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명석 OB 아닌 LG…‘로보캅’ 송구홍 서울팀 최초 20-20클럽

[이재국의 엘팬알백] ㉙암흑 속의 희망…1992년 차명석 입단과 송구홍의 20-20 이야기

1992년 LG '로보캅' 송구홍(왼쪽)은 20-20 클럽에 가입하면서 스타덤에 올랐다. 건국대 투수 차명석은 신인드래프트 2차 1라운드에서 LG 지명을 받고 운명이 바뀐다. ⓒ스포츠서울
“삼흠이 형, 오늘은 뭘 노려야 해요?”
“응, 문희수니까 변화구 노려. 슬라이더.”

1992년 9월 3일 잠실 해태전. LG 트윈스 3번타자 유격수로 선발출장한 송구홍은 1회말 공격 때 타석에 들어서기 전 여느 때처럼 정삼흠을 찾아 조언을 구했다.

정삼흠은 그해 송구홍의 룸메이트 선배였다. 고민도 없이 곧바로 맹쾌한 답변이 튀어나왔다.

상대투수는 해태 문희수. 입단 2년생 내야수 송구홍은 정삼흠의 조언을 새겨들은 뒤 타석에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볼카운트 2B-2S(5구째 파울)에서 6번째 공이 날아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우타자 몸쪽으로 날아오던 공이 홈플레이트 안쪽으로 휘어졌다. 홈플레이트 상공 높은 곳에 대롱대롱 걸려 들어오는 실투성 행잉 슬라이더.

“딱!”

송구홍의 배트에 정통으로 걸린 타구는 마치 UFO(미확인비행물체)처럼 잠실 밤하늘을 가르며 하얀 무지개를 그렸다.

좌익수와 좌측 폴 사이의 외야 관중석 중단에 떨어지는 큼지막한 홈런.

‘스마일맨’ 송구홍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특유의 싱글벙글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돌았다.

『송구홍의 날이었다. LG 송구홍은 3일 해태와의 잠실경기에서 1회말 문희수로부터 시즌 20호 홈런을 빼앗아 국내 프로통산 5번째 ‘20-20클럽’에 가입한 뒤 5-5 동점으로 연장전에 돌입하기 직전인 9회말 2사 1·2루 때 끝내기 좌전 적시타로 두들겨 6-5 승리를 따내는 데 수훈을 세웠다.』 <1992년 9월 4일자 스포츠서울>

[엘팬알백-LG 트윈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29번째 주제는 빛과 어둠이 공존했던 1992년 스토리다. 8개 구단 중 팀순위 7위로 내려앉아 암울했던 그 시절, 서울팀 최초 '20-20클럽’을 달성한 송구홍을 보는 게 LG 팬들에겐 유일한 낙이었다. 아울러 먼 훗날 단장으로 2차례나 우승을 일구는 차명석이 신인으로 입단한 해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1992년 9월 4일자 스포츠서울 1면. LG 송구홍이 20-20 클럽에 가입한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스포츠서울

◆4년전 OB에 지명됐던 차명석 LG에 입단

[엘팬알백] ㉗화에서 소개한 것처럼 LG는 1992년 신인드래프트 1차지명 선수인 초고교급 투수 임선동(휘문고)을 영입하는 데 실패했다. 고졸선수 계약 마감시한인 11월 15일까지 사인을 받지 못했다.

LG로선 처음으로 1차지명 선수 없이 새 시즌을 맞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2차지명이 매우 중요했다.

1991년 11월 20일 KBO에서 신인 2차지명 회의(드래프트)가 열렸다. 지명방식은 전년도(1990년) 성적 역순. 1990년 최하위 OB가 1순위로 2명의 지명권을 행사할 수 있었고, 나머지 팀은 모두 1명씩 선택하게 됐다.

OB는 여기서 가장 먼저 좌완 이상현(보성고-인하대)을 찍은 뒤 우완 권명철(인천고-인하대)을 선택했다.

권명철은 국가대표 출신이어서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능한 상황이었지만, 이상현은 무명에 가까운 선수. 특히 그해 최대어 야수 양준혁을 걸렀기에 현장 취재를 갔던 기자들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여기엔 이유가 있었다. 당시엔 2차지명 전에 선수와 교섭을 할 수 있었다. OB는 양준혁과 접촉해 백지수표를 제시하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놨다. 하지만 양준혁이 어떤 조건에도 흔들리지 않고 상무행을 고집하고 있었기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1차지명은 영구보유권을 갖지만 2차지명은 이듬해 2월말까지 계약하지 못하면 지명권이 자동상실됐다.

