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구 삼성동의 봉은사(奉恩寺)는 서울의 대표적 도심사찰로서 불자는 물론 일반 관광객도 즐겨 찾는 명소다. 봉은사는 조선 11대 중종(재위 1506~1544)의 세 번째 부인 문정왕후(1501~1565)와 깊은 인연이 있다.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문정왕후는 아들 명종(재위 1545~1567)이 12세로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하면서 불교중흥을 선포한다. 봉은사를 중흥의 중심도량으로 삼고 설악산 백담사의 보우(1509~1565)를 불러들여 주지에 임명한다. 그녀는 폐지됐던 선교양종(禪敎兩宗·불교 양대 종파)을 부활하고 승과(僧科·승려시험)도 재개했다. 승과는 봉은사에서 거행됐고 시험이 있을 때면 봉은사 앞 벌판은 수천명의 승려가 가득 메웠다. 이로인해 삼성동 일대는 ‘중의벌’, 한자로는 ‘승과평(僧科坪)’으로 불렸다.
그녀가 부활시킨 승과를 통해 서산대사(휴정·1520~1604), 사명당(유정·1544~1610) 등 걸출한 인재가 등용됐다. 서산대사는 임진왜란 때 승군을 지휘하며 평양성전투 승리에 결정적 기여했으며 사명당 역시 평양성전투 등 다수의 전투에서 전과를 올렸고 종전 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인 포로 3000여 명을 데려왔다. 봉은사는 뜻밖에도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내세운 조선시대(세종때) 창건된 절이다. 세종의 5남 광평대군(1425~1445)의 부인 신 씨가 남편의 명복을 빌며 처음 지었고, 1498년(연산군 4) 성종의 세 번째 부인이자 중종의 어머니인 정현왕후(1462~1530)가 남편 무덤(선릉·宣陵)의 원찰(願刹)로 중창했다.
유교국 조선에서 불교 오히려 성행···성종때 전국 사찰 수 1만개 넘어
조선은 유교국을 천명했지만 전조의 불교유습을 청산하지 못했다. <성종실록> 1480년(성종 11) 10월 26일 기사는 “양종에 소속된 사찰을 헤아려보면 그 수가 1만보다 적지 아니하고…”라고 했다. 건국한지 100년이 다됐는데도 여전히 전국의 절이 1만개가 넘는다니 놀랍다.
귀천을 막론하고 인간은 누구나 살아 부귀와 무병 등 길운을 바라고 죽어서는 명복을 염원한다. 자기수양을 강조하는 유교는 이에 대한 본질적인 해답을 주지 못했고 따라서 지속적인 국가적 탄압에도 불교는 소멸하기는 커녕 오히려 성행했다. 불교 대중화의 중심에는 역설적으로 조선왕실이 있었다.
조선은 건국과 동시에 궁궐과 사직, 종묘가 있는 한양 도성 안에 화려하고 거대한 왕실 원찰을 짓기 시작했다. 수도건설 후 가장 먼저 건립된 조선왕실의 정식 원찰은 흥천사(興天寺)였다. 태조 이성계(재위 1392~1398)는 두번째 부인 신덕왕후(1356~1396)가 죽자 정릉(貞陵)을 조성하며 능침사(陵寢寺)인 흥천사를 건설했다. 정릉 터는 영국대사관, 흥천사는 덕수초교 일대로 추정한다. 흥천사는 금빛 단청이 빛나는 화려한 외형을 자랑했고 부처사리도 봉안했다. 외국사신이 오면 가장 먼저 관람했고 그들의 접대장소로 활용됐다. 그러나 1409년(태종 9) 태종 이방원(재위 1400~1418)에 의해 신덕왕후가 후궁으로 강등되고 정릉도 파헤쳐져 도성 밖(성북구 정릉동)으로 이장된다. 흥천사는 능침사로서 기능을 상실한 채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다가 1510년(중종 5) 유생들이 방화하면서 폐허로 변한다. 절에 걸려있던 1462년(세조 8) 제작된 큰 종(보물 흥천사명 동종·경복궁 소재)만이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1669년(현종 10)에야 신덕왕후는 겨우 왕비로 복위되고 이장후 방치되던 정릉도 왕릉으로서 재정비된다. 능역 밖 성북구 돈암동에 능침사도 다시 세워진다.
