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5 누르고 쏘나타까지 위협한 차" 그랜저 보다도 컸던 쉐보레 중형 세단
2010년대 중반 국내 중형차 시장은 더욱 치열해졌습니다. 경쟁사에서는 차세대 쏘나타와 K5를 선보이면서 판매량이 더욱 견고해졌고, 르노삼성 SM5도 페이스리프트를 거쳐 상품성을 끌어올린 플래티넘과 노바를 투입해 시장 3위를 지키고 있었죠. 또, 비장의 무기를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려왔습니다.
8세대 말리부는 오너들의 입소문과 소소한 상품성 개선에도 불구하고 강력해진 경쟁 차량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판매량 역시 토스카의 뼈아픈 과거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어요. 소비자들의 관심이 점점 옅어질 무렵 말리부의 고향 미국에서 반가운 소식이 날아왔습니다. 2015년 뉴욕 모터쇼에 등장한 '9세대 올 뉴 말리부'는 그야말로 환골탈태했고, 약간의 뜸을 들인 뒤 이듬해인 2016년, 국내 시장에 정식으로 출시됐죠.
외관은 이전 세대를 떠올리기 어려울 만큼 파격적으로 달라졌습니다. 쉐보레 로고만 없으면 아예 다른 차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어요.
단단하고 무게감이 있지만, 투박함이 함께 묻어났던 전작과 달리, 날카롭게 빚은 그릴과 램프로 인상이 한층 스포티해졌고 여기에 잘 다려진 정장 바지의 칼주름처럼 철판에 힘을 준 것은 전작의 견고함과 강인함을 이어주는 디테일이었죠. 낮게 깔린 헤드램프와 그릴, 역방향으로 꺾인 LED 데이라이트가 게슴츠레한 인상으로 보이기도 해 '메기부'라는 별명을 갖기도 했습니다.
달라진 분위기를 가장 크게 체감할 수 있는 건 측면이었습니다. 무려 그랜저보다 긴 늘씬한 전장이 시선을 사로잡았고, 매끈하게 떨어지는 쿠페 스타일의 루프 라인은 유려함마저 느껴졌어요. 넉넉한 휠 하우스는 여전해서 하위 트림 모델들도 여전히 볼품없어 보였지만, 19인치 거대한 메탈릭 휠의 존재감은 상대적으로 엄청났습니다. 중간 등급부터 이 휠을 선택할 수 있었고, 선택 비율도 높아서 길에 굴러다니는 말리부 볼 때마다 눈이 즐거웠죠.
후면부의 치켜 올라간 트렁크 끝단은 스포일러 역할을 겸했고, 트렌드였던 매립형 듀얼 머플러로 스포티하게 마무리했습니다. 날렵한 디자인의 테일램프에는 면발광을 더해 고급감도 챙겼죠.
두툼한 덩어리감으로 존재감을 어필했던 전작과 달리 모든 면이 얄쌍해졌는데, 무게감을 덜어내면서도 가로선을 강조한 디자인 등으로 시각적으로 무게중심을 낮게 가져가면서 이를 보완한 느낌이었습니다. 실제 전폭은 경쟁차 중 가장 좁은데, 수치에 비해 훨씬 넓어 보이는 것만 봐도 그렇죠.
개인적으로 램프 디자인 덕분인지 오히려 뒷모습만 보면 LF쏘나타보다 더 '쏘나타 후속' 같은 느낌이 있었어요. YF쏘나타가 등장했을 당시에 일본 업체들이 파격적인 디자인에 엄청난 충격을 받아 디자인 전략에 큰 영향을 받은 적이 있죠. 놀랍게도 사실인데, 올 뉴 말리부 역시 '쏘나타 쇼크'에 영향이 일부 들어갔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또 '후륜 로워암'이 휑하니 보이는 것도 조금 의아한 부분이었습니다. 듀얼 머플러 팁이 포함되는 2.0L 모델은 사정이 낫지만, 대부분은 1.5L 모델이라 마치 반바지를 입은 듯 드러나 있는 게 좀 그렇더라고요. 까맣게 칠해놨으면 덜했을 텐데, 은색이라 밤에 보면 눈에 너무 잘 띄었어요.
든든하지만 동시에 갑갑했던 실내도 신형으로 오면서 크게 달라졌습니다. 탑승객을 둥글게 감싸는 '랩 어라운드' 디자인과 좌우대칭이 돋보이는 것은 전작과 동일했지만, 인포테인먼트 모니터를 상단에 배치해 전체적인 대시보드 높이를 낮추면서 개방감이 돋보였고, 안 그래도 넓어진 공간이 더 확실하게 체감됐어요.
