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최수종이라는 배우가 있습니다.
그가 지난해 '고려거란전쟁'에 강감찬 장군 역을 맡아서 출연했을 때 저는 한 단어에 완전히 꽂혔습니다.
'사신'. 한자로는 使臣입니다.
최수종 배우는 '사신'에서 '사'자를 완벽한 장음으로 발음했습니다. 들리는 대로 받아 적으면 이랬습니다.
"거란에 '사아신'을 보내서 그들을 안심시켜야 합니다!"
"전하! '사아신'을 보내시옵소서"
使臣의 사전적인 의미는 외교적인 목적으로 다른 나라에 파견하는 신하를 뜻합니다. 그리고 이 단어에서 '使'의 발음은 장음으로 하는 것이 맞습니다.

최근 저는 '폭군의 셰프'라는 퓨전 사극을 재밌게 보고 있는데, 이 드라마에서는 어느 연령대의 배우건 간에 '사신'에서 장음을 살리는 배우를 보지 못했습니다.
이건 그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어차피 요리 이름과 조리법에 영어와 프랑스어가 난무하는 조선시대의 판타지라 언어가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고요.
'사신'이라는 단어 하나가 최수종이라는 배우가 왜 '사극의 왕'으로 불리는 지를 알려주는 경우로 생각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최수종 배우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서도 드라마를 찍을 때는 국어사전을 곁에 두고 대본에서 장단음을 하나하나 체크했다는 것을 밝혔을 정도로 '장단음' 구분에 철저했다고 하니까요.

중국어에 원래 '성조'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겁니다. 같은 음을 놓고 1성부터 4성까지 어떤 억양으로 발음하느냐에 따라서 뜻이 달라집니다.
그 중국어가 우리나라로 와서 한자어가 됐는데 그 성조의 흔적이 '자고저'와 '장단음'으로 남았습니다.
'자고저'는 음의 높낮이를 뜻하고 '장단음'은 음의 길고 짧은 발음을 뜻합니다.
지금은 한자도 학교 교육 과정에서 빠지고 있는 추세고, 우리 국어 교육에서도 장단음과 자고저가 거의 사라져 버린 현실에서, '자고저'와 '장단음'은 차차 없어질 것이 확정이 되어있는 구세대의 유물 신세입니다.
사실 자고저는 제가 학생이었던 1980년대와 1990년대에도 배우지 못했었는데 이제 장단음도 배우지 않으면서 그마저도 사라져 버릴 차례가 된 것이죠.

사실 저는 이 일을 시작했던 2003년부터 '스포츠캐스터'였고, 방송에서 '아나운서'로는 뉴스 한 번 해보지 않았습니다.
대신 인턴 시절 교육 과정에서 뉴스 리딩을 배우기는 했는데, 그걸 배울 때는 장단음과 자고저 참 많이 공부하고, 또 따졌습니다. 솔직히 지금은 지금 많이 잊어버렸지만요.
그렇게 잊었다고 해도 교육을 받던 시절 제 스승인 '임주완 아나운서'에게 배운 내용 중 '장단음'과 관련해서 지금까지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매번 점수를 말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여러분이 방송을 하다가 다른 건 신경을 못쓰더라도 2, 4, 5의 장음 발음 만큼은 꼭 지켜줬으면 좋겠어요."
그는 경기의 가장 기본인 '점수'를 말하는 데 있어서 2,4,5의 긴 발음을 강조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처음 해주실 때부터 철저하게 공감했습니다. 스포츠 중계방송의 가장 기본은 팀 이름과 선수 이름 그리고 점수를 불러주는 것인데 그중에서 가장 반복해서 말하는 '점수 부르기'만큼은 정확하게 지켜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이죠.
지금까지 20년 넘게 방송을 하는 동안 제가 우리말 지킴이라는 의무감은 가지려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방송을 하면서 모든 장단음과 자고저를 다 지킬 자신이 없었거든요. 그리고 영어로 되어있는 용어도 자주 말하고요.
대신 스승의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을 철저하게 지키자는 마음은 그 당시부터 지금까지 계속 가지고 있고, 거기에 더해서 제가 아는 것들은 최대한 올바르게 발음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럼 올바른 발음은 어떻게 알아내느냐? 이것 역시 22년 전 스승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말은 편안한 발성으로 천천히 읽어보면 자연스럽게 자고저와 장단음을 따라가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저는 중계를 하면서 플레이 상황을 콜을 하지 않을 때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발성으로 편안하게 발음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가 모든 단어의 자고저와 장단음을 알지는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해야 그나마 비슷하게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대신 점수를 이야기하면서는 장음인 2,4,5의 경우 최수종 씨처럼 '이이', '사아', '오오'로 발음을 하는 편입니다.

