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이 아닌, 중·러를 먼저 꺼낸 사령관
제이비어 브런슨 주한미군 사령관은 2025년 11월 주한미군 공식 홈페이지와 한국 언론에 ‘East‑Up Map: 숨은 전략적 이점을 드러내다’라는 제목의 글을 공개했다. 이 글에서 그는 “한반도에 배치된 미군은 단지 북쪽의 공격을 막기 위한 증원 대상이 아니라, 유사시 이미 적의 A2/AD 버블 안에 들어가 있는 선제 전력”이라고 규정했다.
특히 눈길을 끈 대목은 언급 빈도였다. 1,400여 단어 분량의 글에서 브런슨은 북한을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고, 대신 러시아를 최소 세 차례, 중국을 두 차례 이상 거론했다. 주한미군사령관이 ‘북 위협’ 대신 ‘중·러 견제’를 전면에 내세운 것은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한국과 미국 안보 전문가들 사이에서 나왔다.

한반도를 중심에 둔 ‘뒤집힌 지도’
브런슨이 내놓은 지도는 기존의 ‘북쪽이 위’가 아니라, 동쪽(서태평양 방향)을 위로 올린 형태였다. 이 지도를 기준으로 캠프 험프리스(평택)를 중심에 찍고, 주변 주요 도시까지 직선거리를 표기하면 다음과 같다.
평양: 약 158마일(약 254km)
베이징: 약 612마일(약 985km)
블라디보스토크: 약 500~1,100마일(자료에 따라 표기 차이)
도쿄, 타이베이, 마닐라까지의 거리도 지도에 함께 표시
그는 “이 관점 변화는 한국의 역할을 자연스러운 전략적 피벗으로 드러낸다”며, 한국이 러시아 북방 위협에 대응하면서 동시에 한·중 사이 해역에서 중국 활동에 맞설 수 있는 ‘서측 접근성(western reach)’을 제공한다고 설명했다.

‘비용부과(cost‑imposition)’ 전략의 전진 기지
브런슨이 반복해서 사용한 개념이 ‘비용부과(cost‑imposition)’다. 이는 적의 행동을 더 비싸고 위험하게 만들어, 스스로 포기하거나 축소하도록 유도하는 전략을 뜻한다. 그의 논리는 이렇다.
러시아 북방 함대가 동해(일본해)로 내려오려면 쓰시마 해협 북쪽과 동해 북방 해역을 통과해야 하는데, 한반도는 이 해역을 감시·타격할 수 있는 전진기지 역할을 한다. 주한미군·주한미 해군 전력이 존재하는 한, 러시아는 함대를 움직일 때마다 노출·우회·기습가능성 증가라는 ‘추가 비용’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해(황해)에서도 한반도 전력은 중국 북부전구 육군과 북방함대 움직임을 동시에 견제할 수 있다. 서해 상공·해역에 전개된 미·한 정찰·타격자산이 중국 함정·항공기의 행동 반경을 제약하면서, 작전 난도와 리스크를 크게 높이는 효과가 있다는 설명이다.

“주한미군은 버블 밖 증원이 아니라, 버블 안 전력”
브런슨은 ‘뒤집힌 지도’ 글에서 인도·태평양 전략의 핵심 개념인 제1도련선(오키나와–대만–필리핀–보르네오 섬으로 이어지는 선)을 언급하며, “동쪽을 위로 올려 보면 한반도가 단지 한쪽 끝이 아니라, 이 도련선 전체를 향해 방사형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허브”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렇게 보면 한반도에 주둔한 2만 8,500명의 미군은 멀리 떨어져 있어 증원이 필요한 전력이 아니라, 이미 적의 접근거부/지역거부(A2/AD) 공간 안에 들어가 있는, 즉시 투입 가능한 전력으로 보이게 된다”고 했다. 유사시 괌·하와이·미 본토에서 날아오는 증원군이 ‘버블 밖 전력’이라면, 주한·주일미군은 이미 버블 내부에서 활동을 시작할 수 있는 ‘선제 전력’이라는 인식이다.