여기에 대부분의 선과 면을 날카롭게 처리해 외관의 스포티한 분위기를 실내에도 고스란히 반영했습니다. 전작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던 앰비언트 라이트와 투톤으로 처리한 대시보드, 폭넓게 두른 가죽 마감으로 입체감과 고급감을 챙긴 부분도 좋았죠. 센터패시아를 꽉 채우던 버튼들은 상당수 8인치 터치스크린 안으로 통합되면서 한결 말끔해졌습니다. 그중에서도 비상등 버튼의 위치가 가장 반가웠어요.
분위기에 맞춰 단정해진 계기판은 중앙에 위치한 LCD 정보창의 크기를 키워 주행에 필요한 다양한 정보를 보기 쉽게 제공했고, 날렵한 디자인의 스티어링 휠도 직관적인 버튼 배치로 각종 기능을 조작하기 편리했습니다. '열선 스티어링 휠'버튼 위치가 참 사랑스럽죠.
다만 '멤브레인' 방식의 버튼 질감은 좀 안 좋은 편인데, 중학생 때 쓰던 저렴이 mp3 플레이어 같은 재질이에요. 딱히 기능상의 문제는 없지만 이걸 대형급 모델에도 쓰더라고요. 내비게이션의 구린 성능은 여전했지만, 이번에도 중저음이 돋보이는 9개 스피커의 'BOSE 프리미엄 사운드'가 대신 달래줬고, 개선된 마이링크 시스템으로 애플 카플레이를 지원하면서 불만은 크지 않았습니다.
또 가장 낮은 트림에 오디오 유닛을 제공하는 경쟁차와 달리 7인치 마이링크 터치스크린을 기본 사양으로 갖춘 것도 돋보이는 부분이었죠. 이 밖에 앞좌석 통풍 시트, 파노라마 썬루프, 정차 및 재출발까지 지원하는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은 물론, 자동 긴급 제동과 차선이탈 방지 시스템을 갖추는 등 경쟁차에 밀리지 않는 편의 및 주행 안전 사양을 만재해 경쟁력이 눈에 띄게 높아졌습니다.
또, 전장은 길지만 실내 공간은 가장 작아 많은 지적을 받았던 전작에 비해 모든 부분에서 크게 키운 차체로 넉넉한 거주성을 제공하면서 더 이상 옵션과 공간 때문에 말리부를 고민하는 일은 없어졌어요. 눈에 띄게 넓어진 뒷좌석 공간은 쏘나타 못지않았죠.
하지만 쉐보레답게 나사 하나 풀린 구석은 여전했습니다. 누르면 주황색으로 빛나는 통풍 시트 버튼이 마치 따뜻한 바람이 나올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은 애교였고, 수직으로 꽂아 놓는 방식의 스마트폰 무선 충전 장치는 의도대로 주행 중 핸드폰을 못 보게 하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공간이 협소해 케이스를 끼우거나 덩치가 큰 스마트폰들은 넣는 것조차 힘들었죠.
또 쾌적해진 뒷좌석에 열선을 빼놓은 채 출시하거나 좌우에서 상하로 바뀌었을 뿐인 엄지 버튼, 패들 시프트 같은 게 생겼길래 좋아했는데, 이거 그냥 오디오 조작 버튼이더라고요. 전자식 주차 브레이크는 꾸준히 챙기지만, 오토 홀드는 끝끝내 안 넣는 등 특이한 행보를 보였습니다.
파격적인 전화는 파워트레인에도 이어졌습니다. 1.5L 4기통 가솔린 터보와 강력한 성능의 2.0 가솔린 터보, 2가지로만 라인업을 구성했는데, 주력인 1.5L 엔진은 준중형차인 아반떼보다 낮은 배기량이었지만, 터보를 추가해 경쟁 모델의 자연 흡기 2.0L 엔진에 뒤지지 않는 성능을 제공했습니다. 준수한 연비는 물론, 배기량으로 세금을 매기는 우리나라 자동차 세법에서도 유리해 성능과 경제성,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성공적인 다운사이징이었어요.
앞서 현대기아차와 르노삼성 역시 1.6L 가솔린 터보 모델을 판매하고 있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2.0 미만의 중형 세단을 구매하는 것이 마냥 익숙하지 않을 때였습니다. 올 뉴 말리부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주력 트림을 과감하게 다운사이징해 패러다임을 바꾸는 상징적인 모델이었죠. 토스카 때도 그렇고 은근히 앞서 나가는 구석이 있는 회사예요.
2.0L 터보 엔진은 프리미엄 브랜드 캐딜락과 공용하는 사양으로 전륜구동 중형차에 맞게 출력을 낮추기는 했지만, 평소에는 부드러운 패밀리카로, 가끔은 운전의 즐거움을 줄 만큼 호쾌한 동력 성능을 선사했습니다.
북미형의 '아이신 8단 자동변속기'가 아닌 보령산 3세대 6단 자동변속기가 매칭 되어 논란이 일기는 했지만, 다행히 개선에 개선을 거듭해 이전만큼 '혹평 일색'은 아니었죠. 스포티해진 외모와는 반대로 주행 감각은 부드러움에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듬직한 외관만큼이나 탄탄한 하체로 호평받은 말리부였지만, 승차감까지 탄탄했던 건 호불호가 갈리는 지점이었죠.
