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주요 그룹이 잇달아 인공지능(AI) 전환을 경영 화두로 내세우고 있다. 글로벌 산업 질서가 AI 중심으로 재편되는 상황에서 뒤처질 경우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위기의식이 작용한 것이다. 삼성은 "2030년까지 전 업무의 90%에 AI를 적용하겠다"는 구체적 목표를 제시했고 SK와 LG 역시 "AI 없이는 생존이 어렵다"는 판단 아래 전사적 전환을 추진하고 있다.
28일 재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AI 전환 전략을 구체적 수치와 신제품 계획으로 제시하며 가장 공격적인 전략을 내놨다. 노태문 디바이스경험(DX)부문장은 이달 초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국제가전박람회(IFA) 2025'에서 "2030년까지 모든 업무의 90%에 AI를 적용하겠다"며 "삼성전자를 AI를 가장 잘 활용하는 회사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노 부문장은 올해 안에 4억대 이상의 갤럭시 기기에 AI 기능을 탑재하겠다는 목표도 내놨다. 지난해 갤럭시 S24 출시로 2억대 규모의 'AI폰 시대'를 연 데 이어 적용 범위를 가전·TV 등 전 제품군으로 확대한다는 구상이다.
SK그룹은 제조업 경쟁력 회복을 AI 전환의 핵심 과제로 규정했다. 최창원 SK수펙스추구위원회 의장은 이달 24일 울산에서 열린 '울산포럼'에서 "제조업이 경쟁력을 잃어가는 상황에서 AI가 구세주처럼 등장했다"며 "AI는 단순 기술이 아니라 기업 프로세스와 인식 전반을 바꾸는 전환점"이라고 강조했다.
여기에 최태원 회장은 'AI 리더십 프로그램'을 신설해 C레벨 100여명에게 직접 학습을 주문하는 등 조직 내 확산을 주도하고 있다. 프로그램은 글로벌 AI 트렌드와 AI 전환이 불러올 업무 방식, 조직 구조 변화를 다루는 전문가 강의, 생성형 AI의 업무 접목 사례 등 고위 경영진이 AI를 실질적이고 친숙하게 활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구성했다.

LG그룹은 구광모 회장이 직접 AI 전환(AX)을 챙기고 있다. 그는 최근 경기도 이천에서 열린 사장단 회의에서 "중국 경쟁사들이 자본과 인력을 우리보다 3∼4배 이상 투입하고 있다"며 위기감을 공유했다. 이어 "지속 가능한 경쟁우위 확보, 선택과 집중, 이기는 연구개발(Winning R&D) 등 기존 논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할 일이 많다"고 지적했다.
사장단 회의에는 LG전자·LG디스플레이·LG화학·LG에너지솔루션·LG유플러스 등 주요 계열사 최고경영자(CEO)와 최고디지털책임자(CDO) 40여명이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원가 경쟁력 확보와 생산성 제고를 위한 AI 전략 실행에 속도를 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기업들이 AI를 생존의 기술로 규정하는 배경은 분명하다. AI는 더이상 연구개발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생산성과 원가 경쟁력, 나아가 신사업 발굴을 좌우하는 핵심 변수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반도체·배터리처럼 자본과 인력 투입만으로는 경쟁우위를 확보하기 어려운 분야에서 AI는 공정 효율화와 비용 절감은 물론 새로운 시장 창출의 열쇠로 작용한다.
글로벌 연구결과도 이러한 긴장감을 뒷받침한다. 맥킨지에 따르면 생성형 AI는 글로벌 경제에 연간 최대 4조4000억달러(약 6200조원)의 추가적인 경제적 가치를 창출할 것으로 예상된다. 골드만삭스는 AI가 향후 10년간 글로벌 GDP를 7% 끌어올릴 잠재력을 지닌다고 평가했다. 특히 제조 현장의 도입 효과는 설비 다운타임을 30∼50% 줄이고 생산성은 15∼30% 높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재계 한 관계자는 "AI 전환에 속도를 높이는 것은 혁신을 위한 선택일 뿐만 아니라 글로벌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한 불가피한 대응"이라고 말했다.
최지원 기자
Copyright © 블로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