“고정된 항공모함(fixed aircraft carrier)” 발언의 의미
브런슨은 2025년 5월 미 육군협회(AUSA) 주최 하와이 랜드포스 퍼시픽 심포지엄에서도 비슷한 메시지를 던졌다. 그는 “한국은 베이징과 가장 가까운 미국 동맹이자, 일본과 중국 본토 사이에 떠 있는 섬, 다시 말해 ‘고정된 항공모함’과 같다”고 말했다.
이는 그동안 미국 전략가들이 대만·일본을 두고 사용하던 표현을, 처음으로 한국에 직접 적용한 사례로 주목받았다. 한국이 단지 북한 방어선이 아니라, 미·중 전략 경쟁에서 항공력·해군력을 전개하는 거점이라는 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발언이다. 같은 달 그는 “아시아 대륙에 상시 배치된 미 지상군은 주한미군뿐”이라며, 한반도 주둔 미군이 인도·태평양 전략 전체에서 가지는 지상군 허브로서의 가치도 함께 언급했다.

전임 사령관과 다른, ‘전략적 유연성’ 강조
흥미로운 것은 전임 폴 러캐머라 사령관의 언급과의 대비다. 러캐머라는 “주한미군이 한반도 밖까지 신경 써야 하느냐”는 질문에 “주한미군의 임무는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따른 한국 방어이며, 나의 초점은 오직 대한민국에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반면 브런슨은 취임 후 첫 기자간담회에서 “전략적 유연성이란 병력과 장비를 필요한 때 필요한 곳에 배치할 수 있는 능력”이라며, “동북아와 인도·태평양 전체의 평화를 유지해야 하는데 주한미군 역량을 한반도에만 묶어두는 것은 군사적으로 적절하지 않다”고 했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 시기부터 미국 내 주류로 굳어져 온 ‘주한미군 전략적 유연성’ 논의를, 동맹국 한국을 향해 보다 노골적으로 설명한 셈이다.

교육용 ‘뒤집힌 지도’에 담긴 비밀 작전 시나리오
주한미군은 브런슨 지시로 내부 교육용 브리핑에서 ‘East‑Up Map’을 사용해 왔다고 알려져 있다. 이 지도를 기준으로 캠프 험프리스를 중심에 놓고 보면, 북한보다 대만·필리핀·남중국해가 더 눈에 띄게 배치된다. 조선일보·한겨레 등은 이를 두고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거나 남중국해에서 충돌이 벌어질 경우, 주한미군이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염두에 둔 시각”이라고 해석했다.
즉, 이 ‘뒤집힌 지도’는 단지 교육용 시각자료가 아니라, 대만해협·동중국해·남중국해 유사시 주한미군 일부를 파견하는 이른바 ‘전략적 유연성 작전’의 내부 시나리오를 그림으로 각인시키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한반도 밖 작전에 대한 미군의 상정이 구체적 단계에 들어섰음을 보여준다.

한국에 던지는 질문: “이 역할을 받아들일 것인가”
브런슨의 글과 발언은 한편으로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가치를 재조명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 사회에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한국이 스스로를 “북한 억제에 특화된 방패”로만 볼 것인지, 아니면 중국·러시아 견제를 위한 ‘전략적 피벗 허브’ 역할까지 수용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다.
미국 입장에서는 이미 답이 나와 있다. 브런슨이 굳이 북한을 빼고 중·러만 언급한 글을 공식 사이트에 올린 것 자체가, 주한미군을 인도·태평양 전역 작전에 활용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입장에서는, 이런 전략적 유연성이 자칫 대만해협·동중국해 위기에서 한국을 원치 않는 분쟁에 휘말리게 할 수 있다는 우려도 존재한다.
지도를 뒤집어 한반도를 중심에 놓고 본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이 감당해야 할 책임과 위험도 함께 커진다는 의미다. 브런슨이 설득하고 싶었던 ‘비밀 작전’의 본질은, 주한미군을 단지 한반도의 방패가 아니라 인도·태평양 전체를 가로지르는 창으로 쓰겠다는 전략적 변화이며, 그 변화에 한국이 얼마나, 어떤 조건으로 동의할 것인지가 앞으로의 핵심 쟁점이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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