이어 2순위 구단 쌍방울이 국가대표 출신 사이드암 임창식(동산고-경남대)을 찍었다.

3순위 구단은 LG. 전년도 쌍방울과 공동 6위였지만 상대전적(11승7패)에서 앞서 후순위가 된 것이다.

LG 신인 시절의 차명석이 선수단과 함께 산에 오른 뒤 두 팔을 벌려 만세를 부르고 있다. OB에 입단할 뻔했던 그의 운명이 바뀐 순간이다. ⓒ스포츠서울
“LG 트윈스 지명하겠습니다. 성남고 건국대 출신 투수 차명석!”

[엘팬알백] ⑭화에서 잠시 설명한 대로 1988년 신인드래프트에서 OB는 성남고 투수 차명석을 고졸연고 지명으로 선택한 바 있다. 하지만 차명석은 OB에 입단하지 않고 건국대로 진학했다.

현 LG 트윈스 차명석 단장은 “그때 건국대 숙소에 납치돼 있었다”면서 “OB에 지명된 것도 알았고, OB 구단 관계자가 입단 협상을 하기 위해 학교 앞까지 왔지만 학교 밖으로 나갈 수가 없어 협상조차 할 기회가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성남고 시절의 투수 차명석은 시속 140㎞대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였어요. 1980년대엔 프로 투수들도 140㎞면 강속구 투수라고 하던 시절이었죠.”

건국대 1년 선배이자 LG 트윈스 선배, 단장 선배였던 송구홍의 설명이다. 이에 대해 차명석 단장은 껄껄 웃더니 “맞는 얘기다”라며 부인하지 않았다.

송구홍과 차명석은 2002년 4월 14일 잠실 현대전에 앞서 함께 은퇴식을 했다. 건국대 1년 선후배 사이인 둘은 훗날 LG 단장에 오르게 된다. ⓒ스포츠서울
“당시엔 학창 시절에도 얼차려 문화가 있었잖아요. 차명석이 건국대 와서 다쳤어요. 방망이로 엉덩이를 맞다가 그만 엉치뼈를 맞았죠. 그 이후 구속이 130㎞대로 확 줄었어요. 프로에 와서도 회복이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마당쇠 투수가 됐죠.”

송구홍 전 단장의 얘기다. 이에 대해 차 단장은 “그것도 맞는 말이다”라며 웃었다.

LG에 입단한 뒤 활짝 웃는 차명석. 당시 얼굴은 단장인 지금과 비교하면 갸름해 보인다. ⓒ스포츠서울

LG에 2차 1순위로 지명된 차명석은 계약금 5000만 원과 연봉 1200만 원 등 총액 6200만 원의 조건에 핀스트라이프 유니폼을 입었다.

당시 5000만 원은 LG 트윈스 역사상 신인 최고 계약금. 1990년 1차지명 김동수와 1991년 1차지명 송구홍의 계약금(공식 발표액) 4000만 원을 넘어섰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고졸로 OB에 입단하지 않은 게 어쩌면 차명석으로서는 자신의 운명을 바꾼 신의 한 수가 됐는지 모른다.

1988년이라면 웬만한 대졸 상위 지명 선수들도 기본 계약금 1200만 원으로 시작하던 시절이다. 그런데 4년 후 4배가 넘는 계약금을 받았으니 재테크 측면에서 큰 이득을 봤다.

“당시 LG가 건대 야구장에 자주 와서 훈련하고 게임도 했어요. LG 선수들과 같이 훈련을 하기도 했고, 송구홍 선배도 LG에 가 있으니까 저로서도 LG가 익숙했어요. 그래서 저도 사실 LG에 가고 싶었죠.”
1992년 LG에 입단한 차명석(오른쪽)은 훗날 단장이 돼 두 차례 우승을 이끄는 인물이 된다. ⓒOSEN

차명석은 1992년 LG에 입단하면서 새롭게 부임한 ‘자율야구’의 대명사 이광환 감독과 함께 줄무늬 유니폼을 입고 새 출발을 했다. 1994년엔 선수로서 신바람야구의 우승을 경험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2019년 LG 트윈스 단장으로 부임해 7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과 2차례(2023년, 2025년) 우승을 이루는 대역사를 썼다. 구단 역사상 누구도 해내지 못한 위업. 만약 1988년 고졸연고 지명을 한 OB에 입단했다면 이런 기회가 그에게 찾아왔을까.