올 뉴 말리부는 주행 성능과 승차감 사이에서 나름의 균형을 찾아 더욱 편안한 승차감을 선사했습니다. 확실히 구형보다 말랑해졌고, 가끔은 출렁이기도 했기 때문에 전작만 못하다고 평가하는 소비자들도 있었지만, 보편적인 소비자들의 성향 가족과 손님을 모시는 이 차의 역할을 생각하면 분명 옳은 방향이었어요.
또 확 커진 차체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강성을 확보하면서도 공차 중량은 오히려 경쟁차 중 가장 가벼운 것은 GM의 기술력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었죠. 한편 1.5L 모델에만 들어간 ISG 시스템은 조금 에러였습니다.
정차 중 공회전을 막아 불필요한 연료 소모를 막고 배기가스를 줄여주는 취지는 좋은 장치지만, 오너들도 언제 기능하는지 모를 정도로 미스터리 한 작동 조건을 갖고 있는 데다 이 기능을 끄고 싶어도 버튼조차 없어 아예 비활성화시키는 분들도 있죠. 또 아무리 가솔린이어도 우렁찬 엔진음을 가진 차들은 오히려 작동하는 게 거슬리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2017년식 모델부터 뒷좌석 열선이 추가되고 전용 알루미늄 휠과 검게 칠한 보타이 엠블럼, 전용 데칼을 더해 외관을 스포티하게 꾸민 '퍼펙트 블랙' 트림을 추가해 주 구매층인 젊은 남성 소비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또 '이 모델'이 함께 추가됐는데, '차깨나 안다'라고 하시는 분들도 이건 조금 생소하실 거예요.
연식 변경 후 하이브리드 모델이 정식 출시되어 판매된 적이 있었는데요. 자연 흡기 1.8L의 비교적 작은 엔진이 탑재됐지만, 고성능 전기 모터를 결합해 시스템 출력 182마력, 합산 토크 38.3kgf.m의 힘을 발휘했고, 주력 모델인 1.5L 터보를 능가하는 시원스러운 성능과 리터당 17.1 km라는 준수한 연비를 선사했습니다. 소비자 선호도가 높은 하이브리드인데다 든든한 상품성까지 갖췄는데도 아무도 이 차의 존재를 모르는 데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환경부의 '제2종 저공해차 인증'을 통과하지 못해 하이브리드 보조금 혜택을 받지 못했던 건데요. 이산화탄소 배출 기준 충족했지만, 질소산화물과 탄화수소, 일산화탄소 등 이외 기준 중 두 가지 이상 불합격하면서 제2종 저공해차 인증을 받지 못했고, 수백만 원에 달하는 구입 시 세제 혜택이 물 건너가 버렸습니다.
결국 가격 경쟁력을 상실해버린 말리부의 반쪽짜리 하이브리드는 앞서 출시된 '알페온'의 마일드 하이브리드 버전 'e 어시스트'의 선례를 그대로 따라 극소수만 판매되었고, 소수의 오너들만 만족하며 타는 차가 되었습니다.
또 보시다시피 하이브리드 모델임을 알리고 싶어 안달이었던 쏘나타, K5와 달리 소심하게 붙은 'H' 배지를 제외하면 일반 가솔린 모델과 차이점이 없었기 때문에 그나마 팔린 차들마저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올 뉴 말리부'는 사전 계약 첫날에만 2,000여 대를 판매했고, 출시 다음 달인 2016년 6월 한 달에만 6,300여 대를 판매해 K5를 누르고 중형차 3위로 올라서면서 출시와 동시에 쏘나타를 위협하는 중형 세단의 새 강자로 자리매김했죠.
뜸 들이는 사이에 먼저 치고 나온 르노삼성의 야심작 SM6에 판매량 일부를 빼앗긴 것과 가솔린 모델만 판매했던 것을 감안하면 놀라운 성과였습니다. 무엇보다 상품성이 크게 좋아졌음에도 가격이 전작보다 낮아진 점이 판매량을 높이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했습니다. 이후 SM6가 승차감 논란으로 주춤하면서 이에 대한 반사이익을 얻기도 했어요.
한편 엔진 경고등을 동반하는 '엔진 출력 저하' 문제, 정차 후 출발할 때 후륜에서 '뚝-뚝' 소음이 발생하는 '리어 너클 고착', '후면 보조제동등'의 플라스틱 체결 부위가 벌어져 천장과 트렁크에 물이 스며들거나 듀얼 오토에어컨의 '보조석 온도 센서'가 고장 나 한겨울에도 소중한 연인에게 냉풍을 쏘는 등의 번거로운 잔고장이 있다고 하니, 중고차 구매하실 분들은 정비 여부를 확인하시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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