는 게 항상 1등만 있다. 그런 여러 가지 부분들이 스치고 지나간다.”
2년 차였던 김태형 감독의 말이다. 다음 대목에서 숙연해진다.
“(상대팀) 김경문 감독님 생각이 난다. 우리나라 800승 감독이신데…. 그냥 뭔가 마음이 작년(2015년 우승 때)과 많이 다르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2016년의 패장은 감독은 이번에도 준우승에 그쳤다. 어느 정도 전력 차이는 있었다. 2위라는 핸디캡도 분명했다.
그래도 더 버텨야 했다. 훨씬 더 치열한 승부여야 했다. 너무나 속절없었다. 너무나 허무하게 무너졌다. 이유는 명확하다. 치명적인 투수 기용 실패다. 거기서 모든 게 허물어졌다.
1948년의 일이다. 뉴욕 자이언츠(현재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가 시즌 중에 사령탑을 교체한다. 물론 문책성이다.
전임자 멜 오트는 호인이다. 매너가 좋고, 선수들과도 잘 지냈다. 반면 신임 리오 듀로서는 악명 높았다. 강한 기질 탓에 주변과 마찰이 잦았다.
취임식 때다. 어느 기자가 이런 말을 한다. “멜 오트 감독이 참 안 됐네.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그러자 듀로서가 까칠하게 반응한다. “그렇지. 그러니까 성적이 이 모양이겠지.”
정확한 워딩은 이렇다. “Nice guys finish last.” 이 말은 훗날 자신의 자서전 제목이 됐다. 고인이 되신 이종남 기자가 이렇게 번역했다.
“사람 좋으면 꼴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