최근 우승을 차지한 차명석 단장은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OB 갔으면 인생 어떻게 됐을지 모르죠. 허허.”
성남고 박종호는 고졸 연고지명 선수로 1992년 LG 트윈스 유니폼을 입었다. 2년 후 골든글러브 2루수로 성장한다. ⓒ스포츠서울

한편 LG는 2차지명에서 총 10명의 선수를 지명했는데 훗날 팀 전력에 도움이 된 선수는 2라운드에서 지명한 좌완 민원기(강릉고-홍익대) 정도였다.

6라운드에 지명한 포수 임수혁(서울고-고려대)은 상무 입대 후 1994년 2차 1라운드에 롯데에 지명돼 LG와 인연을 맺지 못했다. 김성근 감독의 아들 김정준(충암고-연세대)이 9라운드에 지명돼 LG 유니폼을 입었다.

아울러 성남고 유격수 박종호가 고졸 연고지명으로 LG에 입단(계약금 1200만 원)했다. 그는 1994년 우승 당시 주전 2루수로 활약하며 KBO 최초 스위치히터 골든글러브 수상자가 된다(박종호 이후 31년 만인 올 시즌 신민재가 LG 2루수 골든글러브 수상에 도전하고 있다).

LG 선수들이 1992년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 플로리다에서 스프링캠프를 소화하고 있다. ⓒ스포츠서울

◆김용수와 김기범 이탈…이광환호 개막부터 삐그덕

전문가들은 시즌 전망에서 대체적으로 특별한 전력보강이 없는 LG를 하위권으로 분류했다. 외부 평가는 박했다.

하지만 LG 선수단은 새로운 희망을 만들기 위해 미국 플로리다로 스프링캠프를 떠났다. 플로리다에서 스프링캠프를 소화하는 것은 MBC 시절을 포함해 구단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메이저리그 야구 접목을 시도하는 이 감독의 부임과 궤를 같이해 효과가 배가될 것으로 기대했다.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마이너리그 투수코치였던 마틴 패튼도 1군 정식 투수코치로 계약했다. 1990년 우승 후 LG가 선진 지도법을 통해 유망주 투수들을 육성하기 위해 패튼을 2군 투수코치로 영입한 바 있다. 구단 역사상 최초의 미국인 코치였다.

패튼은 백인천 감독이 자신과 상의를 하지 않고 영입했다며 반발하면서 불화의 씨앗이 됐던 주인공. 하지만 일본식 야구를 하는 백 감독과 달리 이광환 감독 체제에서는 1군 투수코치로 호흡을 맞추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패튼 투수코치는 플로리다에서 LG 투수들의 훈련을 살펴본 뒤 메이저리그식 선발 로테이션을 만들었다.

김용수 김태원 김기범 3총사에다 2년생 우완 김기덕, 1990년 10승 투수로 도약한 사이드암 문병권(또는 이용철) 등으로 선발진을 꾸린다는 구상이었다.

여기에 정삼흠을 클로저로 낙점하면서 좌완 이국성 민원기 서왕권과 우완 차동철 차명석 김종철 등에게 불펜을 맡기는 투수 분업화를 시도했다.

LG 트윈스 구단 최초 미국인 투수코치로 활약한 마틴 패튼(뒤)이 스프링캠프에서 에이스 김용수를 지도하고 있다. ⓒ스포츠서울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에이스로 기대한 김용수가 스프링캠프를 마치고 3월초 귀국하면서 심각한 허리통증을 호소한 것. 미국 플로리다에서 한국까지 20시간 이상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탈이 나고 말았다.

귀국 후 휴식을 취했지만 차도가 없었다. 훈련에 계속 불참하다 3월 20일 구단 지정병원인 순천향병원에서 정밀검진을 받은 결과 ‘요추 추간판탈출증(허리 디스크)’ 판정을 받았다.