같은 발음에 아예 다른 뜻이 되는 장단음도 어떻게든 아는 경우는 틀리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선행(先行) 주자'입니다. 앞선 베이스에 나가있는 주자는 먼저 선(先) 자를 쓰는 선행주자인데, 여기서 선은 짧게 발음합니다.
그런데 저를 포함한 많은 방송인들이 습관적으로 맨 앞에 오는 한자 단어를 장음으로 발음하려는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이건 예민한 귀를 가진 분들이라면 뉴스를 들으시면서도 눈치를 채실 수 있는 점입니다. 많은 방송인들이 첫음절을 길게 늘이면서 발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야구 중계에서도 '서언행주자', 또는 자고저를 극대화하면서 거의 '스은행주자'에 가깝게 '선'자를 발음하는 캐스터들이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발음하는 캐스터들이 몰라서 그런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최근 방송 언어에 있어서 기본 값은 장음보다는 단음이거든요. 기본이 짧은데도 이들이 '선행'을 장음으로 하는 이유는 위에 언급한 첫음절에 대한 매우 '아나운서적'인 습관 때문입니다. 이걸 알고 있는 이유는 제가 같은 오류를 범해봤기 때문입니다. 뻔히 알고 있는데도 저도 습관처럼 저렇게 길게 뽑아서 발음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한자 '선' 중에서는 착할 선(善)이 긴 발음입니다. 선행 주자에서 '선' 자를 길게 발음하면 착한 일을 행하는 주자가 됩니다.
물론 앞에 나가있는 주자가 득점까지 하면 팀에는 착한 일이기는 하지만 본래 뜻과는 완전히 무관해지는 거죠.
저를 포함한 많은 방송인이 은연중에 맨 앞 한 글자를 길게 발음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게 자고저와 장단음을 지키는 것이라고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죠.
저도 이런 실수를 몇 번 해봐서 이 경우는 '앞선 주자'로 단어를 바꿔서 부르고 있습니다. 실수를 예방하자는 차원에서요. 그리고 선행주자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올 때는
'내가 맞게 발음했나?'
체크를 하고 길었다 싶으면 짧게 다시 발음합니다. 다른 단어들도 제가 알고 있는 것이나 뒤늦게 떠오르는 음절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대처하고 있습니다.
장단음이 아무리 없어지더라도 잘못된 정보는 주면 안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얼마 전 박찬욱 감독이 출연한 유튜브 콘텐츠를 봤습니다.
함께 작업한 이병헌, 이성민, 손예진, 박희순 등의 배우들이 박찬욱 감독과 함께 작업하는 것에 있어서 가장 어려워했던 점이 '자고저'와 '장단음'에 대한 상세한 디렉션이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저는 그렇게 까지 철저하게 지키지는 못하지만 제가 아는 것만큼은 지켜보려고 노력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그런다고 제가 서있는 야구 세상이 크게 바뀌지는 않겠지만 누군가는 조금이라도 이해해 줄 걸로 믿으면서요.
<SBS스포츠 정우영 캐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