태조 이성계, 신덕왕후와 그 자식들 그리며 흥천사·홍덕사 창건
흥덕사(興德寺) 역시 태조가 건립한 절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동국여지지>는 “태조가 잠저 동편에 덕안전(德安殿)을 지어서 희사하여 절로 삼았으니…”라고 했다. 태상왕으로 물러난 1401년(태종 1)의 일이다. 이방원이 일으킨 1차 왕자의 난으로 신덕왕후의 소생인 방번과 방석, 경순공주의 남편 이제가 살해된다. 이성계는 비명에 간 자식들의 명복을 비는 원찰로 흥덕사를 지었던 것이다. 흥덕사는 도성 십승(十勝)에 꼽히던 절이었다. 경내에 맑은 연못이 있고 여름이면 이곳에 연꽃이 가득했다. 조선전기 시인 성임(1421~1484)은 “구름 비단 눈앞에 어지러이 피어있고(雲錦紛披在眼前), 맑은 향기 끊임없이 모시옷에 스며드네(淸香冉冉襲衣紵)”라고 했다. 하지만 폭군 연산군 때 폐사돼 복원되지 못하고 절터에 민가가 형성됐다. 흥덕사 터는 서울과학고·종로구 시설관리공단 일원이다. 원각사(圓覺寺·탑골공원)는 1465년(세조 11) 세조(재위 1455~1468)의 명으로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너른 터에 세워졌다. <세조실록> 1464년 5월 2일 기사에 의하면, 세조는 효령대군(1396~1486)이 양주 회암사에서 법회를 열 때 석가여래가 나타나고 사리가 수백개로 분신하는 이적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승정원에 지시해 원각사를 건립토록 했다. 원각사를 지을 때 8만장의 기와가 소요됐고 주요 전각의 지붕은 궁궐에서만 사용하던 청기와로 장식했다.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조각한 이국적 원각사지십층석탑(국보)은 오랜기간 도성명물로 인기가 높았다.
조계종 총본산인 조계사(종로 수송동 44)는 한국불교계의 상징적 사찰이지만 그역사는 80년에 불과하다. 애초 조계사 터에는 1906년 설립된 보성고가 있었다. 불교계는 1925년 경영난에 빠진 보성고를 인수해 이듬해 학교를 넓은 혜화동으로 옮긴다. 1930년대 중반, 일본 불교 조동종(曹洞宗)이 박문사(博文寺·신라호텔)를 총본산으로 해 조선불교를 병합하려고 하자 한국 불교계는 반대에 나섰고 31본산 주지 총회를 열어 한국불교 총본산 건립을 추진한다. 1938년 보성고 자리에 절을 완성해 태고사라 하고 1940년 7월 총독부의 최종 인가를 얻었다. 1962년 통합종단으로서 대한불교조계종을 설립하고 절 이름도 조계사로 개칭했다.
장의사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절, 보도각 백불은 신통한 기도처로 인기
서울 사찰 중 기록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확인되는 절은 장의사(藏義寺)다. 신라 태종 무열왕이 백제와의 황산벌 전투에서 전사한 장춘랑과 파랑의 넋을 기리기 위해 659년(태종 무열왕 6) 창건했다. 세검정초교 운동장 한 구석에 높이 3.63m의 통일신라 시기 장의사지 당간지주(보물)가 남아있다. 장의사지에서 홍제천을 따라 1.5㎞ 남짓 하류에 보물 ‘보도각 백불(普渡閣 白佛)’이 위치한다. 보도(普渡)는 “불법으로 널리 중생을 구제한다”는 뜻이다. 백불의 정식명칭은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이다. 거대한 바위 면에 조각된 백불은 5m 가까운 크기이며 제작시기는 고려후기로 본다. 백불은 한양 인근에서 신통한 기도처로 이름나 여인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불상은 흰옷 차림의 비구니로 현신해 산모와 아기를 보살펴주는 백의관음(白依觀音) 형상이다.
성산(聖山)으로 인식돼온 북한산에는 골마다 대찰이 빼곡했다. <고려사>에 인용된 ‘삼각산명당기’는 “삼각산에 기대어 황제의 서울을 짓는다면 9년째 되는 해에 온 천하가 조공을 바칠 것”이라고 했다. 북한산 서편의 진관사(津寬寺)는 고려 8대 현종(재위 1009~1031)이 2차 거란전쟁 직후인 1012년(현종 3) 창건했지만 조선개창과 함께 매년 국가 주관의 수륙재(水陸齋)가 성대하게 거행되면서 수륙재 중심사찰로 위상을 높았다. 수륙재는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를 위로하는 불교의식이다. 조선건국 과정에서 많은 고려 왕족이 살해됐다. <태조실록> 1394년(태조 3) 4월 15일 기사는 “윤방경 등이 왕씨를 강화나루에 빠뜨렸다”고 했고 17일 기사는 “마침내 공양군(공양왕)과 그 두 아들까지 교살했다”, 20일 기사는 “손흥종(孫興宗) 등이 왕씨를 거제 바다에 던졌다. 중앙과 지방에 명령하여 왕씨의 남은 자손을 대대적으로 수색하여 모두 목 베었다”고 했다. 진관사 수륙재는 이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처음 마련됐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차츰 조선왕실 역대조상의 명복을 비는 의식으로 변질됐다. 진관사는 조선초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줘 독서에 전념케 하는 사가독서(賜暇讀書) 장소로 활용됐다. 성현의 <용재총화>는 “1442년(세종 24) 박팽년·이개·성삼문·하위지·신숙주·이석형 등 6명이 세종의 명을 받들어 진관사에서 독서하면서 시문을 지어 서로 주고받기를 쉬지 않았다”고 했다. 치열하게 공부하며 진한 우정을 나눴을 6명 중 박팽년·이개·성삼문·하위지는 단종을 위해 목숨을 버렸고 신숙주·이석형은 세조의 편에 서 영달을 선택했다.