개막전은 4월 4일. 물리치료와 수영으로 회복훈련을 했지만 시범경기에 단 한 경기도 등판하지 못했기에 개막전 등판은 이미 물 건너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팀 내 유일한 좌완 선발인 김기범은 갑자기 날아든 입대 영장 때문에 군복무(방위)를 시작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당시 방위병은 홈경기에 출장할 수 있었고, 휴가 형식을 통해 원정경기에도 가끔씩 출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부대 사정에 따라 홈경기 등판도 불가능할 수 있는 상황. LG 마운드는 초비상에 걸렸다.

1992년 4월 3일자 스포츠서울 1면. LG 에이스 김용수는 부상으로, 좌완 김기범은 군입대로 개막전부터 이탈한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스포츠서울

결국 대전구장에서 열린 빙그레와 개막전 선발투수는 김기덕(대구고-한양대 출신)으로 낙점됐다. 스프링캠프와 시범경기(5경기 등판 3승0패, 평균자책점 1.27)에서 좋은 투구를 펼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기덕은 개막전에서 2.2이닝 7실점의 난조를 보였다. LG 타선은 빙그레 투수 송진우와 한용덕에 묶이면서 2-9로 대패했다.

이튿날의 재역전패는 더 뼈아팠다. 1989년 2차 1라운드에 지명한 김덕근(경북고-연세대)을 선발투수로 내세웠는데 0.2이닝 4실점을 기록하며 강판했다. 1회에만 6점을 내주는 등 7회까지 2-7로 크게 뒤져 패색이 짙었다.

그런데 LG는 8회초 기적을 만들었다. 대거 8득점하며 10-7로 전세를 뒤집는 데 성공한 것. 특히 김동재는 빙그레 루키 투수 정민철을 상대로 만루홈런을 터뜨리며 화끈한 신고식을 하게 만들었고, 김상훈은 타자일순한 8회초에만 연타석 홈런(상대투수 장정순, 김인권)을 날렸다. 1이닝 2홈런은 KBO 역대 4번째일 정도로 진기록이었다.

그러나 LG는 대역전 드라마를 완성하지 못했다. 8회말 마무리투수 정삼흠이 임주택에게 솔로홈런, 진상봉에게 3점홈런을 맞으면서 대거 4실점하면서 끝내 10-11로 재역전패를 당하고 말았다.

개막 2연패의 무거운 출발. 힘든 한 시즌을 예고하는 듯했다.

LG 내야수 민경삼(오른쪽)과 김동재가 미국 플로리다 스프링캠프에서 훈련을 하고 있다. ⓒ스포츠서울

◆‘포스트’ 김재박 이광은 기대…민경삼 부진과 김건우의 부상 악몽

유격수 김재박의 태평양 무상 트레이드와 3루수 이광은의 은퇴로 LG는 내야진도 대폭적인 물갈이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당초 김재박과 이광은의 공백은 일단 1986년 입단 동기생들로 메우겠다는 복안이었다. 유격수는 경험 많은 민경삼, 3루수로는 투수에서 타자로 전향하는 김건우를 주전으로 생각했다.

김건우는 1986년 MBC 청룡에 입단하자마자 역대 신인 첫해 최다승인 18승(훗날 2006년 한화 류현진이 타이기록 작성)을 올리며 단숨에 리그 최정상급 투수로 자리잡는 듯했다. 하지만 [베팬알백] 13화에서 소개했듯이 이듬해인 1987년 심각한 교통사고로 투수생명에 치명타를 입었다.

MBC 청룡의 에이스 김건우가 1987년 9월 12일 밤 교통사고를 당한 뒤 서울 순천향병원에 입원해 있다. ⓒ스포츠서울

투수로 재기하기 위해 몸부림을 쳐오던 김건우는 결국 1991년을 끝으로 마운드에 서는 걸 포기했다. 선린상고와 한양대 시절 투타 양면에서 특출난 재능을 보였던 김건우는 타자로 전향하기로 결심했다.

스프링캠프와 시범경기를 지켜본 이광환 감독은 1992년 개막전부터 김건우를 붙박이 4번타자 3루수로 기용했다. 김건우는 이에 부응이라도 하려는 듯 5월 3일까지 33안타로 최다안타 부문 KBO리그 1위를 달리면서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 팀 내에서 가장 많은 4개의 홈런을 때리기도 했다.

그런데 하늘은 천재에게 또 장난을 쳤다. 5월 9일 인천 태평양전 때 2루 도루를 성공했지만 무릎이 꺾이고 말았다.

약 한 달 후인 6월초 복귀한 뒤 4번 지명타자로 나서며 팀 타선의 중심을 맡았다. 그 이후 3루수와 좌익수, 간간이 1루수를 맡아 수비도 소화했다.

1992년 투수에서 타자로 변신한 뒤 LG 4번타자를 맡은 김건우가 홈런을 친 뒤 김인식 코치와 기뻐하고 있다. ⓒLG트윈스

그런데 이번엔 더 큰 시련을 만났다.

7월 11일 대전 빙그레와 더블헤더 제1경기. 8회말 1루수로 투입돼 수비를 하다 손목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장종훈의 타구를 잡은 3루수 송구홍의 송구가 옆으로 비켜가자 김건우는 미트를 낀 왼손을 뻗어 잡았다.

그런데 전력으로 달려오던 타자주자 장종훈과 부딪히면서 왼 손목이 꺾였다. 손목뼈 골절로 결국 시즌아웃이 되고 말았다.

주전 유격수로 기대한 민경삼은 타격 부진으로 기회를 잡지 못했다. 1990년 삼성에서 LG로 이적한 베테랑 2루수 김동재도 은퇴 말년이었다.

이광환 감독은 결국 1991년 입단한 대졸 송구홍과 고졸 이우수(동대문상고) 이종열(장충고), 1992년 고졸루키 박종호 등을 두루 체크하며 미래의 내야 주인 옥석가리기에 나섰다.

LG 트윈스 지휘봉을 잡은 이광환 감독(왼쪽)이 해태 김응용 감독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스포츠서울

◆개막 첫달부터 꼴찌…구단버스 파손과 청문회 소동

LG는 대전에서 치른 개막 2연전에서 패한 뒤 안방인 잠실로 돌아와 홈개막 시리즈에서 삼성을 상대로 2연승을 올리며 반전에 성공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 이후 승리하는 날보다 패하는 날이 많았다. 개막 2승2패 후 3연패를 했고, 1승 후 다시 1무 포함 3연패, 1승 후 3연패를 반복했다.

4월 22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OB와 더블헤더에서 모두 패하며 4승1무11패(승률 0.281)로 최하위로 내려앉았다. 24일 반짝 7위로 올라섰으나 25일부터 5월 2일까지 7연패의 늪에 빠졌다.

6승1무18패(승률 0.260)로 8개 구단 중 8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7위 쌍방울에 3.5게임차, 1위 빙그레에게 12게임차로 뒤졌다. 시즌 10승을 거두기까지 무려 35경기나 필요했다.

흥분한 LG 팬들은 이 무렵 연일 ‘이광환 감독 청문회’를 요구했고, 4월 30일에는 구단버스를 부수며 항의하는 소동도 빚었다.

김용수의 이탈이 장기화하면서 마운드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고, 김재박과 이광은이 빠진 뒤 새롭게 구성된 젊은 내야진은 연일 실책을 범하면서 이광환 감독의 머리를 아프게 만들었다. 전반기 막판 부진에 빠진 쌍방울을 끌어내리고 가까스로 7위로 반환점을 돌았다.

1992년 트레이드 마감시한인 6월 30일 LG 윤덕규와 태평양 박준태가 유니폼을 맞바꿔 입기로 했다. ⓒ스포츠서울

◆윤덕규-박준태 트레이드…후반기 선전했지만 7위로 마감

6월 26일 후반기가 시작됐지만 잠실에서 빙그레에 3연패를 당했다.

결국 LG는 팀 분위기 쇄신을 위해 트레이드 마감시한(당시엔 6월 30일)에 맞춰 ‘초구의 사나이’ 윤덕규를 태평양으로 보내고, 강견에 공수주 재능을 갖춘 박준태를 받는 외야수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LG는 외야수비 보강이 필요했고, 태평양은 좌타자를 원해 거래가 성사됐다.

그런데 하필이면 다음날인 7월 1일, LG는 인천 태평양전에서 연장 11회 접전 끝에 윤덕규에게 끝내기 안타를 맞고 연패에 빠지면서 다시 최하위로 주저앉았다.

그 이후 LG는 7월에만 3차례 3연승을 올리며 안정을 찾았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이었지만 8월말부터 9월초까지 6연승 늦바람을 내기도 했다. 그러면서 후반기 31승1무31패로 반타작에 성공했다. 시즌 승률도 0.433으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최종 순위(7위)에는 크게 변동을 주지 못했다.