북한산 대찰들 빼곡···진관사 고려왕족 달래던 수륙재 거행, 중흥사엔 정조 행차
경관이 빼어난 북한천과 백운동 계곡에 위치한 중흥사(重興寺)도 선비들이 자연 속에서 학문을 닦는 장소로 애용했다. 조선중기 대문장가인 월사 이정구(1564~1635)는 21세 때인 1584년(선조 17) 중흥사로 들어가 학문에 매진해 당해 진사 초시를 통과하고 이듬해 연달아 진사 복시에 합격했다. 정조(재위 1776~1800)도 중흥사에 행차해 남긴 두 편의 시가 그의 문집 <홍재전서>에 실려있다. 정조는 견여(肩輿·어깨로 매는 가마)를 타고 시단봉까지 올랐다가 저녁무렵에야 증흥사에 당도했다. 정조는 “절 가까이서 맑은 풍경소리 가늘게 들려오고(細聞淸磬近禪丘), 빽빽한 숲은 깊고 깊어 하늘 밖에 떠 있는 듯 하네(萬木深深天外浮)”라고 했다. 유물로 1103년(고려 숙종 8) 제작 ‘중흥사 금고’(金鼓·삼성리움 소장)가 전해져 12세기 이전 창건된 것으로 판단한다.
북한산 동편으로는 사모바위 밑의 승가사(僧伽寺)가 오래된 절이다. 756년(통일신라 경덕왕 15) 수태 화상이 세웠다고 알려진다. 대웅전 뒤편의 석굴(승가굴)에 승가대사 석조상(보물)이 안치돼 있다. 사찰이름은 이 석조상에 따왔다. 광배뒷면에 1424년(고려 현종 15) 조각했다고 기록돼 있다. 승가대사(628~710)는 인도승려로 7세기초 당나라에서 활약했으며 입적 후 치병(治病)에 영험한 존재로 숭배됐다. 조선왕실도 치병을 위해 승가사를 찾았다. 태종과 세종비 소헌왕후(1395~1446)가 병에 걸리자 승가사에 사람을 보내 재를 올렸다. 고종대 명성왕후(1851~1895)와 순헌황귀비(1854~1911)의 후원으로 중수됐다. 절 뒤쪽 바위에 높이 5.94m의 마애여래좌상(보물)이 조각돼 있다. 10세기 전반 제작됐으며 불상 얼굴의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조각기법과 규모가 탁월하다.
조망 뛰어난 서울 사찰, 저마다의 이야기·유물 가득···가을엔 사찰 기행 제격
칼바위능선 등산로 입구의 화계사는 ‘궁절’이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궁궐 상궁들의 출입이 잦았고 비빈들의 후원 기록이 다수 남아있다. <화계사략지>에 따르면, 화계사는 1522년(중종 17) 창건됐고 1619년(광해군 11) 선조의 생부인 덕흥대원군(1530~1559) 종가의 시주로 중건했다. 화계사는 1866년(고종 3) 흥선대원군이 크게 중수했다. 파락호 시절, 흥선대원군은 화계사를 찾아 승려 만인에게 안동 김씨를 몰아낼 비책을 물었다. 그러자 만인은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충청도 덕산의 가야사 금탑 자리로 이장하면 제왕이 될 후손을 볼 것이라고 귀띔했다. 흥선대원군이 가야사를 불태우고 탑을 허물어 묘를 옮겼더니 과연 후일 둘째 아들이 고종으로 즉위했다는 설화가 전한다. 이런 인연으로 흥선대원군은 화계사 불사에 적극 나섰다.
문수봉 아래의 문수사(文殊寺)는 북한산의 여러 사찰 중 조망이 가장 좋다. 1109년(고려 예종 4) 탄연이 창건했으며 1451년(문종 1) 세종의 2녀인 정의공주(1415~1477)가 중창했다. 대웅전에 봉안된 문수보살상은 명성황후가, 석가모니불은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1901~1989)가 봉안했다. 우이동 등산로 입구의 도선사(道詵寺)는 신라 말기의 승려 도선이 862년(통일신라 경문왕 2)에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1863년(철종 14)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중심인물인 김좌근(1797~1869)의 시주로 중수했으며 1903년에는 혜명이 고종의 명을 받아 대웅전을 건립했고 1904년 국가기원도량(國家祈願道場)으로 지정됐다. 북한산 절들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대부분 불탔고 1950년대 이후 재건됐다.
그렇게 뜨겁던 여름이 어느덧 지나가고 이제 아침저녁은 제법 쌀쌀하기까지 하다. 서울의 아름다운 옛 절을 기행하며 깊어가는 가을을 느껴보는 것은 어떨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