송구홍은 1992년 야무지게 방망이를 치면서 20-20 클럽에 가입했다. ⓒ스포츠서울

◆‘로보캅’ 송구홍의 본격 출현

1992년은 뭘 해도 안 되는 해였다. LG 팬들에겐 희망도, 즐거움도 없었던 시즌이었다.

온통 칠흑 같이 어두웠던 그해, 어둠을 뚫고 한줄기 빛이 잠실벌에 드리워졌다. 다름 아닌 프로 2년생 송구홍의 출현이었다.

송구홍은 국가대표 출신으로 1991년 LG가 1차지명을 하며 영입한 대형 내야수였다. 첫해엔 손등 염좌를 비롯해 크게 작은 부상이 겹치며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73경기에 출장해 타율 0.236(174타수 41안타), 2홈런, 13도루에 그쳤다.

1992년의 송구홍은 완전히 달라졌다. 이광환 감독도 그의 재능을 살펴본 뒤 개막전부터 유격수 9번타자로 선발출장시켰다.

하지만 시즌 출발이 썩 좋지 못했다. 결국 선발출장 후 교체되기도 하고, 벤치에서 시작해 간간이 대타로 출장하기도 했다.

송구홍은 4월 23일까지 21타수 1안타(타율 0.048)로 심각한 타격 부진에 빠져 있었다. 선발 유격수 자리도 고졸 2년생 이종열에게 주어지는 일이 많았다.

1991년 장충고 졸업 후 LG에 입단한 이종열(맨 앞쪽)이 동료 선수들과 미국 플로리다 해변에서 점프를 하며 체력훈련을 하고 있다. ⓒLG트윈스

반전의 계기가 된 것은 4월 24일 전주 쌍방울전. 이날 송구홍이 9번 3루수로 선발출장하면서 4번타자 김건우가 좌익수로 이동했다. 송구홍은 8회초 2점홈런(시즌 1호)을 포함해 4타수 3안타 1볼넷 2타점 3득점의 맹활약을 펼쳤다. 3회엔 타자일순하면서 혼자 2안타를 치기도 했다.

이튿날인 4월 25일 전주 쌍방울전에는 2번타자 3루수로 선발출장했다. 3회초 김원형을 상대로 솔로홈런을 포함해 4타수 2안타를 때려냈다.

이때부터 거의 붙박이 3루수로 선발출장하기 시작했다. 4월 29일 잠실 롯데전에서 리드오프로 나서며 쌍둥이 군단의 새로운 공격 첨병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5월 8일 인천 태평양전에서 홈런 2방을 몰아치면서 4타수 3안타를 폭발했다. 5월 15일 잠실 해태전에서 시즌 5호 홈런을 포함해 4타수 2안타를 뽑았다.

도루는 오히려 더 늦게 발동을 걸었다. 5월 14일 잠실 OB전에서 뒤늦게 시즌 1호 도루에 성공했다. 전반기에 홈런 7개. 장타력이 부쩍 상승한 모습이었지만 도루는 4개에 불과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누구도 송구홍이 20-20에 도전할 것이라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LG 트윈스 마운드의 핵 정삼흠. ⓒ스포츠서울

◆이종도 코치와 정삼흠의 조언…서울팀 최초 ‘20-20’ 위대한 도전

“구홍아, 타격할 때 왼발을 땅에 끌면서 뒤로 당겼다가 쳐봐.”

이종도 수석코치가 송구홍에게 조언을 건넸다. 이종도 수석코치라면 1982년 원년 개막전에서 끝내기 만루홈런의 역사를 쓴 주인공이다.

“시즌 도중이었어요. 해태전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타격훈련을 할 때 이종도 수석코치님이 지나가시다가 왼발을 땅에 끌고 오른발 쪽으로 당겼다가 스트라이드하면서 쳐보라고 하셨어요. 마치 요즘 이정후(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처럼 말이죠.”

송구홍 현 GD 챌린저스(고교 클럽팀) 감독은 1992년 홈런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터닝포인트에 대해 설명했다.

“대학 시절 알루미늄 배트를 쓰다가 프로 첫해 나무배트를 사용하자니 장타가 잘 안 나오더라고요. 마음이 조급해져 타율도 많이 떨어졌고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날 이종도 코치님 조언 이후 공이 수박만하게 보였어요. 그날부터 무더기 안타가 나오고 연일 홈런이 터지더라고요.”
LG 트윈스 송구홍. ⓒ스포츠서울

송구홍은 6월 16일 광주 해태전부터 7월 18일 잠실 롯데전(더블헤더 제1경기)까지 20연속경기안타를 때렸다. 후반기 들어 홈런 퍼레이드를 펼치며 도루 생산에도 박차를 가했다.

8월 28일 시즌 도루수 20개를 채웠다. 이어 9월 2일 해태와 맞붙은 더블헤더 제1경기에 시즌 19호 홈런을 쏘아올려 대망의 ‘20-20’까지 홈런 1개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1992년엔 프로 2년째라 경험이 부족했잖아요. 그래서 룸메이트였던 정삼흠 선배한테 많이 물어봤어요. 뭔가 중요한 상황이나 타격이 잘 풀리지 않을 때면 상대투수 볼배합에 대해 조언을 구하곤 했죠. 그러면 ‘직구 노려’, ‘변화구 노려’라고 명쾌하게 말씀하셨어요. 그게 또 기막히게 맞아떨어지곤 했어요.”

송구홍은 전문에 소개했듯이 역사적인 9월 3일 잠실 해태전 당시 다시 정삼흠에게 조언을 구했다. 상대 선발투수 문희수 선배를 상대하면서 무슨 공을 노려야 하는지를 묻자 정삼흠은 여느 때처럼 명쾌하게 "변화구 노려. 슬라이더"라고 말했다.

“문희수 선배가 선발이었는데 1회에 슬라이더 하나만 노리고 들어갔던 거죠.”

송구홍은 이날 정삼흠의 조언을 듣고 1회 장쾌한 좌월 솔로홈런으로 ‘20홈런-20도루’에 가입했다. 그리고 그날 5-5 동점이던 9회말 2사 1,2루에서 끝내기 좌전 적시타를 날리며 영웅이 됐다.

요즘에도 ‘20-20’이라면 호타준족의 상징이지만, 당시엔 그야말로 희귀한 기록. 1988년 해태 김성한이 최초로 ‘20-20’을 개설한 뒤 송구홍은 역대 5호 주인공이 됐다. 4호 주인공인 빙그레 이정훈(8월 28일)보다 6일 늦게 달성했다.

무엇보다 우리나라에서 구장 규모가 가장 큰 잠실구장을 홈으로 사용하는 서울팀 선수로서는 사상 최초의 ‘20-20’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암울했던 시기의 유일한 낙…‘스마일맨’ 로보캅 송구홍

LG는 1990년 한국시리즈 첫 우승 이후 힘든 시기를 만났다. 1991년 공동 6위로 주저앉은 뒤 1992년에는 한 계단 더 떨어져 8개 구단 중 7위에 그쳤다.

암울했던 1992년, LG 팬들에겐 유일한 낙이라면 낙이었고, 마지막 자존심이라면 자존심. 그 존재가 바로 송구홍이었다.

LG에서 유일한 3할 타자(0.304)였고, 무엇보다 서울팀 최초 ‘20홈런-20도루’라는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이기는 날보다 지는 날이 많았던 그해, LG 팬들은 하루 하루 송구홍의 홈런과 도루를 카운트해 나가는 맛에 야구를 봤다.

송구홍은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 3루수 부문 경쟁자 OB 임형석(타율 0.290, 26홈런)을 제치고 황금장갑을 받았다. 그해 LG 유일한 골든글러브 수상자였다.

KBO 역사적으로 볼 때 송구홍은 6년 연속(1986~1991년) 3루수 골든글러브 수상해 온 한대화의 독주 시대를 멈춰세운 주인공이었고, 구단 역사로 보면 1984년 MBC 청룡 시절 이광은 이후 8년 만에 되찾은 3루수 골든글러브였다. LG 시절만 놓고 보면 최초 3루수 황금장갑 수상이라는 역사를 썼다.

타격을 할 때도 웃는 듯한 송구홍의 모습. ⓒLG트윈스

송구홍은 늘 웃었다. 그라운드에 들어선 것 자체가 즐거운 듯 싱글벙글하는 모습이 트레이드마크였다.

타격 후 베이스를 돌 때도 입을 헤벌쭉 벌리고 웃으면서 달렸고, 역동적인 동작으로 수비를 할 때도 늘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라운드에서 낙천적인 인상의 그를 보면 팬들도 같이 즐거워졌다.

공수주에서 몸을 사리지 않는 허슬플레이는 송구홍의 전매특허. 1루에서 2루로, 2루에서 3루로, 3루에서 홈으로 달리며 온몸을 내던졌다. 늘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이 그라운드에서 표출하는 그만의 언어였다.

야구에서 슬라이딩은 말 그대로 베이스를 향해 그라운드에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게 정석이지만, 송구홍의 사전엔 그게 아니었다. 전력질주 후 적어도 베이스 5~6m 앞에서 공중으로 몸을 날려 돌진하는 것이었다. 송구홍 같은 슬라이딩을 하는 선수는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본 적이 없다.

때론 그라운드에 배치기를 하다가 갈비뼈에 실금이 가기도 하고, 베이스에 손가락이 걸려 골절을 당하기도 하지만 송구홍은 안전하게 슬라이딩하는 법이 없었다. 몸을 사리지 않는 그런 허슬플레이에 팬들은 열광했다.

한번은 3루를 향해 달리다 여유가 있는데도 너무 빨리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을 하는 바람에 베이스 앞에서 몸이 멈춘 적도 있었다. 마치 수영을 하듯 엉금엉금 기어가 세이프가 되는 모습을 보고는 팬들이 포복절도하기도 했다.

이 장면은 송구홍도 잊어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는 추억을 떠올리며 웃더니 “그날은 슬라이딩을 한 게 아니라 3루로 달리다 앞에서 엎어지는 바람에 그렇게 됐다”며 사실관계를 정정했다.

그는 왜 그렇게 항상 웃으며 야구를 했을까.

“사실 저는 모자나 헬멧을 좀 올려 쓰는 스타일이거든요. 낮경기 때 해가 비치니까 입을 벌리고 얼굴을 찡그린 건데 제가 웃는 상이다 보니 다른 분들은 찡그린 게 아니라 웃는 거라 생각하셨나 봐요. 나중엔 그게 제 캐릭터인 것 같아 더 웃으며 야구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몸을 사리지 않았을까. 1993년엔 그런 허슬플레이를 펼치다 실제로 여기저기 부상에 시달리기도 했다.

“제가 온몸을 날려서 슬라이딩을 하면 팬들이 좋아하시니까 1루에서 헤드퍼스트 슬라이딩, 2루에서도, 3루에서도, 홈에서도 항상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을 했던 거죠.”

선수들의 팬서비스 의식이 요즘 같지 않았던 시절, 경기 후 야구장을 나설 때 밀려드는 팬들을 발견하면 선수들은 대부분 사인 대신 도망가기 바빴다.

하지만 송구홍은 1시간이건 2시간이건 줄을 선 팬들에게 끝까지 사인을 해주는 선수로 유명했다. LG 선수 중 팬서비스의 1인자였다.

분신과도 같은 ‘로보캅’이라는 별명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당시 스포츠서울 문상열 기자가 ‘로보캅’이라는 별명을 만들어서 신문에 계속 쓰면서 저를 상징하는 별명으로 굳어졌어요. 제 얼굴이 로봇처럼 각이 져 있는 데다 로봇처럼 치고 달리니까 그런 별명이 붙었죠. 그때 ‘로보캅’이라는 영화가 유명하기도 했고요. 하하.”

1992년 스타덤에 오른 송구홍은 1993년엔 3루수보다는 유격수에 치중했다. 그러면서도 타격 3위(0.307)에 올랐다.

2년 연속 하위권. 암흑기에 빠질 위기에서 구세주가 나타난다. 1993년 ‘야생마’ 이상훈이 입단하고, 이광환식 자율야구가 2년차에 접어들면서 LG가 먹구름을 걷어내고 마침내 가을야구에 도전장을 던진다.

[엘팬알백] ㉚편에서 계속

현역 시절 '스마일맨'으로 통했던 '로보캅' 송구홍. 코치가 된 뒤 선수들의 훈련을 돕기 위해 그라운드에 물을 뿌리면서도 즐거워하고 있다. ⓒ스포츠서울

이재국

야구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는 ‘야구덕후’ 출신의 야구전문기자. 인생이 야구여행이라고 말하는 야구운명론자.

현 스포팅제국(스포츠콘텐츠연구소) 대표 / SPOTV 고교야구 해설위원 / 유튜브 '이재국의 와일드피치' 운영

전 스포츠서울~스포츠동아~스포티비뉴스 야구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